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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111화 (112/146)

111화

“여기가 대체 어디지?”

산에서 길을 잃은 도화는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헤치고 무작정 위로 올랐다.

‘갑자기 너무 어두워졌어.’

아무리 산속의 해가 금방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아직 점심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시야가 너무 어두웠다. 눈이 얼마나 더 내리려는지 하늘이 흐리다 못해 진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앞뒤로 보이던 등산객이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답시고 그저 위로 올라가기만 한 탓에 제대로 된 등산로에서 이탈한 지 한참이 지난 상태였다.

“……큰일이군.”

다시 길을 찾기엔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늦은 것 같다. 거기 누구 없냐고 외쳤으나 돌아오는 대답도 없었다. 애초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등산객들은 모두 하산했을 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악산에서 머물 만한 곳도 알아볼 것을.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절이든 산장이든 나올 것이라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동굴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 말은 자신과 상관없는 말이라고 여겼던 도화였다. 처음 세상을 인식했을 때부터 도화에겐 집이 없었으니까. 두 다리 뻗고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도 항상 시설이 낙후된 집에서 지냈기에 때로는 아르바이트하는 가게가 더 편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말이 아주 절실하게 다가왔다.

‘너무 편하게 지내서 그런가.’

한번 삶의 풍족함을 느꼈더니 점점 거기에 안주하고 싶은 욕망이 커져 간다. 그래도 절약 정신은 잃지 않고 있지만, 이런 생활이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오늘처럼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지하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민 없이 택시를 탈 날이 올 것 같았다.

‘초심을 잃지 말자. 홍도화. 넌 그래선 안 돼.’

도화는 스스로 채찍질을 했다. 하지만, 내면에선 ‘그러면 어때?’라고 고개를 든 반감을 무시만 할 순 없었다.

저승 차사가 되기 전에는 스승과 호윤의 정보를 얻기 위해 지출하는 금액이 커서 필연적으로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출해도 생활고는커녕 전에는 상상도 못 해 본 돈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그러니 택시를 타고 화악산에 와도 됐었다고, 편안해지고 싶어 하는 도화의 내면이 속삭였다.

호윤은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했는데 잃었고 스승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모두 도화의 잘못이 아니건만. 도화는 이상할 정도로 둘에게 죄책감을 가졌다.

호윤에겐 친혈육은 아니지만, 오빠로서 녀석이 좋아하던 과즐 하나 사 주지 못했던 기억이, 스승에겐 절명의 순간 돕지 못한 것이 긴 세월 동안 도화의 내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어 자리 잡았다.

더 큰 흉터가 생겨 덮지 않는 이상, 낙인처럼 붙어 있을 두 개의 죄책감은 이내 채무감이 되어 도화 스스로 몸과 정신을 혹사시키게 만들었다.

현천은 이런 도화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싸우기도 엄청 싸웠다. 죄책감은 가질 수 있지만, 채무를 느낄 필요는 없다는 게 현천의 주장이었다.

당장 먹고살기도 어려워서 컵라면 하나로 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판에 돈이란 돈은 죄다 긁어모아서 불래에 갖다 바치니 속이 터질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있는 돈만 갖다 바쳤다는 점이었다. 현천은 만약 없는 돈까지 만들어 바쳤다면 아마 네 녀석은 필시 어두운 길로 빠졌을 것이라고, 놀리듯 말하곤 했다.

어쨌든. 도화는 현천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옛 버릇이 다시 도지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잠깐이긴 했지만, 편하게 지낸 나는 죄인이야.’ 모드가 아니라 ‘나는 이 상황을 힘들다고 느낄 자격이 없어.’였다는 것이었다.

“버틸 수 있어. 어릴 때는 이보다 더 심한 눈보라 속에서도 잘만 살아남았는걸.”

그리고 차사복을 챙겨오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만약 가져왔다면 화악산 입구에서부터 입고 오르느라 추위를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그냥 내려가야겠다.’

여기서 더 올라 봤자 의미 없는 등반이 될 것이다.

오르던 것을 멈춘 도화는 나무에 기대어 근처에 쉼터가 있나 검색했다. 하지만, 깊은 산속이라 그런지 인터넷은커녕 GPS가 잡히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도화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돌아보니 바닥은 아무런 흔적 없이 하얗기만 했다. 도화가 밟고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눈이 발자국을 완전히 덮어 버린 상황이었다.

“폭설이라기엔 뭔가 이상한데?”

아무리 자신이 등산로를 이탈했다고 하지만, 일탈한 상태로 그리 오래 이동하진 않았을 것이다.

도화는 내려가던 것을 멈추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 거센 눈보라와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 때문에 시야 확보가 불가능했다.

‘정상까진 아니어도 탁 트인 곳까진 가서 확인해야겠어.’

도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과할 정도의 눈보라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기가 바뀌었어.’

아무리 산의 공기가 깨끗하다 한들 도심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인간의 문명이 이렇게까지 발달하기 전의 공기와는 비교할 수 없다.

