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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118화 (119/146)

118화

홍도화紅桃花.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도화는 제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홍도화. 붉은 복사꽃.

‘나는 왜 그 꽃나무를 내 이름으로 지은 걸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릴 적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여러 이야기를 들었고 그 중 세상에서 으뜸가는 복숭아는 반도원蟠桃園의 반도蟠桃이지만, 꽃과 향기만 놓고 본다면 별천계의 홍도화를 따라올 수 없다는 이야기가 뇌리에 강렬히 남았었다.

홍도화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그저 꽃과 향기가 으뜸이라길래 솔깃했다. 언젠가 먼 발치에서 보았던 탐스러운 복숭아가 떠올라 껍질이라도 핥아 보고 싶은 마음에 이름으로 정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홍도화란 이름은 어쩌다 들은 이야기 중 그 단어가 머리에 꽂혀서 이름 삼았다고 도화의 머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네 기억이 정말 온전하다고 믿는가?]

그런데 현무가 했던 말 중 가장 신경 쓰이는 말이 자꾸만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내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면. 왜곡되었다는 건가? 어느 부분이 어떻게?’

어제는 스승이 죽던 날의 기억을 복기하느라, 오늘은 멀쩡하기만 한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말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다.

오늘은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이란 게 다를 뿐이었다. 어제는 정말 이유도 없는 두통이었고.

‘두통도 뭔가 있나?’

이쯤 되니 도화는 사소한 것 하나도 수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냥 무시해 버릴 수도 없고.’

현무별저에 온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화는 내내 찝찝함을 털어 낼 수 없었다. 평소의 그라면 무슨 헛소리냐며 무시했을 테지만, 찝찝한 말을 한 사람이 현무인 게 문제였다.

오방대제 중 하나가 심심해서 지나가던 반귀물을 잡아다 장난을 치진 않을 테고. 게다가 귀찮은 것이라면 질색인 현무가 하는 말이라 도저히 무시하기 힘들었다.

도화는 자신이 휴가를 보내러 온 것인지 답 없는 질문에 정신 공격받으러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또… 시리얼입니까?”

영귀가 가져온 점심 식사는 예상했던 대로 시리얼이었다. 매끼마다 시리얼 종류와 과일을 바꿔 나오고 있지만, 시리얼은 시리얼일 뿐.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안 든다. 매우. 무척이나. 진심으로 들지 않는다.

하지만, 차마 사실대로 말하기 두려웠다. 이유는 독설 때문이었다.

‘나라면 절대 영귀랑은 같이 못 산다.’

차라리 현천이 낫지. 시끄럽고 툭하면 피 좀 달라고 조르지만, 정신이 흔들릴 정도로 독한 말은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현천은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간에 술타령, 피타령에 입을 쉬지 않고 조잘거렸을 테니 현무가 영귀는 곁에 둔 것은 이해했다.

하루 정도 지켜보니 영귀는 놀라울 정도로 느리긴 해도 현무에겐 아주 깍듯이 대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다간 냉동 거북이가 될 테니까.’

어쨌든, 도화는 영귀에게 식사 메뉴 개선 요구를 하려다 말았다. 왜 말을 하다 마느냐고 타박받을 각오로 아니라고 말을 맺었다.

다행히 영귀도 현무의 편향된 식성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는지 도화를 타박하는 일은 없었다.

“흑제께서 한 가지 음식에 빠지면 그것만 드시는지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손님상만 따로 차리자니 제가 손이 모자라서요.”

영귀가 오른쪽 앞다리를 흔들며 말했다. 어딜 봐도 발이었지만, 손이라고 주장하는 영귀에게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국인이라면 매운 걸 먹어 줘야 뭔가 먹은 것 같고 그렇지 않습니까?”

“……?”

영귀가 껄껄 웃으며 손을 배 아래로 넣고 꿈지럭거렸다. 뭔가 꺼내는 것 같았다.

“단조로운 맛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과일과 견과류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래도 시리얼은 시리얼.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매운 게 당기실 겁니다. 그러니 꿀 대신 이걸 넣어 드세요.”

영귀가 배에 붙어 있던 것을 떼어 도화에게 내밀었다. 도화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흑제께는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 예…….”

“그러면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영귀가 방에서 나간 뒤, 도화는 얼떨결에 받은 것을 살폈다. 납작한 반찬통이었다.

설마 하고 뚜껑을 열어 보니 새빨간 고추장이 가득했다.

“…….”

이걸 어쩌라고?

우유팩 옆에 고추장이 든 반찬통을 내려 둔 도화는 두 개를 번갈아 쳐다보며 이걸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분명 영귀는 이걸 주면서…….

[꿀 대신 이걸 넣어 드세요.]

라고 했다.

‘그러니까 꿀 대신 우유에 고추장을 넣어 먹으라고?’

도화는 조용히 고추장 통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릇에 우유와 시리얼을 부었다.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보자.’

우적우적 시리얼을 씹어 삼키며 공짜 숙박과 식비에 홀려 이곳에 머물기로 한 어제의 자신을 원망했다.

‘내가 살면서 음식 투정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기근이 들면 나무뿌리까지 캐서 씹어 먹던 도화였다. 나무뿌리가 다 뭔가. 껍질도 뜯어 먹고 썩은 나무 속에서 벌레까지 잡아먹었다.

그런데 고작 몇 끼를 시리얼만 먹었다고 다른 음식을 달라고 할 뻔했다. 과거의 굶주린 홍도화는 바닥에 흘린 우유도 핥아 먹었을 텐데.

