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묵범이 난데없이 운명론을 꺼내 들었다. 정말 뜬금없고 어이없고 정신 나간 발언이라 다들 대꾸도 못 하고 의아한 눈으로 묵범을 쳐다봤다.
[도화야. 저 녀석이 드디어 미쳤나 보구나.]
현천마저 묵범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 그러자 묵범이 억울하다며 자신이 운명론을 꺼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국장님이 데려오려 했던 홍도화 씨를 제가 정말 우연하게 발견했잖습니까.”
“우연…이긴 했지.”
우연보다는 악연이 더 어울리긴 했지만.
“여우족 일을 하던 홍도화 씨를 인왕산 밑에서 우연히 만나 도왔지요.”
“도움…받긴 했지.”
분하지만,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걸 빌미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거기다 수귀를 잡으러 갔던 홍천에서 위험에 처한 홍도화 씨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물에 빠져 홍도화 씨를 살리기 위해서 입으로—.”
“으악! 그만! 이 미친 자식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화가 재빨리 손을 뻗어 묵범의 입을 막았다. 당황해서 힘 조절을 못 한 탓에 묵범의 입술이 도화에 손에 부딪혔다.
따뜻하고 말캉한 입술이 손바닥에 짓눌리는 감각에 도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도포를 입고 있으니 절대 더울 리 없으나 도화의 이마에는 식은땀마저 송골송골 맺혔다.
“입으로 뭘 했다는 거지?”
가만히 있던 청우가 관심을 보였다. 아름답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당연히 알아야 하는 사람처럼 물었다.
저 사람은 왜 갑자기 입에 관심을 보여? 도화는 괜히 청우에게 짜증을 냈다. 물론, 속으로만.
“이, 입으로 정신 차리라고 외쳤습니다.”
“흠.”
황급히 아무렇게나 대꾸했더니 바로 관심을 거두는 청우였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도화는 이곳에 모인 사람 중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묵범은 자신의 입을 막은 도화의 손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웅얼웅얼 말했다.
“이 정도 인연이면 운명… 아닐까요?”
“아니다! 이 자식아!”
결국, 도화는 묵범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빠악! 소리가 시원하게 술 창고에 울렸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관람하던 청우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며 물었다.
“이 상자는 어쩔 거냐.”
“아, 맞다. 이것 때문에 자네를 부른 건데. 까맣게 잊고 있었네.”
청우의 질문으로 도화와 묵범도 상자의 존재를 인식했다. 강림 도령이 상자를 꺼내 온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로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인위적으로 지워진 느낌은 전혀 없었다. 상자의 존재가 눈 녹듯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만약 청우가 상자를 콕 집어 말하지 않았다면 상자를 탁자 위에 그대로 둔 채로 일을 할 뻔 했다.
“청우, 자네. 이번에는 희작을 찾으러 제주도로 간다 했지?”
“그럴 건데. 왜 묻지?”
청우의 반문에 강림 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제주도에 가는 김에 삼신할망과 가믄장 아기님을 만나 이 상자를 보여 줄 수 있겠나?”
“삼신과 가믄장을 만나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에 청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주도 특산주나 쓸어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삼신과 가믄장을 만나고 오라는 부탁은 의외였다.
“그래. 가서 상자 속에 있는 망가진 혼을 수복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면 손을 써 달라고 해 봐.”
“두 신이 제주도에 있는 것은 확실하나?”
“최근에 둘이 손잡고 휴가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지.”
“장소는?”
“신화 호텔. 자세한 정보는 자네가 제주도로 떠날 때 보내 줄게.”
고개를 끄덕인 청우는 오창석의 혼이 들어 있는 상자를 챙겼다.
“그런데… 신은 천계에 있는 거 아닙니까? 휴가를 아래로 내려오기도 하나요?”
삼신과 가믄장 아기같은 고위신은 당연히 하늘에서만 지낸다고 믿고 있던 도화도 궁금하여 물었다.
“신이 얼마나 놀기 좋아하는데.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휴양지가 어디겠냐.”
“제주도죠.”
“그거야. 천계는 지루하고 따분하거든. 그런데 하계는 인간, 귀물, 타락한 귀鬼 등 온갖 군상이 모여 치고 박는 곳이잖아? 그중 천계보단 못해도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을 고르라면 역시 제주도지.”
“휴양이 목적이라면 해외에 더 좋은 곳이 많을텐데요?”
“멀잖아.”
“……?”
멀다는 대답에 도화의 머리가 잠시 정지했다.
‘멀다? 뭐가 멀다는 거지?’
멀다는 말에 ‘거리’를 떠올렸으나 이 이야기의 주체는 ‘신’이다. 신이라면 눈 한 번 깜빡이기 전에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뭐, 그런 능력이 있는 거 아닌가?
[신이 인간이나 귀물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존재도 아니거든. ‘멀다’라는 것은 도화, 네가 생각한 의미가 맞아.]
현천이 도화만 들리게 속삭였다.
[맞다고? 신이 거리가 멀어서 해외여행을 못 가는 게 말이 돼?]
[못 가는 건 아니야. 업무가 과중한 신만 못 가는 거지.]
[그럴 수가…….]
현천의 설명은 간략했으나 너무 많은 의미가 함축된 설명이었다.
‘그래도 그게 말이 되나?’
이러면 신이나 인간이나 다를 게 뭐가 있나 싶다. 그리고 묵범의 설명이 신에 대한 믿음과 환상을 깨트렸다.
“일정 거리 내에서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이동 가능합니다만, 너무 먼 거리는 그만큼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신이나 인간이나 예외 없거든요.”
“그렇다는 것은… 언제든 급한 일로 호출될지 모르니 멀리 못 간다. 이건가?”
