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현무가 말하는 자신의 막힌 생각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나, 지금 그가 해 주려는 것은 스승을 죽인 범인을 찾는 데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현무는 소파 팔걸이에 상체를 기대어 자세를 편히 잡고는 도화에게 물었다.
“네 스승이 죽었을 당시의 어린 너는 저승 차사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었지?”
현무의 질문에 도화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죽은 자의 영혼을 가져가는 저승 차사는 온통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 갓을 썼다는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세 살 먹은 코흘리개도 다 아는 정보다. 최소한 귀물과 교류만 했어도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았을 테지만. 그때 당시의 어린 도화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스승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저승 차사가 된 네 시점으로 그때 그 상황을 다시 한번 복기해 봐. 시간은 충분히 줄 테니까.”
흐아암.
말끝을 하품으로 마무리한 현무는 아예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아무리 이쪽이 까마득한 아래라지만 그래도 저런 태도는 너무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현무의 시선이 사라지자 좀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복기를 할 필요가 있나?’
잊을 만하면 꾸던 꿈이었고 최근에는 몽식 덕분에 더욱 자세하게 꾼 꿈이라 지금도 생생했다. 그래서 그때를 다시 복기해 보라는 현무의 제안에 실망을 했다.
‘한껏 기대하게 만들더니만. 현천을 내게 떠넘기려 하기 위한 낚시였나.’
애초에 도화는 현천을 현무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물론, 현무가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린다면 유의미한 반항을 할 순 없겠지만.
현천이 현무에게 돌아간다고 나서지 않는다면 계속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제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
“딴생각할 여유가 있나 보지?”
“…!!”
잠든 거 아니었나?
도화는 잡생각을 파고든 현무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현무는 소파에 누운 상태로 도화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하기 싫으면 여기 머물면서 천천히 해도 돼. 방이야 차고 넘치니까.”
‘머물면서 해도 된다고?’
현무의 말을 들은 도화는 영귀의 안내를 받아 현무별저에 들어와 현무의 방에 도착할 때까지 보았던 환경을 떠올렸다.
현무와 영귀 외에 다른 이는 보이지 않는 조용한 환경, 현무의 영향 탓인지 항상 서늘한 온도, 공짜로 방 하나를 사용할 수 있는 혜택까지.
‘여기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단기간에 주입된 대량의 정보를 정리할 만한 조용한 곳. 게다가 숙박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조건인 곳이다.
숙박비 무료라는 조건과 마주한 순간 도화의 머릿속에서 다른 곳을 찾아보겠다는 선택지는 삭제되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음?”
다시 잠들려고 감기던 현무의 눈이 부탁이란 말에 번쩍 떠졌다.
“무슨 부탁?”
“일주일간 여기서 머물게 해 주세요.”
“여기서?”
새카맣고 동그란 눈동자가 도화의 눈과 마주쳤다. 도화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일은? 내가 은거하는 사이 차사국이 느슨해진 건가? 어찌 일주일이나 휴가를 받아?”
“두 달 가까이 야근을 새벽까지 하면 일주일 휴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 아까 그랬다고 했었지. 역시 차사국은 쳐다도 보질 말아야 해.”
거기서 일하고 있는 장본인 앞에서 못 할 말을 한 현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허락했다.
“영귀에게 일러두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나 보군. 들어와라.”
현무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한참 전에 영귀가 식사 준비를 한다고 나갔으니 당연한 말이긴 한데.
‘영귀는 거북이잖아?’
거북이가 어떻게 요리를 하고 상을 차려서 여기까지 가져온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오면 알 수 있겠지.’
도화는 어떤 음식이 나올지 기대하며 기다렸다. 순수하게 오방대제인 현무의 식탁에는 무슨 음식이 올라오는지가 궁금했다.
드르륵. 소리가 나며 거북이 모습을 한 영귀가 방으로 들어왔다.
‘혼자?’
도화는 당연히 시종들이 사람으로 변할 수 없는 영귀를 도와 식사 준비를 했을 것이라 예상했다. 영귀가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다면 주인의 시중을 느려 터진 거북이 상태로 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종들과 함께 올 줄 알았는데, 영귀 홀로 방에 들어왔다. 영귀가 느릿하게 한 걸음 기어 올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정체는 영귀의 등딱지에 올려진 나무 쟁반이었다. 쟁반은 영귀의 등딱지보다 4배는 더 컸는데 용케도 중심을 잘 잡고 움직였다.
‘저게… 식사?’
나무 쟁반에 담긴 식사는 도화도 익히 아는 음식이었다. 바쁜 현대인이 빠르고 간편하게 해결할 수 있게 나온 음식.
“시리얼?”
속으로 중얼거린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정도로 식사라고 나온 음식이 충격적이었다.
“요즘 저거에 맛 들려서 삼시세끼, 간식까지 시리얼을 먹고 있지.”
“그…렇습니까?”
“과일과 꿀을 넣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아나?”
“맛…있지요. 매우.”
도화는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 게 과일과 꿀이다. 하지만, 이걸 아침도 아니고 늦은 점심, 그것도 손님상으로 내오다니.
도화의 흔들리는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현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영귀가 다가오자 현무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나무 쟁반을 들어 탁자에 올렸다.
