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길었던 야근이 드디어 끝났다. 직접 보면 알 것이라는 강림 도령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를 감시하던 무언가가 있던 것은 확실해.’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야근이 끝나는 날까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강림 도령은 도화에게서 범인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얻어 내길 바랐던 것 같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무언가 있었다.’는 것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단기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읽느라 그런 것 같군.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어떤가?]
* * *
청우의 제안 덕분에 도화는 일주일이라는 휴가를 얻게 되었다. 그것도 묵범을 떼어 낸, 오롯이 도화 홀로 쉴 수 있는 휴가였다.
“정말… 출근 안 할 겁니까?”
담마를 데리러 온 묵범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눈썹과 눈꼬리도 축 처진 것이 크나큰 상심을 한 사람의 얼굴이라 하마터면 금방 준비하겠다고 대답을 할 뻔했다.
“휴가인데 출근을 왜 해?”
“세상에…….”
정신 차린 도화가 거절하자 묵범이 비틀거렸다. 도화는 묵범의 과장된 반응을 무시하고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그건 왜 풉니까?”
도화의 목걸이에 달린 것이 현천이라는 것은 묵범도 잘 알고 있다. 현천과 항상 툭탁대지만, 둘은 실과 바늘처럼 반드시 붙어 다닌다고 여기던 묵범은 풀어 낸 목걸이에 현천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눈이 커졌다.
현천은 도화에게 가장 든든한 무기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저승 차사의 무기인 부용삭보다 현천을 먼저 꺼내 들 정도였다. 긴 세월을 함께 지내며 현천으로 몸을 지켜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담마에게 무기를 줄 생각이었다면 현천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줘야 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도화는 다짜고짜 현천을 목걸이째 담마의 목에 걸어 주었다.
“왜긴. 국장님이 그랬잖아. 미해결 사건 정리 좀 하다 오라고.”
“그거야 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현천을 왜 담마에게 주느냐는 겁니다.”
묵범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야 현천이 옆에 있으면 정신 사나워서 정리가 될 리 없으니까.”
[흠흠. 내가 좀 말이 많긴 해.]
담마의 목에 얌전히 걸려 있던 현천이 수긍했다. 담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여행 가방은 뭡니까?”
묵범은 아까부터 도화의 뒤로 보이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게다가 도화의 옷차림까지 심상치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평범한 외출복으로 보이겠지만, 묵범의 눈엔 그것이 문제였다.
휴가라면서 왜 외출복을 입은 거지?
“설마. 어디 갑니까?”
“어디 조용한 것으로 갈 거다.”
“어디…?”
“그걸 왜 말해야 하지?”
“그야 당연히—.”
“따라오면 앞으로 출퇴근 따로 갈 줄 알아.”
“…….”
이미 묵범이 어찌 나올지 예상하고 있던 도화가 먼저 선수쳤다. 사실 처음에는 퇴사한다는 강수를 두려고 했으나 출퇴근으로 바꿨다.
이유는 간단했다. 묵범이 자신이 돈에 취약하다는 것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 그런…….”
묵범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에 빙의한 사람처럼 현관문에 기대어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한테도 비밀로 했는데 아저씨한테는 당연히 안 가르쳐 주죠.”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닦는 연기가 능청스럽다.
덩치는 산만 한 놈이 저러면 가증스러워야 할 텐데. 얼굴이 받쳐 주니 그럴싸했다.
“휴가 끝나기 전에 돌아올 거야.”
“어디로 갈 겁니까?”
“…내가 말해 줄 것 같아?”
“음… 말해 줄 리 없겠지요.”
“알면 어서 출근이나 해.”
도화는 묵범을 날파리 쫓듯 손으로 휘휘 저으며 나가라고 말했다.
“담마는 삼촌 없는 동안 혼자 잘 지낼 수 있지?”
“현천도 있고 옆집 아저씨도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옆집 아저씨란 말에 도화가 도끼눈으로 묵범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 생겨서 옆집 아저씨 부를 바엔 차라리 삼촌한테 연락해.”
“괜찮아요. 국장님이랑 부장님 연락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제 걱정은 말고 푹 쉬다 오세요.”
씩씩하게 대답한 담마는 도화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아주고는 몸을 돌렸다.
“홍도화 씨. 어느 지역으로 가는지만 살짝 알려 주면 안—.”
“자, 어서 가요. 아저씨. 지각하겠어요.”
질척대는 묵범을 담마가 끌고 나갔다.
[조심히 잘 다녀와라.]
현천의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방금까지 복작복작했던 현관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바람에 새삼 방음이 잘되는 집이란 것을 깨달았다.
“나도 이제 가 볼까?”
휴대폰과 지갑을 챙겼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도화는 한눈에 봐도 30인치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가볍게 끌고 집을 나섰다.
그가 머리를 식히고 생각을 정리할 겸 쉬러 가는 곳은 화악산이었다.
‘뭐… 오르다 보면 쉴 곳 정돈 나오겠지.’
묵범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알려 주기 싫어서지만, 담마에게까지 비밀로 한 것은 사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면서 그냥 화악산이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즉흥적으로 정했다. 이동하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거기서 머물 수도 있기에 담마에게는 도착하면 연락하기로 말을 해 둔 상태였다.
“어디 보자. 뭘 타고 어디로 가야 하나.”
무작정 도로 쪽으로 향하며 화악산으로 가는 방법을 검색하던 도화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십만 원……?’
