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네 스승의 원수를 찾는다고 들었는데.”
현무가 이번에는 스승을 입에 담았다. 당장 자신의 스승을 아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침착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주둥이를 영원히 얼려 버리겠다는 현무의 경고가 빈말이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네가 생각하기에도 정보가 너무 없다고 생각되지 않나? 범인들의 이름은커녕 스승의 이름조차 모르잖나.”
“그건…….”
현무의 지적에 도화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저 말은 불래에 갈 때마다 여강진에게 듣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정보를 만들어 낼 순 없으니 그저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는 게 다였다.
그리고 똑같은 지적을 현무에게도 당해 보니 호윤과 달리 스승의 원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쳤다.
그때였다. 스치는 불안 끝에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몽식의 밤에서 봤던 그 남자…!’
스승이 죽던 기억이 악몽으로 찾아올 때마다 도화는 스승의 얼굴만 쳐다봤었다. 꿈이라는 자각을 하지 못해서, 그때마다 스승을 구하고 싶은 생각에 그러했다. 가끔 자각을 해도 스승의 얼굴을 잊어버릴까 봐 두려운 마음에 잘 보이지도 않는 얼굴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몽식의 밤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몽식의 배려로 꿈에서 의식을 완벽하게 분리했다. 그리고 앞서 꾸었던 악몽의 여파로 머릿속이 많이 침착해진 덕분에 도화는 스승이 죽던 악몽 속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을 죽인 범인이란 것을 깨달았다.
‘뒷모습뿐이었지만… 분명 보긴 봤어.’
도화는 어두운 산, 폭우 속에서 스승이 죽기를 기다리던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현무에게 입을 열었다.
“범인에 대해 기억하는 게 있습니다.”
“정말인가? 여강진 말로는 지금껏 자네한테 이렇다 할 단서를 제공받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 여강진에겐 아직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신기하군. 여강진은 자네가 스승과 동생이 관련된 일이라면 똥 싸다가도 끊고 달려오—.”
“예?! 뭐라고요?!”
당황한 도화가 상대가 현무인 것도 잊고 말을 끊어 버렸다.
‘여강진… 대체 내가 없는 곳에서 누구한테 무슨 말을 지껄이고 다니는 거야.’
그냥 만사 제쳐 두고 달려온다고 하면 될 것을.
“아니란 말인가?”
현무가 도화에게 물었다. 현무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진 것을 본 도화는 아차 싶었다. 당황해서 목소리를 크게 낸 것을 뒤늦게 깨달음과 동시에 한 번만 더 시끄럽게 굴면 입을 영원히 얼려 주겠다는 현무의 경고도 떠올랐다.
‘망했다.’
도화는 입술을 꾹 깨물고 어찌 대답할지 고민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니 큰일 보다가 끊고 뛰쳐나오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아니라고 흔들자니 그 정도로 간절한 게 아니었냐는 질문이 날아들 것 같았다.
“흠. 여강진이 단어 선택을 좀 천박하긴 하지.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전달한 것뿐이지만, 자네가 당황할 만해. 이번만은 이해해 줄게.”
“감사합니다.”
현무의 이해에 도화는 속으로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달 가까이 새벽까지 야근을 하느라 여강진에게 연락할 틈이 없었습니다.”
“저승 차사가 3D업종이라더니 사실이었나 보군.”
“그… 그렇습니까?”
힘들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3D업종이라 불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천계의 고위신, 명계의 저승시왕, 차사국의 저승 차사. 이렇게가 3D업종으로 유명한데 몰랐나?”
“저 하나 앞가림하기도 바빠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는 많이 둔합니다.”
“그것도 여강진에게 들었다. 툭하면 교맥국에서 목 따오라고 도깨비들을 보냈다던데.”
“…하하.”
도화는 난처한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자신을 처리하라고 도깨비를 보낸 것은 맞지만, 그걸 목 따임 당할 당사자 앞에서 저리 말하다니.
‘이건 눈치가 없는 건지, 배려가 없는 건지 모르겠네.’
오방대제 중 하나였으니 오랜 시간 황제처럼 떠받들어져 살았을 터. 성격과 표현이 직설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저승 차사가 3D인 것은 상관없고. 어디, 여강진에게 아직 말하지 못한 단서라는 것 좀 들어 볼까?”
도화는 악몽에서 보았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산발한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남자였습니다. 무기는 장검. 검날이 원래 붉은 것인지, 피에 물들어서 붉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길었습니다. 목소리는 굉장히 낮았고요.”
“…설마 그게 끝?”
“네.”
현무가 당황스럽단 눈으로 도화를 쳐다보았다. 대단한 단서라도 말해 줄 줄 알았는데 무엇 하나 상대를 특정 지을 만한 것은 없었다.
“그자가 산발한 머리를 자르고 무기도 다른 것으로 바꾸면? 목소리도 조금만 신경 쓰면 얼마든지 변조할 수 있을 텐데.”
“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자신이 본 것은 모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부분이었다.
“키는 컸는데 키에 비해 몸은 우락부락하진 않았습니다.”
“우락부락의 기준이 자네인가?”
“네?”
현무의 뜬금없는 질문에 도화는 고개를 갸웃하다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슴이었다. 오랜 세월 생존을 위한 실전 덕분에 붙은 근육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본인의 눈에도 좀 과하게 발달된 감이 있긴 했다. 이래서 묵범이 관심을 가졌단 건가.
