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도화-112화 (113/146)

112화

분명 현천은 오방대제 모두가 윤회의 굴레를 택했다고 했다. 인간들도 잘 알고 있는 청룡, 주작, 백호, 현무와 그 가운데에 위치한 중앙 황제까지 모두 합하여 오방대제라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은 시간의 흐름이다. 사람마다 시간의 가치가 다르게 적용되기는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다. 신조차도.

세상이 변해 감에 따라 신의 가치도 변화했다. 긴 세월이 흘러도 맡은 일의 중함이 퇴색되지 않아 현역에서 일하는 신이 있는 반면, 이름은 알려졌더라도 하던 일의 비중이 줄어드는 신도 생겼다.

오방대제는 할 일이 사라지고 있던 신들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신들의 부러움 속에서 윤회의 길로 올랐다.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 윤회의 길에 오르면 삼신과 가믄장 아기, 그리고 칠성신의 축복을 받는다. 긴 세월을 신으로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을 했던 오방대제가 최상의 조건으로 새로운 생을 시작했으리란 것은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고 도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신으로 윤회했나? 그게 아니고서야…….’

굳게 닫힌 솟을대문 앞에서 선 도화는 이 의문의 별저가 과연 현천상제의 것이 맞는지 고민에 빠졌다. 맞다면 들어가도 그리 위험하지 않을 테지만, 아니라면—.

“홍도화 님 맞으시죠?”

“……?”

어디선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도화가 솟을대문을 확인했다. 아까는 굳게 닫혀 있던 솟을대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누가 저 안에서 나왔나?’

주위를 둘러보는 도화의 시야에는 여전히 눈보라만 가득할 뿐 사람은커녕 사람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청인가?’

정신 단단히 잡고 있어야지. 다짐하는 도화의 귀에 또다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보세요. 아래를.”

‘아래?’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니 발 근처에 검은 거북이 한 마리가 목을 쭉 빼고 도화를 올려다보는 게 보였다.

“거북이……?”

“저는 영귀(靈龜)입니다.”

“영귀?”

“예. 북방흑제의 사령 영귀입니다. 홍도화 님 맞으시지요?”

“맞습니다만…….”

얼떨떨한 심정으로 대답하자 영귀라고 자신을 소개한 거북이가 고개를 쭉 빼고 주억거렸다.

“지금 흑제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별저로 들어가시지요.”

제 할 말을 다 마친 것인지 영귀는 엉금엉금 느릿한 걸음으로 다시 솟을대문을 향해 기어갔다.

‘역시. 현천상제의 별저가 맞았구나.’

오방대제를 지칭하는 칭호는 여러 가지이다. 현무는 북방흑제, 현천상제로 불리는데 사령으로 영귀를 부린다.

‘그런데… 이 작은 거북이가 영귀라고?’

거북이만 보아서는 믿기 어려웠으나 도가 지나치게 부는 눈보라라든가 정상에서 보았던 온통 검었던 산 밑, 그리고 눈앞의 별저가 거북이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결국 도화는 거북이의 자기소개를 믿고 천천히 현무별저로 따라 들어갔다.

현무별저 내부는 눈보라가 치는 외부와 달리 청명한 하늘이 보였다. 몸이 떨릴 정도였던 추위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자유롭게 가지를 뻗은 나무와 수수한 색의 이름 모를 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는 광경을 보니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스르륵 풀리는 듯했다.

“이쪽으로. 절 따라오세요.”

도화는 대답 없이 영귀가 하라는 대로 따랐다. 사실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존대를 할지 하대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영귀가 먼저 이쪽을 존대했으니 하대를 해도 되려나? 하지만, 나는 한낱 반도깨비이고 영귀는 현천상제에 속한 사령이니 내가 존대하는 게 맞겠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존재를 만난 도화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영귀가 안내하는 곳에 현천상제가 있다는 사실도 간신히 풀린 긴장을 다시 들게 만들었다.

별저 내부는 사극에서 보았던 대궐보다 더욱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다. 도화가 오래 살았다 한들 임금의 궁에 가 본 적은 없으니 비교 대상이 현대의 자료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별저에는 영귀 외의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영귀 홀로 이 큰 건물을 관리하는 걸까?

긴장을 풀려고 온갖 잡생각을 끌어모으던 도화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기로 결심했다.

“현천상제께서는 윤회의 굴레에 드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무래도 당사자보다는 영귀에게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말이 윤회에 길에 올랐다지, 쉽게 말하면 죽었다고 들었는데 죽은 게 아니었냐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도화의 질문에 짧은 네 다리로 열심히 기어가던 영귀가 멈춰 섰다. 그리고 목을 쭉 빼어 도화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 만나는 분마다 그 부분을 궁금해하시더라고요.”

“그, 그렇습니까?”

혹시 기분 나빠 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영귀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윤회라 하면 보통 인간으로 태어나긴 하죠. 하지만, 북방흑제께선 새로운 사방신으로 다시 태어나셨답니다. 기억과 능력을 모두 그대로 품고 태어나셨으니 바뀐 것은 외관밖에 없지요. 그러니 그분 앞에서는 극진한 예를 다하셔야 합니다.”