그리고 도화에게 시리얼 볼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어색하거나 더듬지 않고 말했다. 시리얼 볼을 받은 도화는 현무가 하는 대로 따라서 과일과 꿀, 견과류 등을 넣어 먹기 시작했다.
확실히 맛은 있었다. 맛이 없을 리 없는 조합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방금 전 현무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요즘 시리얼에 맛 들려서 삼시세끼, 간식까지 시리얼로 먹고 있다는 말.
‘설마 일주일 내내 식사가 이렇진 않겠지.’
도화는 불안함을 부수기라도 하듯이 바삭한 시리얼을 이로 짓눌러 삼켰다.
* * *
영귀가 안내한 방은 현무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방이었다. 워낙 조용한 곳이라 어느 방으로 가도 특별히 다른 점은 없을 것 같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여기 이걸 두드리면 됩니다.”
영귀가 협탁 위에 있는 거북이 등껍질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 거북이 등껍질?’
어딜 봐도 거북이 등껍질이 맞다. 심지어 현재 영귀의 등껍질 크기와 색, 무늬까지 거의 흡사했다.
설마 동족을 죽여 만든…….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저건 제 등껍질이니까요.”
“아…….”
그저 속으로 생각만 한 것뿐인데 표정으로 드러났나 보다. 도화가 무서운 오해를 하기 전에 영귀가 선수 쳤다.
“탈피한 제 등껍질입니다. 두들기면 바로 제게 전달이 되니 정말 급한 일에만 부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러니까 사소한 일로 귀찮게 부르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개인적인 일로 느려 터진 영귀를 부를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던 도화였기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흑제 님과 함께—.”
“아닙니다. 방으로 가져다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도화는 황급히 거절했다. 일주일 내내 불편한 식사를 하는 것은 사양이다.
“그런데 혹시…….”
“뭐가 궁금하십니까?”
영귀가 고개를 쭉 빼 들어 도화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쯧쯧…. 사나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항상 뒤끝 없이 다부지게 행동해야 합니다. 어찌 그리 말을 하다 말고, 말끝을 흐리고, 상대방을 답답하게 하는 겁니까? 그러고도 사내라 주장할 것이면 다리 사이에 그걸 떼는 게 낫겠군요.”
“…….”
속사포처럼 쏟아진 영귀의 힐난에 도화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멍해졌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으면 이렇게 되나 보다. 처음 겪는 상황에 도화는 화도 치밀지 않았다.
“저녁 식사는 네 시간 후에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편히 쉬세요.”
“…….”
도화가 대답이 없자 영귀는 한심스러운 것을 본 것처럼 한숨을 푹 쉬고는 꿍얼대며 나갔다.
나가서 다행이란 안도도 잠시. 워낙 느려 터진 영귀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 도화는 영귀의 꿍얼거림을 듣고 있어야 했다.
영귀가 나가고 방에 홀로 남게 된 도화에게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그냥 갈 걸 그랬나?”
일주일 정도 숙박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현무별저에서 지내면 숙박비와 식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아니야. 티끌 모아 태산이란 걸 잊지 말자.”
도화는 우선 여행 가방을 활짝 펼치고 집에서 입던 실내복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가져온 필기도구를 꺼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엎드려 노트를 펼친 도화는 우선 현무가 해 보라고 했던 악몽을 복기해 보기로 했다.
장마철. 여름밤. 스승님이 당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함. 저린 다리 때문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나타난 괴한이 스승을 공격.
‘내가 그때 반나절 정도 갇혀 있었지.’
도화는 손가락으로 펜을 굴리며 생각했다.
그날은 별것도 아닌 일로 대낮부터 당집에 갇히는 벌을 받았다. 다리가 저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질 정도의 시간을 갇혀 있었다.
※당집 안에서 반나절 정도 갇혀 있었다.
→ 낮에 갇혀 있다가 밤이 되었다.
→ 본인이 벌을 내린 사실을 잊어버린 느낌
→ 나에 관한 것은 사소한 것까지 모두 기억하는 스승이었는데. 그 날은 많이 이상한 날.
노트에 메모를 해 두고 다음에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오래되어 비틀린 나무 틈새로 떨어지는 빗물에 온몸이 흠뻑 젖어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제게 벌을 내렸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아서 스승의 명을 어기고 당집을 나오려는데 스승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귀가 아닌 머릿속에 박히는 것처럼 들렸었어.’
※스승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들렸다.
→ 처음 있는 일. 스승님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나?
※범인이 낮은 목소리로 스승에게 여기 숨어 있으면 못 찾을 줄 알았냐고 말했다.
→스승은 그 남자에게서 숨어 지내던 중에 나를 거두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 나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는 여유가 있던 걸까?
‘아니야. 그렇다기엔 그 남자한테 너무 쉽게 당한 것 같았어.’
도화는 아랫줄에 추가로 메모했다.
→ 정 많은 스승님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해 보이는 아이를 외면할 순 없었을 것이란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목숨보다 생판 남인 아이를 거뒀다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펜을 쥔 도화의 손이 머뭇거리다 천천히 한 줄을 더 추가했다.
→ 나를 거둘 만한 이유가 있던 걸까?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