네가 배가 불러도 너무 불렀구나. 도화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자책했다.

“아, 맞다. 두통약이랑 와이파이 비밀번호.”

영귀를 만나면 말해 보려고 했던 걸 시리얼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있는 등껍질을 잠시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역시. 저걸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서 먹고 일이나 해야겠다.’

자신과 관련된 미해결 사건을 정리하고 연관점을 찾기 위해 휴가를 받았으니 우선 그것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다음에 현무가 말한 막힌 생각의 물꼬를 틔우고 왜곡된 기억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로 했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제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기억에 없지만,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의문의 존재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 * *

“머리가 아프시다고요?”

침대로 올라온 영귀가 누워 있는 도화의 이마에 앞발을 올렸다.

“체온이 높군요.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귀물이 이리 허약해서야. 쯧.”

도화는 이마에 시원한 감촉을 느꼈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영귀 님의 손이 차가워서 그런 겁니다.”

“으잉? 아닙니다. 제가 얼마나 따뜻한 거북이인지 몰라서 그러시는군요.”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우선은 원만하게 두통약을 받아 내는 게 중요했다.

“단순한 두통입니다.”

“단순한 두통은 없습니다. 풀잎이 흔들리는 것마저도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것이 만물의 이치, 천지왕님의 의지이십니다.”

“그렇군요.”

두통약만 주면 끝날 일인데 만물의 이치에 천지왕까지 들먹이는 영귀 때문에 도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나십니까?”

“두통약이 없는 것 같아서 나가서 약국이라도 찾아보려 합니다.”

“가만히 있어 보세요.”

“?”

침대에서 벗어나려는 도화를 영귀가 다시 밀어 눕혔다.

“거북이 손이 약손이라는 말도 못 들어 보셨습니까?”

처음 듣습니다만.

이 말 역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병막이 신이 거북이와 남생이라는 것도 모르시다니. 홍도화 님은 아는 게 뭐가 있습니까?”

물론 병막이 신이 거북이와 남생이라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반박할 틈도 없이 영귀가 앞발로 도화의 이마를 탁탁 쳤다.

“병막이 신만큼은 아니지만, 이래 봬도 효과가 좋답니다.”

영귀는 팍팍 소리가 날 정도로 도화의 이마를 세게 쳤다.

‘확실히 두통이 줄어든 거 같긴 한데…….’

대신 이마가 아팠다. 두통이 누그러든 게 아니라 이마가 아파서 상대적으로 두통이 잘 느껴지지 않다고 하는 게 맞았다.

“먹는 약은 없습니까?”

“흠. 이래도 아픕니까?”

“이마가 아픕니다.”

“그래요? 이상하네. 흑제 님은 딱 한 번만 쳐도 다 나았다고 하시던데.”

계속 맞기 싫어서 아파도 다 나았다고 거짓말하는 게 분명했다.

“굳이 먹는 약이 필요하다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군요. 신경성이건 머리에 이상이 있어서건 간에 이 정도로 치면 다 나을 텐데.”

침대에서 내려간 영귀는 배에서 엄지만 한 작은 통을 꺼내 도화에게 주었다. 약을 챙겨왔으면 처음부터 줄 것이지. 맞은 이마가 얼얼해서 억울했다.

“혹시 뭔가 주술이나 저주에 걸린 적이 있으신지요.”

“그런 적 없습니다.”

“이상하네.”

영귀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혹시 모르니 나중에라도 검사를 받아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런 것까진 어찌해 볼 능력은 없거든요.”

영귀는 푹 쉬라는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갔다.

‘주술? 저주?’

저를 쫓던 도깨비들이라면 그런 짓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작 두통을 유발하는 효능이 전부인 주술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아 보였다.

‘정말 걸렸었다면 국장님이 바로 눈치채지 않았을까?’

도화는 그럴 리 없다며 영귀가 주고 간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약 기운이 어서 몸에 퍼지길 기다렸다.

‘거북이 손이 약손이라는 말은 진짜였던 것 같았는데.’

고작 한 대긴 하지만, 현무가 맞아 주었다니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영귀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진짠가?’

도화가 두통이 온 이유는 이번에도 스승에 대해 메모를 한 노트 때문이었다. 목표는 제 주변에 일어났었던 미해결 사건을 정리하고 두통과 광증 외의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는데, 하필 펼친 페이지에 스승을 생각하며 적은 의문점이 적혀 있었다.

아무 의미 없이 눈에 들어온 것을 읽은 것뿐이었는데.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통증을 느끼자마자 ‘이건 정상적인 통증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갑작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감각이었다.

스승에 대해 작은 의심이라도 할라치면 방해라도 하듯 통증이 튀어나오니 스승을 절대적으로 믿는 도화라 할지라도 의심의 싹이 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현무를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의심의 ㅇ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통이 심해지면 결국 통증에 집중하느라 스승에 대한 생각이 멈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가 스승님을 의심하다니. 천하의 몹쓸 제자로구나.’라는 죄책감이 뒤따랐다.

죄책감은 자연스러웠으나 죄책감을 부르는 두통은 인위적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무리 자연스럽게 죄책감을 느낀다 한들, 그것 역시 정상적인 감정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으…….”

영귀에게 맞은 이마의 얼얼함이 가시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통증이 비수처럼 머리에 박혔다. 영귀가 준 두통약은 영 효과가 없다.

‘나중에. 이건 정말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미해결 사건부터 정리해야 해.’

도화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미해결 사건을 정리하다 만 페이지를 찾아 넘겼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두통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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