가슴을 보자 자연스럽게 묵범으로 생각이 흘러가 버렸다. 정신 차린 도화는 머리를 흔들고 현무가 한 말을 곱씹었다.
‘우락부락의 기준을 나로 잡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화의 입에서 아~ 하는 짧은 감탄을 흘렸다. 전혀 생각지 못한 곳을 지적당해 깨달음을 얻은 감탄이었다.
“제 몸을 기준으로 보면 살짝 마른 몸이었습니다. 혹독하게 훈련한 무인의 몸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깨까지 내려오는 산발한 흑발, 무기는 장검, 검날이 붉을 수도 있고 목소리는 굉장히 낮은 무인의 몸이라.”
현무는 도화에게서 들은 단서를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반응이 마치 무언가 아는 듯한 모습이라 도화는 기대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쩌면 현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혹시 스승을 죽인 놈이 현무와 친한 관계이면 어쩌지?’
아직 현무의 입에서 이렇다 할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도화는 김칫국부터 마셨다.
‘우선 호윤을 찾아서 못 해 줬던 것들을 다 해 주고, 그다음에 복수를 해야겠다.’
현무와 특별한 관계인 사람을 죽인다면 이쪽도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목숨을 건진다 한들 현무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터. 그러니 죽인 다음에 따라 죽을 수밖에.
저승 시왕의 무자비한 판결을 받을 테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우선 복수부터 하고—.
“이딴 정보 가지고는 아무런 실마리도 찾아낼 수 없어.”
“……네?”
동귀어진을 계획하고 있던 도화에게 현무가 짜증을 냈다. 도화가 계획을 세운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저승 차사도 나왔다며. 이건 네 상사에게 물어봤나?”
“그건 이야기하기가 좀…….”
젠장. 여강진…! 그거까지 다 말한 거냐. 입이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거 아냐? 민들레 홀씨보다 가볍겠다.
도화가 이를 빠득 갈며 여강진을 욕했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스승을 죽인 것까지는 홍도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스승이 죽은 뒤 나타난 검은 옷차림의 남자 이야기는 여강진과 현천만 아는 이야기였다.
도화가 저승 차사를 싫어한다는 것은 알려져 있어도 왜 싫어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긴. 저승 차사가 되어 버렸는데 강림 도령한테 그런 말은 차마 못 꺼내겠지.”
“잘 아시는군요.”
알면서 왜 물어봤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상대는 현무.
억울함은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좀 다르게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게 꼭 저승 차사일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검은 옷만 입으면 누구든 저승 차사로 오해하겠지. 특히 어린 아이의 눈에는 더욱. 아, 흑립은 썼었나?”
“썼었습니다.”
“역시.”
“?”
어릴 때는 그게 평범한 갓인 줄 알았다. 한참 뒤에 여기저기서 귀동냥으로 들어 그것이 저승 차사가 쓰는 흑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오해라고?’
도화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현무를 응시했다. 도화의 시선에 현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감히 어디서 눈을 그따위로 뜨냐는 의미가 함축된 찌푸림이었다.
“하… 귀찮은 것을 감내하고 내가 여기까지 친히 행차하여 도와주고 있는데 감히 그딴 눈으로 쳐다봐?”
“아, 아닙니다. 제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궁금하여.”
도화가 아니라고 손까지 흔들자 현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한숨이었다.
“때로는 강렬한 기억이 올바른 생각을 가로막기도 하지.”
‘강렬한 기억?’
현무의 말은 조언이었지만, 도화에겐 뜬구름같은 소리였다. 강렬한 기억은 뭐고 가로막는다는 올바른 생각은 무엇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나 약조해라. 약조하면 네 막힌 생각에 큰 물꼬를 틔워 주마.”
“무슨 약조입니까?”
“하겠다고 먼저 말해.”
“…….”
강압적인 현무의 명령에 도화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내용도 알려 주지 않고 약조부터 하라는 것을 보면 굉장히 나쁜 내용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현무가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해.’
꾸욱.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자신이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강요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하겠습니다.”
결국, 도화는 내용도 모르는 채로 약조하겠다고 답했다.
“…정말?”
“예.”
“무르기 없기다?”
“……?”
내내 감정이라고는 짜증과 귀찮음만 보이던 현무가 처음으로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으나 목소리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좋아. 내가 원하는 것은 현천을 영원히 네가 데리고 사는 것이다. 영원히.”
현무는 영원히를 두 번이나 반복했다.
“현천에 관한 이야기는 아까도 했었는데—.”
“세상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네가 데리고 살아.”
도화의 말을 끊은 현무가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탕! 소리 나게 치면서 말했다.
‘현천이 시끄러운 건 맞지만 세상 멸망을 거론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도화의 눈에는 현천보다 영귀가 더 답이 없어 보였다. 느려도 너무 느리지 않은가. 현천은 도화의 상황에 맞게 모습을 변환하는 재주라도 있지. 영귀는…….
‘방패로 쓰면 되려나?’
도화는 영귀의 등껍질로 날아든 공격을 막아내는 상상을 했다. 역시 영귀보단 현천이다.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는 그냥 한 말이겠지.’
현천의 수다가 얼마나 싫었으면 말도 안 되는 조건까지 붙여 가며 강요를 할까. 도화는 손을 내미는 현무를 보며 어지간히도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웬 악수?’
내밀었으니 마주 잡긴 했는데 뜬금없는 악수에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손바닥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현무는 통증에 놀란 도화의 손을 미련 없이 놓으며 말했다.
“계약 완료다. 이제 네 생각의 물꼬를 틔워 주마.”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