지금의 공기는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기였다.

‘향수가 아니라 악몽이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그 시절의 도화는 호윤과 스승, 둘과 지낸 시간을 제외하면 좋은 기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그때의 나쁜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이 공기가 매우 불쾌했다.

도화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을 적대하는 자의 소행이 아니길 바라며 올라갔다.

원귀나 악귀의 소행은 아니다. 그랬다면 공기가 좋아지긴커녕 탁기로 매캐하게 변질되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도깨비인 걸까?’

누구의 소행일지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제게 악의를 품을 자들은 도깨비밖에 없다. 하지만, 도화는 도깨비의 소행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도깨비가 날씨를 바꿀 능력을 가졌을 리 없다. 상천의 천기를 다룰 수 있는 신은 극소수라고 들었다.

‘도깨비가 아니면 누구지?’

도화가 교류하는 귀물은 손에 꼽고, 손에 꼽은 귀물도 의뢰로 아주 잠깐 만난 게 전부였다.

그나마 불래의 여강진과 가장 길게 교류 중이지만,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귀물인지 신선인지, 혼혈인지도 알려진 게 없다.

여강진은 여강진일 뿐. 다들 그의 정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의심하는 자도 없고 오히려 그에게 대단한 신뢰를 보였다. 그것은 도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강진 또한 상천의 천기를 다룰 만한 능력을 가진 자는 아니다. 신이 아니니까.

‘환각일 가능성도 있어.’

환각은 의외로 여러 귀물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종족 특성과 힘의 차이에 따라 숙련도는 천양지차이지만, 날씨를 바꾸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위로 올라가 보면 뭐라도 알 수 있겠지.’

정상으로 올라가면 지금보다는 좀 더 넓은 시야가 확보될 것이다. 물론 눈보라 때문에 바로 옆 봉우리도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이 상황이 환각일지 아닐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더욱 세차게 부는 바람은 도화의 몸이 뒤로 밀릴 정도로 강력했다. 마치 도화가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불었다.

그렇게 눈보라와 싸우며 정상에 도착한 도화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다… 뭐야?”

도화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끝도 없이 흩날리는 눈이었다. 도화가 밟고 있는 정상 바로 아래는 검은 연기에 가려 아예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 봉우리라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그것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환각이라기엔 펼쳐진 범위가 너무 넓다. 도화가 이동한 거리만 해도 꽤 되는데 이 정도 되는 범위에 오감이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환각을 펼친다?

‘절대 원귀나 악귀는 아니야. 귀물도 보통 귀물은 엄두도 못 낼 힘…….’

정상에 서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니 망망대해에 홀로 조난 당한 기분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어지러이 흩날리는 눈발이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도화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가자.’

정상에 올라오면 뭐라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욱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도화는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 여행 가방을 힘겹게 들고 아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등산보다 하산이 더 어려운 것은 잘 알고 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눈 때문에 바닥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으니 위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 도화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산밖에 없었다. 정상이 정상이 아니니 아래로 내려가는 수밖에.

그러나 하산을 제대로 할지도 미지수다.

‘그 자식이라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진퇴양난에 빠진 이 순간, 도화는 현천이 아닌 묵범이 생각났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였다. 분하긴 해도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놈이니 이 상황도 분명 해결 방안을 내놓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할 수도 있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도화는 아예 화면이 꺼져 버린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혹한기 훈련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차사복이라도 가져올 것을.’

추위에 몸이 덜덜 떨리자 차사복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얼어 죽진 않겠지만, 산에서 이런 추위를 느끼게 되니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기분이 저조해졌다.

그렇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헤치던 도화의 시야에 노란색으로 일렁이는 불빛이 보였다.

그것도 아주 또렷하게.

‘불빛…?’

가시거리가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불빛이 저리 잘 보인다는 것은 저 불빛 또한 정상적인 것이 아니란 의미다. 하지만, 본인 외의 생명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산에서 불빛을 본다면 저것이 함정이라 한들 확인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원귀든 악귀든. 도깨비든 귀물이든 간에 만나기만 해 봐라. 당장 죽사발을 만들어 주마.’

추위에 이성을 잃은 도화는 지금 자신에겐 현천도 부용삭도 없는 상황이란 것을 잊고 전의를 불태웠다.

꽤 먼 곳에서 보이는 불빛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얼마 가지 않아서 불빛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건 대체……?”

불빛의 정체는 좌등이었다. 솟을대문과 그 너머로 보이는 팔작지붕 건물을 호위하는 것처럼 노랗게 일렁이는 좌등들이 건물을 일정한 간격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솟을대문에 가까이 다가가니 유려한 서체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현무별저玄武別邸

‘현무별저? 현무의 별장이란 뜻인가?’

이 기이한 상황 속에서 도화가 크게 당황하지 않은 이유는 ‘현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현천에게 현무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지라 만나 본 적이 없는데도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현무는 이미 윤회의 굴레에 들어간 거 아니었나?’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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