화악산까지 택시비가 십만 원이 떴다. 그는 커다란 여행 가방과 휴대폰 화면에 뜬 택시비 십만 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몸이 편하려면 택시인데… 그러면 지갑 사정이 불편해지잖아.’
부랴부랴 대중교통으로 검색했더니 경로가 뜨질 않는다. 당황한 도화는 화악산이 아닌 인근 역을 넣어 검색했다. 그러자 환승을 두 번 하고 버스까지 타는 경로가 나왔다.
가격을 확인한 도화는 몸을 돌려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십만 원과 사천 원. 이건 고민할 거리도 없는 일방적인 지하철의 승리였다.
* * *
덜컹.
빠르게 달리는 지하철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도화는 사람들의 시선이 얼굴에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다른 칸으로 옮겨갔으나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건너오니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운동선수인가?”
누군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도화의 귀에 들렸다. 방금 전에 있던 칸에서도 저 소리를 들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대화가 오고 갔다.
“오늘 영하 12도라는데 달랑 코트 하나만 입은 걸 보면 추위도 안 타나 봐.”
“북극곰도 오늘 같은 날은 패딩 입어야 할 판인데 무슨 추위를 안 타. 다 허세야, 허세.”
“하긴. 원래 옷 잘 입는 사람은 여름에 쪄 죽고 겨울에 얼어 죽는다니까.”
그렇게 추워 보이나?
귀물이다 보니 인간들 기준으로는 추위나 더위를 많이 덜 타기는 했다. 아주 어릴 적에나 힘쓰는 방법을 몰라서 인간과 똑같이 고생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 것치고 옷을 잘 입은 건 아닌데……. 몸이 죽여 주긴 하네.”
“흠. 허리에 비해 가슴이 너무 크지 않아?”
‘가슴……?’
가슴이란 말에 무표정으로 광고판을 쳐다보던 도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달은 혼자서 야근을 했고 그 뒤로 열흘은 청우가 묵범의 희롱을 막아 주었다.
청우 입장에서는 일은 안 하고 입만 나불거리는 묵범을 단속하는 것이었지만, 도화에겐 묵범의 입이 봉인되니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묵범은 이상하게 도화의 허리와 가슴에 집착을 했다. 도화가 질색팔색을 하니 만지지는 못하지만, 시선은 속일 수 없었다.
그래도 청우 덕분에 한동안은 잊고 지냈는데. 지하철에서 생판 모르는 인간들한테 저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면 묵범만 이상한 게 아닌 건가?’
도화는 코트를 앞섶을 당겨 가슴을 가렸다. 지금껏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잘만 살아왔는데 지금 이 순간은 굉장히 신경 쓰였다.
‘젠장. 왜 안 잠기는 거야.’
하지만, 코트는 도화의 마음도 모르고 속을 썩였다. 허리쪽은 수월하게 단추가 잠겼는데 좀 더 위로 올라가자 서로 맞닿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왜 이걸 입고 나온 걸까.’
헐렁한 트레이닝 복이나 입고 나올 것을.
기분 전환 좀 하겠다고 큰맘 먹고 산 코트를 입고 나온 게 잘못이었다. 다들 앞섶은 훤히 열고 다니니 단추가 잠기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오늘 아침의 자신에게 다시 생각을 고쳐먹으라고 충고하고 싶은 마음이다.
‘다른 칸으로 넘어갈까?’
우선 저 두 인간의 시선과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화였다. 하지만, 도화는 다른 칸으로 넘어가지 않고 다음 역에서 내렸다.
칸을 옮겨 봤자 어차피 새로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게 뻔하니 차라리 옷을 갈아입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 *
지하철 화장실은 도화에겐 너무 비좁았다. 거기다 커다란 여행 가방까지 펼치니 움직일 때마다 팔꿈치가 벽에 이리 쿵 저리 쿵 부딪혔다.
간신히 트레이닝 복으로 바꿔 입은 도화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지하철을 탔다. 여전히 저 남자는 추위를 안 타나 보다, 왜 저렇게 덩치가 크냐, 운동선수인가? 같은 수군거림은 들렸지만, 가슴과 허리에 대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와, 힙업 죽여 주네.”
“…….”
코트에 가려졌던 엉덩이가 드러나는 바람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무슨 운동으로 저렇게 바짝 올린 걸까.”
“한번… 물어볼까?”
도화는 세상에 묵범 같은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꼭 저걸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옆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는 건가.
그리고 뭘 입어야 엉덩이까지 가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도화는 팔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어깨에 걸쳤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롱코트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덕분에 엉덩이는 가릴 수 있었다.
그렇게 도화는 코디 센스가 별로라는 시선을 받으며 한 시간 삼십 분을 달려 가평역에 도착했다.
* * *
스승은 같은 산이어도 계절마다 와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화악산에 오르는 도화는 나뭇가지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며 스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며칠 전, 기상청에서 일기예보로 전국에 폭설 주의보를 내렸었다. 하지만, 서울은 눈은커녕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현천이 요즘 기상청은 믿을 수가 없다고 혀를 찼던 것까지 기억난다.
‘영 거짓은 아니었나 보네.’
서울은 안 왔더라도 이곳은 폭설이 내린 게 확실했다. 사고 방지를 위해 눈이 녹을 때까지는 등산을 금지한다는 입산 금지령이 내렸다.
지금도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등산을 방해했다. 도화는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길 온 걸까.”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그저 가볍기만 한 여행 가방이었는데. 폭설이 내린 산길에서 그의 여행 가방은 지금 최고의 짐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