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어휴. 뭔 꼬마 힘이 그리도 센지. 물속에 처박아 두느라 좀 늦었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여강진은 난처한 웃음과 함께 변명을 늘어놓았다. 옷 여기저기가 물에 젖은 것으로 보아 거짓은 아닌 듯했다.
“반도깨비를 전부터 알고 있던 건가?”
“아~ 그럴 리가요. 세상 살다 살다 반도깨비는 처음 봅니다. 도령께서도 그렇잖습니까?”
“그렇군.”
강림은 이 이상 소년에 대해 묻지 않았다. 참으로 희귀한 귀물이었으나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소년의 반을 구성한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알아도 현재 저승 상황에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을 일이었기에 그만 신경을 끊었다.
“술을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잘 아는군.”
“저승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요.”
여강진의 말이 끝나길 기다린 것처럼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오란 허락에 사환이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차린 것은 없지만, 술은 마음에 드실 겁니다.”
여강진은 강림의 술잔을 채우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술맛은 만족스러웠다. 일하느라 쌓인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릴 정도의 맛이었다.
“저승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이승엔 코빼기-.”
“뭐?”
“아, 아닙니다. 흠흠. 이승이 아무리 난리여도 저승에만 계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하마터면 저승의 실세에게 밉보일 뻔한 여강진은 목덜미에 칼이 드리운 듯한 체험을 했다. 차사들이야 명부가 있어야 한다지만, 강림이라면 명부가 없어도 손짓 한 번에 혼을 쏙 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각주도 알다시피 지금 이승이 흉흉하잖나.”
“흉흉하다마다요. 외적이 침략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제는 오랑캐가 육갑을 떨어 대니 귀계도 분위기가 좋지 않습다.”
“그러겠지. 흉흉한 분위기에 취해 타락하는 귀물이 점점 많아지니 말이야.”
“하아…. 어서 전쟁이 끝나야지, 미치겠습니다. 괜히 하계의 영향을 받을까 봐 우리 별천계도 오지 않으려는 귀물이 많아지고 있어서요. 매상이 뚝 떨어져서-.”
“그래서 부탁 좀 할 게 있어 온 거다.”
“바닥을… 예에? 부탁이라니요?”
강림은 징징대며 하소연을 하는 여강진의 말을 끊고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네가 사람을 부릴 줄 안다지?”
“사람이라 함은 정확히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겁니까? 방금 술상을 내온 녀석도 제가 부리는 사람입니다만?”
“내게 농을 걸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목숨이 여러 개인가 보군.”
“그, 그럴 리가요. 부리는 사람이요? 그리 많진 않습니다만, 모두 실력은 좋습니다.”
여강진은 서늘해진 목덜미를 손으로 슥슥 문지르며 대답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강림이 자신의 여각에 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으로만 들은 강림의 성격이 거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총 몇이나 되나?”
“다섯입니다.”
“적어.”
다섯이란 말에 강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최소 열은 될 줄 알았는데 다섯이라니. 팔도八道에 두셋씩은 보낼 계획이었는데. 하나씩도 보내질 못할 숫자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강림은 다섯도 어디냐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란 일손은 차사 중 전투에 능한 녀석들로 차출하면 되겠지.
“팔도에 활개 치는 타락한 귀물들을 처리해 줘야겠다.”
“보수는 얼마나 주실 겁니까?”
“보수? 목 위에 달린 게 거추장스러우면 내 친히 잘라 주는 수고를 해 줄 순 있지.”
“헉……!”
여강진이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보호하듯 감쌌다.
“네놈 명줄을 유지시켜 주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나?”
“아니… 아닙니다. 만족! 아—주 만족합니다!”
만족한다고 외치는 여강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리 귀물들의 신뢰를 받는 자라 한들 저승의 실세 앞에서는 호랑이 앞의 토끼만큼도 못한 존재일 뿐이었다.
“좋아. 그러면 자세한 사안은 차사 편으로 보내 주겠다.”
“그러십쇼…….”
여강진의 대답을 들은 강림은 남은 술을 모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강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예의 바르고 공손하기보단 어서 갔으면 하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이었다.
방을 나온 강림은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도깨비 기운을 느꼈다.
‘기운을 갈무리할 줄 모를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닌 듯한데. 역시, 반도깨비라 그걸 알려 줄 어른이 없어서 그런가 보군.’
사실 강림은 아까 본 반도깨비 소년에게 흥미가 있었다. 당장 소년에게 가서 부모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이내 흥미를 거두었다.
‘어차피 얼마 가지 않아 죽을 녀석에게 시간 낭비를 할 필욘 없겠지.’
지금껏 어찌 저찌 명줄을 이어 왔다 한들 요행일 터. 교맥국 도깨비들의 집착이 얼마나 집요한지 모르는 귀물이 없을 정도다.
‘그래도 살아남는다면.’
그럴 리가.
강림은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 냈다.
“보수는 내가 알아서 책정하마.”
“가, 감사합니다. 성은이 망극ㅎ—.”
강림은 여강진의 감사 인사를 끝까지 듣지 않고 1층으로 내려왔다. 여강진과 대화를 더 이어 나갔다간 반편이가 옮을 것 같았다.
* * *
“…그때 절 보셨다는 말입니까?”
놀란 도화가 강림 도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그 뒤로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보니 살아 있더라고. 그래서 어찌 살았나 조사 좀 해 봤지.”
강림 도령은 아주 대견하다는 듯이 도화의 어깨를 툭툭 쳤다. 슬쩍 어깨를 뒤로 빼며 강림 도령의 손길을 피하는 도화의 얼굴에 불쾌함이 스쳤다.
“그때부터 미해결 사건들이 저와 관련 있다고 여긴 겁니까?”
