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잠에서 깬 도화는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신기한 것을 구경하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현무 때문에 일어날 수 없었다.
“좀 비켜 주—.”
“오. 일어났군요.”
비켜 달라는 말은 소파 밑에서 들린 영귀의 목소리로 인해 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극진히 예를 갖추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비켜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극진함이 전달되려나.’
고민하는 사이 현무와 영귀는 도화가 눈만 뜨고 가만히 누워 있는 이유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왜 눈만 뜨고 누워 있지?”
“추워서 그런 거 아닐까요? 흑제 님의 영역은 평범한 귀물에겐 많이 추울 테니까요.”
“일리가 있구나.”
“걸칠 것 좀 가져올까요?”
“그러거라.”
“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몸이 덜덜 떨릴 정도는 아니지만, 으슬으슬하게 쌀쌀한 것은 맞아서 아니라고 정정하진 않았다. 대신 옷을 빌려 입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되게 느리네.’
금방 다녀오겠다는 영귀의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었다. 거북이이니 당연했지만, 속이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어나겠습니다.”
도화는 극진함을 표현하는 단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자신이 아는 선 내에서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을 하기로 했다.
소파에서 일어나 앉은 도화의 맞은편에 현무가 자리 잡았다. 강림 도령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모습을 한 현무의 몸에 비해 소파는 크고 높았다.
낑낑대며 오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볍게 튀어 올라 소파에 안착했다.
“배는 안 고프고? 영귀가 돌아오면 먹을 것을 내오라고 해야겠다.”
“돌아오면…….”
그랬다간 내일 아침이 밝아도 밥 한 숟가락도 푸지도 못할 것이다.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도화는 우선 현무가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아직까지는 적대적인 낌새가 느껴지진 않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강림 도령처럼 창고에 가둬 두고 일을 시킬지도 몰라.’
어떻게 받아 낸 휴가인데….
술 창고에서의 야근이 꽤 지쳤던 모양인지 도화의 사고가 감금 업무로 튀었다.
“현천상제께서 무슨 연유로 저를 부르신 것인지 감히 여쭙고 싶습니다.”
도화는 최대한 자신이 아는 존칭어를 끌어모아 물었다. 하지만, 도화의 노력은 돌아온 현무의 대답에 빛을 잃고 말았다.
“너는 참으로 요즘 사람답지 않게 웃기는 어투를 쓰는구나.”
“……예?”
현무는 도화를 이상한 사람 보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보다 오래 산 사람보다 더 늙은이 말투를 쓰다니. 혹시 사극에 심취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 그게, 이건 그러니까 영귀가-.”
“영귀?”
영귀라는 말에 갸웃거리던 현무의 입에서 무언가 깨달은 듯한 탄식이 흘렀다.
“또 영귀 짓이로군.”
‘또?’
저 말인즉슨. 영귀가 도화 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현무에게 극진히 예를 다하라는 경고를 했다는 건데.
“그 녀석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직까지도 고릿적 오방대제 시절 그대로 지키려는 고리타분한 녀석이거든.”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너무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아도 돼. 아까부터 머리 굴리는 소리가 요란하더군.”
아까부터라는 말에 도화는 흠흠,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현천이 없어 망정이지, 있었다면 껄껄대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심심하면 이 일을 끄집어내서 안줏거리로 삼겠지.
“내가 너를 이리로 부른 이유는 네게 일러둘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일러둘 말이요?”
도화는 담마에게 맡긴 현천을 떠올렸다.
‘현천… 때문인가?’
현천 외에는 자신과 현무 사이에 특별한 접점은 없다. 평범한 접점도 없다. 애초에 오방대제 중 한 명인 현무와 일개 귀물이 엮일 일 자체가 없는 게 정상이었다.
“현천이 자리를 비우길 기다렸는데, 의외로 현천과 한 몸처럼 붙어 지내는 통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현천을 만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도화의 질문에 현무의 눈썹 한쪽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내내 무표정이었던 현무의 얼굴에 처음 생긴 변화였다.
그리고 때마침 방으로 들어온 영귀의 눈에도 현무의 미세한 변화가 보였다.
“아아니이이이!! 감히 흑제 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자가 누굽니까!!”
귀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친 영귀가 엉금엉금 현천과 도화가 있는 곳으로 기어 왔다. 본인 딴에는 빠르게 걷는 중이겠지만.
‘느려.’
느렸다. 게다가 등딱지에 올려진 누빔옷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신경 쓰느라 더욱 느렸다. 결국, 현무의 눈썹이 원래대로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영귀는 소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헉… 여기 이거 입으시고요.”
흥분은 했어도 도화에게 가져온 누빔옷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감사 인사를 하며 누빔옷을 걸치는 도화에게 영귀가 물었다.
“흑제 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자가 누굽니까?”
“현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현천!”
현천이란 말에 영귀가 입을 크게 벌렸다. 작은 입이지만 흉흉하게 빛나는 눈이 합세하니 꽤 살벌해 보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 자리에 없는 현천에게 저렇게까지 분노하는 것을 보면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불붙은 분노는 현무의 명령에 연기만 남기고 꺼졌다.