도화가 현천에게 들은 설명과 제 생각을 섞어 물었다.
“맞아요. 그것이 고위신이 천년만년 바뀌지 않고 자리 보전하는 이유입니다.”
“왜?”
“왜겠냐. 일 같은 거 때려치우고 놀고 싶어서 그렇지.”
“……?”
강림 도령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보수는 높은데 워라밸이 개판이라 지원자는 적은 그런 직업. 그게 고위신이다. 네가 아는 유명한 신들이 바로 그 예야. 고착신이라고도 하지.”
네가 아는 유명 신들이란 말에 바로 여러 신이 떠올랐다. 하늘과 땅을 통틀어 으뜸신인 천지왕. 천지왕의 부인이자 땅을 다스리는 바지왕. 둘의 맏아들이자 저승신인 대별왕, 둘째 아들이자 이승신인 소별왕.
저승시왕, 수명신, 삼신, 운명신…….
“아무도 그 자리를 탐내지 않으니 세대 교차가 이루어질 리가 있나.”
“그래도 명성 때문에 하려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명성? 푸하하! 이봐, 홍 차사. 자네는 나를 대신해서 차사국 국장이 될 생각이 있나?”
“음… 그건…….”
도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강림 도령이 항상 술만 퍼마시고 놀아서 서류가 쌓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양의 업무를 소화하는 중이란 것을 안다. 서류는 그의 업무 중 가장 사소한 것이라 나중으로 미루다 보니 쌓인 것일 뿐.
‘내가 저 일을 다 한다?’
국장 자리에 앉아 쉴 새 없이 일을 처리하는 자신을 상상해 본 도화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종일 국장실에 셀프 감금을 하고 싶진 않았다.
“바로 그거야. 차사국 국장. 직함은 그럴싸하지. 하지만, 실체를 아는 너는 하기 싫잖아? 고위신도 그런 거다. 겉보기엔 화려하고 멋있지. 하지만, 그건 다 자신의 직책을 탐내도록 현혹하기 위한 허식이야.”
“…그렇군요.”
“하지만, 넘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지. 네가 내 자리를 탐내지 않는 것처럼.”
강림 도령이 업무에 찌든 얼굴로 중얼거렸다.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은 국장일 것이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한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일손이 둘이나 늘었으니 분류는 금방 끝나겠지? 자, 어서 일하게. 나도 일이나 해야겠다. 하하!”
일하러 간다면서 일어난 강림 도령은 주류 선반에서 술을 왕창 꺼내 국장실로 나갔다. 술 마실 생각에 업무로 찌든 얼굴이 활짝 피었다.
[일은 개뿔.]
현천이 헛웃으며 중얼거렸다.
* * *
생각보다 청우의 사무 능력은 꽤 유능했다. 도화는 면담을 하러 부장실에 들어갔을 때 보았던 서류의 산 때문에 강림 도령과 비슷한 부류구나 했던 생각을 고쳐먹었다.
‘하긴. 국장님은 매일 국장실에 있으면서도 일을 미룬 거지만, 부장님은 아예 차사국에 오질 않았으니까.’
강림 도령 때문에 졸지에 묵범과 청우도 야근에 참여한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도화 혼자 한 달 정도 걸린 일이 둘의 합류로 열흘 만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셋이 함께하는 야근 첫날, 도화는 아무 말도 없이 일만 하는 청우가 너무나도 어색했다. 하지만, 하루가 더 지나고 사흘째가 되니 오히려 강림 도령이 청우까지 붙여 준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홍도화 씨.”
묵범이 도화를 부르며 헛소리를 할 준비를 했다. 물론, 도화는 대꾸는커녕 시선도 주지 않았다.
“왕이 오른쪽에도 있고 왼쪽에도 있으면—.”
“범 수석. 일하기 싫으면 나가.”
“…….”
청우가 묵범의 말을 자르며 냉랭하게 말했다. 강제로 말이 끊긴 묵범이 인상을 쓰고 청우를 노려보았다.
“눈 그렇게 뜰 거면 나가.”
“…아닙니다.”
“내 입에서 한 번만 더 나가라는 말이 나오면 알지?”
“예.”
묵범은 청우에게서 시선을 돌려 도화를 쳐다보았다. 청우를 볼 때는 불순했던 눈빛이 도화에게 향하자 억울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변했다. 이 또한 도화에겐 먹힐 리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일하기 싫으면 나가.”
“홍도화 씨마저…….”
도화가 청우를 따라 하자 묵범은 배신당한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던 그는 결국,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도화가 청우에게 고마워하는 이유였다.
묵범이 일은 안 하고 자꾸만 도화에게 수작을 부릴 때마다 청우가 칼같이 막아 줬기 때문이었다.
청우 입장에서는 어서 이 일을 끝내고 야근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도화에겐 묵범의 치근덕을 차단해 주고 있는 것이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일 하루만 더 하면 미해결 사건 정리는 완전히 끝나겠군.”
마치 결전의 날을 하루 앞둔 사람처럼 비장하게 말한 청우는 잘 들어가라는 인사도 하지 않고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굉음과 함께 청우의 차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1분 1초라도 차사국에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속도였다.
“우리도 가죠.”
묵범도 청우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평소보다 속도를 냈다. 도화만 예외였다. 시곗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야근 수당을 받을 생각에 즐거웠다.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동안에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렀다. 묵범은 그런 도화를 살짝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도화가 돈이라면 환장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그는 임무를 좀 더 늘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모아 둔 게 많긴 한데…. 더 많이 벌어야겠어.’
그래야 홍도화가 제게 넘어오는 척이라도 할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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