“아, 설마 내가 뒷조사했다고 기분 나빠 하는 거냐?”
“절 속였잖습니까. 모르는 척 면접까지 보고. 절 감시하려고 담마까지 차사국에 끌어들인 것이군요.”
“속이다니? 흐음…. 이거 오해가 좀 깊은 것 같은데.”
도화의 반응에 당황한 강림 도령이 손을 흔들며 변명하려고 했다.
“국장님. 요즘은 그런 걸 스토킹이라고 합니다. 아주 악질이군요. 속이고 접근한 것으로도 모자라 뒷조사까지 했다니. 그것도 꽤 긴 시간 동안 말이죠.”
가만히 듣고 있던 묵범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야, 이 자식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럼 말이지 소겠습니까?”
“……뭐라?”
당장 묵범의 머리털을 쥐어뜯을 기세였던 강림 도령이 멈칫했다. 그는 들으면 안 될 것을 들은 사람처럼 표정이 굳어 있었다.
도화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농담이라고 던진 건 아니겠지…….”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묵범을 쳐다봤다. 아무리 별 시답지 않은 헛소리를 늘어놓는 놈이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농담을 던진단 말인가. 심지어 진지하게 던진 말이라 아연실색했다.
“홍도화 씨가 너무 심각해하길래 분위기 좀 풀 겸 한 농담인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거 아닙니까?”
묵범은 억울하다는 듯이 눈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진심으로 한 게 아니니 다행이구나. 생각하던 도화는 강림 도령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묵범 덕분에 아까보다는 많이 침착해진 상태였다. 아까는 뭐라 단언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 때문에 무작정 화를 냈음을 인정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반도깨비라면 흥미를 가질 만하지.’
지금껏 살며 도화는 자신과 같은 반도깨비를 만난 적이 없다. 수많은 귀물을 만나고 온갖 소문을 모으는 여강진 또한 그러했다. 옛날 옛적 반도깨비가 있었더라~ 정도의 이야기가 전부라고 했다.
게다가 나머지 절반은 무슨 귀물의 기운인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궁금해하지 않는 게 이상할 판이었다.
“제 존재가 흥미롭다는 건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뒷조사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처음에는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긴 했다. 하지만, 궁금했는걸? 집요한 도깨비들에게서 멀쩡하게 살아남았으니까. 난 살아 있다 해도 팔이나 다리 정도는 잃었을 줄 알았거든.”
강림 도령의 해명에 도화는 화가 한풀 꺾여 자신이 어찌 살아남았는지 이야기했다.
“여강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기운을 숨기는 것부터 인간 속에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 여강진이니까요.”
“역시. 그랬었군.”
“그가 절 보호하겠다고 선언한 덕분에 도깨비들의 추격이 크게 줄어들기도 했고, 불래에서 일을 주선해 주기도 했고요.”
덕분에 도화는 멀쩡히 살아남은 유일한 반도깨비로 유명해졌다.
“뭐… 결론은 네 뒤를 캐다 보니 네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차사국의 미해결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 같더라- 이 말이었다. 내가 설명하면 믿지 않을 것 같아서 직접 확인하라고 야근을 시킨 것이고.”
“입이 있으면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제가 믿지 않을까 봐가 아니라 일하기 싫어서잖습니까.”
“흠…. 자네 꽤 직설적인 차사가 되었군.”
도화에게 정곡을 찔린 강림 도령이 머쓱해했다. 일부 미해결 사건이 도화와 연관이 있긴 했지만, 엉망으로 뒤섞여 있던 탓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는 게 정확한 이유였다.
“어쨌든. 기회를 봐서 자네를 차사국으로 데려올 계획이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저승 차사를 싫어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싫다는 놈 억지로 데려오면 엇나갈 게 뻔하잖아? 그래서 자네가 차사들을 방해해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었지.”
“저승 차사가 되지 않아도 미해결 서류는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거, 이거. 아무리 신입이라지만, 너무 모르는 거 아냐?”
“?”
강림 도령이 도화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대답했다.
“차사국에 드나드는 도방은 언제든 죽어도 이상할 리 없지만, 차사국 추혼부 소속 저승 차사 홍도화가 죽는다면 차사국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그제야 도화는 강림 도령이 별 볼 일 없는 자신을 차사국 소속으로 만든 이유를 깨달았다. 저승 차사의 죽음은 저승의 왕 대별왕의 명령하에 반드시 진상을 밝힌다.
만약 저승 차사 홍도화가 도깨비에 의해 죽는다면 교맥국은 저승의 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도깨비 놈들이 알짱대지 않았던 것이구나.’
생각해 보니 저승 차사가 된 뒤로 가끔 주변에서 느껴지던 도깨비 기척이 완벽하게 사라진 것 같다.
“여강진이 자네의 뒷배가 되어 준다 한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도깨비들이 자넬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집요한 도깨비여도 감히 차사국 사람을 건드리진 못해.”
맞는 말이다.
도화는 자신이 강림 도령을 너무 가볍고 성질 더럽고 술만 마시느라 일은 코딱지만큼도 하지 않는 상사로 여기던 것을 정정했다.
꽤 생각이 깊은 것 같다.
‘느려 터졌지만.’
자신이 저승 차사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면 이미지를 좋게 바꿀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뒷조사까지 한 사람이 돈으로 꼬셔 볼 생각은 왜 하질 않았는지 의아했다.
저승 차사를 싫어했으나 연봉과 온갖 혜택으로 꼬시니 넘어오지 않았던가. 저렇게 게을러터졌는데 차사국이 제대로 돌아가는 게 신기할 정도다.
도화가 속으로 상사 험담을 하고 있을 때 묵범이 난데없는 말을 던졌다.
“운명인가 봅니다.”
“???”
“???”
“???”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