“너도 마찬가지다. 시끄러우니까 저녁상이나 준비해.”
“흐윽… 알겠습니다…….”
나머지 한쪽 눈썹까지 일그러진 것으로 보아 현무는 영귀나 현무나 둘 다 비슷하게 여기는 듯했다.
‘많이 닮긴 해.’
만난 지 얼마 안 된 영귀이지만, 짧게 나눈 대화만으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영귀와 현천의 성격이 매우 닮았음을.
기가 죽은 영귀가 방에서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들어오던 시간보다 두 배는 걸린 것 같다. 도화는 영귀가 나가는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지만, 현무는 이런 일이 일상인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영귀가 나가고 방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확성기라도 삼킨 건가 싶을 정도로 쩌렁쩌렁하던 영귀의 목소리가 아직도 고막을 울리는 느낌이다.
어쨌든, 영귀는 나갔으니 중단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도화였다.
“절 부르신 이유가 현천 때문입니까?”
“현천? 그럴 리가. 아, 현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럴 리가-라며 부정하던 현무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걸까? 도화도 덩달아 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예.”
“내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말은 하지 말아.”
“어째서입니까? 현천은 당신을 매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옛 주인이 떠오를 때마다 현천상제와 함께 지냈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풀기 시작하면 한 시간은 기본이었다.
‘내용은 거의 자신의 활약상이긴 했지만. 그리워한 건 한 거니까.’
하지만, 현천이 그리워한다는 말에도 현무는 아까와 같은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도화가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현무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는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야.”
“아…….”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단 대답 하나로 모든 것이 이해됐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영귀 하나만으로도 벅차. 그러니 현천은… 앞으로도 쭉 자네가 데리고 살아 줘.”
“알…겠습니다.”
“나중에 아주 가끔 만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나중에. 아주 가끔.”
현무는 나중에와 아주 가끔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데 동질감이 느껴졌다. 현천 하나만으로도 귀가 따가운데 영귀까지 데려가라고 한다면 절대 거절할 것이다.
“자, 이제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를 말해야겠지.”
소파에 늘어져 앉아 있던 현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자세를 바로 할 만큼 중요한 이야기인 걸까? 도화도 따라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강진에게 들었다. 자네가 사람을 둘 찾고 있다고.”
“……!!!”
정말 뜻밖의 이야기에 도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토록 찾으려고 애를 써도 티끌만 한 단서 하나조차 얻지 못했던 스승과 호윤의 이야기가 현무의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여… 여강진을 아십니까?”
“여강진을 모르는 자가 세상에 인간 빼고 누가 있겠나. 나도 가끔 여강진에게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듣곤 해.”
“제 스승과 호윤이를 아십니까? 어떻게 아는— 아니, 둘의 정보를 갖고 계신 건가요? 스승을 죽인 범인은 누구고 호윤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앉아.”
도화의 다급한 질문 공세를 끊어 버린 현무가 앉으라고 손을 흔들었다.
“올려다보기 귀찮아. 앉아.”
“네.”
현무의 손짓 한 번에 다시 소파에 앉은 도화는 덜덜 떨리는 손을 마주 잡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얌전히 현무의 대답을 기다려야 하는데 한번 터진 감정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자꾸 머릿속에서 걸러지지 않은 온갖 가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설마 스승을 죽인 범인이 현무인가? 아니, 아닐 거야. 그러면 호윤을 납치한 사람이 현무? 하지만, 현무가 호윤을 데려가서 뭘 하려고? 뭔가 다른 세력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리고 이 이야길 왜 지금 하는 걸까. 지금까지 침묵했어야 할 이유라도?’
끊임없이 솟구치는 온갖 가정과 의심에 도화는 자신이 입술을 씹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어느 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힘 조절도 못 하고 세게 씹어 댄 탓에 입술이 터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현무는 쯧, 혀를 찼다.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군. 나중에 이야기할까?”
“아닙니다!!!”
자리를 뜨려는 현무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도화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현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냉랭하다 못해 시릴 것 같은 목소리로 도화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내 앞에서는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을 거야. 난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거든.”
“…….”
“또 소리쳐 봐. 그 주둥이를 영원히 얼려 버릴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지는 냉기가 바늘이 되어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뼛속까지 시리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도화는 누빔옷을 입었음에도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흠. 간만에 온 손님한테 내가 과했나 보군.”
다행히 현무의 심기는 금방 풀어졌다. 고작 기분이 거슬려 살짝 성을 낸 것뿐인데 이 정도라니.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그래. 알았으면 됐다.”
“…….”
사죄를 했고 받아 줬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어쨌든 앞으로 말할 때는 최대한 조심히 말하기로 결심했다.
“호윤이란 아이는 인간이면 대여섯 번은 윤회를 돌았을 테니 흔적을 쫓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이건 자네가 나 대신 현천을 데리고 있어 주니 내가 알아봐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도화는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했다.
호윤이 윤회를 여러 번 했으리란 것은 도화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수소문만 하다 지금까지 왔다.
그리고 현무의 입에서 좀 더 정확한 이야기를 들으니 자신이 호윤을 찾으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현무가 찾아주겠다는 확답을 해 주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