“극진한 예…. 알겠습니다.”

극진한 예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묻고 싶었으나 갈 길이 멀다며 다시 걷기 시작하는 영귀를 또 불러 세울 수 없었다.

영귀는 열심히 앞서 걸으며 도화가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주절주절 풀어놓았다.

“청제(靑帝), 백제(白帝), 적제(赤帝), 흑제(黑帝). 네 분은 새로운 육신으로 태어나셨지만, 황제(黃帝)께선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다행히 윤회 전보다는 훨씬 줄어든 업무로 중앙의 빈자리가 큰 문제가 되진 않고 있지요.”

“그렇군요.”

“흑제께선 시끄러운 것을 매우 싫어하시니 목소리는 낮추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지금 이대로만 하시면 문제없습니다.”

“그렇군요.”

도화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영귀의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야기 중 절반 이상은 딱히 몰라도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꽃은 민들레… 아.”

오방대제의 이야기를 넘어서 알고 싶지 않은 본인의 식성까지 늘어놓던 영귀가 이야기를 멈췄다. 이야기뿐 아니라 느릿한 걸음도 멈췄다.

“이곳입니다.”

영귀가 멈춘 곳은 거북살문 앞이었다. 영귀가 도착했음을 고하자 안에서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들어가 보시지요.”

영귀는 도화가 들어갈 수 있게 옆으로 물러섰다. 함께 들어갈 줄 알았던 도화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내디뎌 문지방을 넘었다.

방 내부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걸었던 복도보다 훨씬 서늘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를 정도의 온도였다.

안에서 문이 열렸기에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문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 안에 현천상제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여기도 거북이, 저기도 거북이.’

누가 현무 아니랄까 봐 사방에 자아표출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 없는 방을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얌전히 아무 의자에 앉아 기다리려고 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도화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그 홍도화로군.”

“!!!”

소스라치게 놀란 도화가 손으로 입을 막고 펄쩍 뛰었다. 커다란 덩치가 펄쩍 뛰면 얼마나 뛰었겠냐고 하겠지만,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하다가 갑자기 어깨를 잡히면 누구라도 똑같이 보일 반응이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던 도화였지만, 생각해 보니 묵범이 툭하면 하는 짓이기에 요동치는 심박은 금방 가라앉았다.

“현천상제이십니까?”

뒤를 돌아본 도화의 시야에는 거북살로 된 창만 보일 뿐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 영귀와의 첫 만남이 떠오르는 것은 기분 탓은 아니었다.

“여기다.”

소리는 아래에서 났다. 내려다보니 도화의 허리 정도만 한 키의 소년이 무표정으로 도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거기 계셨군요.”

도화는 얼떨결에 인사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그리고 말을 끝내자마자 영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분 앞에서는 극진한 예를 다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극진한 예를 보이기엔 너무 늦은 것 같군.’

도화는 지금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할지 머리를 굴렸다. 늦었지만, 그래도 인사를 할까? 절을 하면서? 한쪽 무릎만 꿇고? 90도 인사를 할까? 아니면…….

“와서 앉지. 이 몸으로 자넬 올려다보는 것은 목이 아프니까.”

“예. 예에.”

소년의 모습을 한 현무가 커다란 소파에 올라가 눕듯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도화에게 손짓했다. 어서 와서 제 앞에 앉으라는 의미였다.

‘묘한 곳이군.’

현무의 바람대로 맞은편 의자에 앉은 도화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방 내부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천장의 대들보나 창살과 문살 등은 한옥 그 자체였으나 가구와 장식물은 대부분 현대의 물건이었다.

현무의 옷은 활동하기 편하게 개량한 한복이었다. 옷과 머리 모두 검은색 일색이라 한복이라기보단 편하게 입는 헐렁한 티셔츠와 바지라고 해도 어울려 보였다.

도화는 소파에 앉아 현무가 절 부른 이유를 말해 주길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자리까지 마련된 이상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고 나타난 것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현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소파에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그래서 도화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저를 왜 이곳에 부르신 겁니까?”

도화의 질문에 현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공격이 날아들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지금 저 소년에게 답을 얻지 못하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할 기세라 재차 질문했다.

“아… 그거?”

현무가 눈을 반쯤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건 말이지. 내가 자네를 왜 불렀냐면… 그건 그러니까…….”

쿨-.

쿠울—.

결국 현무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

예상치 못한 처음 겪는 상황에 도화의 뇌도 정지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왜 이렇게 졸리지?’

현무가 편안하게 잠든 것을 보니 자신도 길고 깊은 잠에 빠지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긴장이 풀리자 슬슬 밀려드는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도화는 현무처럼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았다.

‘현천을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지금쯤 현무와 현천이 감동의 재회를 찍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후회를 하던 도화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 * *

“방 하나를 비워서…….”

“한 석 달 정도…….”

“식사는…….”

잠결에 흔들리는 의식 속으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방을 비워? 석 달? 식사? 무슨 소리지?’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도화는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눈보라와 검은 연기. 그리고 현무별저라고 쓰인 현판…….

‘현무!!!’

현판을 떠올리자 그 뒤로 잠시 잊고 있던 상황이 모두 생각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