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청우의 반응은 매우 정상적이었다.
“내가 왜?”
내 일도 바빠 죽겠는데 왜 내 부하의 일을 도와야 하느냐는 의미가 함축된 짧은 반문이었다.
“상사로서 네 부하 직원 힘들어하면 도와주는 게 맞는 거 아니냐?”
“그건 개인 사정이고. 나도 바빠.”
“누군 안 바쁘냐?”
“평소에 네가 일을 제대로 안 해서 쌓인 거 다 안다.”
“그건 그거고. 어차피 홍 차사가 읽었어야 할 서류들이야. 읽으면서 분류도 같이 하는 것뿐이지.”
“그게 네 직무 유기를 해명할 순 없어.”
“직무 유기? 네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이야. 양심이 있으면 못 올렸을 텐데?”
“내가 왜?”
“내 비서가 왜 네 사무실에 있는지 잊어버렸냐?”
“흠.”
강림 도령과 청우의 대화는 점점 다른 길로 새고 있었다. 한참을 서로의 잘못을 따지던 둘은 묵범이 물고 있던 빨대에서 나는 쪼로록- 소리에 정신 차렸다.
“넌… 이 상황에서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강림 도령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묵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컵에 남은 마지막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대로 빨아 먹었다.
“홍도화 씨는 제가 도울 겁니다.”
“잘됐군. 난 이만.”
묵범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청우가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강림 도령이 막아섰다.
“어딜. 둘 다 도와. 저게 한 명 붙어서 끝날 분량으로 보여?”
“젠장.”
기회를 틈타 추혼부로 돌아가려던 청우는 강림 도령이 몸으로 직접 막아서자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의자에 털썩 앉은 청우는 서류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강림 도령에게 물었다.
“의논한다며. 무슨 의논인지나 말해.”
이에 질세라 묵범도 강림 도령에게 물었다.
“이 많은 일을 왜 홍도화 씨가 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 미치겠네.”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던 강림 도령은 주류 진열대로 가 술 몇 병과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탁자 위에 상자를 올린 그는 목이 탄지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이건 그때 그 상자?”
묵범이 먼저 상자를 알아보았다. 잠금장치도 없는 작은 나무 상자는 무구부에서 만들었다는 보안 상자였다.
“안에 든 것은 여전합니까? 하늘로 가져간다 했던 것 같은데…….”
“아, 그대로야. 너무 바빠서 천계에 올라가지도 못했어.”
“그렇군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우가 상자에 관심을 보였다.
“뭐가 들어 있는데.”
“그때 말했던 거. 불의사망자 오창석의 망가진 혼을 담아 둔 상자다.”
“그게 이 상자군. 열어 봐도 되나?”
“안 돼.”
상자를 덥석 집으려는 청우의 손을 강림 도령이 막았다.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상자를 여는 충격만으로도 완전히 망가질 수 있어.”
“흠. 어쩔 수 없군. 간신히 얻은 불의사망자의 혼을 망가트릴 순 없지.”
청우는 상자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부장님도 불의사망자에 대해 알고 계셨군요.”
묵범은 강림 도령이 상자를 꺼냈을 때 청우도 불의사망자에 대해 알고 있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강림 도령이 제 사람처럼 여기는 이가 몇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청우인 것은 차사국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강림 도령이 극비리로 다루고 있는 정보를 청우와 공유하는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홍도화에게까지 공유하는 게 이상했다.
‘특히 홍도화…….’
묵범은 천지왕의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홍도화는 천계의 사람도 아니고 차사국에서 오래 근무한 차사도 아니다. 출신성분의 반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반도깨비.
차사들의 일을 방해하던 귀물이니 차사국에 반감을 가졌으면 가졌지 호의는 없었을 터.
‘강림 도령은 왜 홍도화한테까지 기밀 사항을 공유한 걸까. 심지어 미해결 사건까지 보게 하고.’
미해결 사건은 차사국의 치부이다. 그걸 저승 차사가 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신입 차사에게 모조리 오픈한다?
강림 도령의 성격상 절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할 린 없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범 수석. 홍 차사를 그렇게 쳐다보면 잘 자다가도 깨겠어.”
“아?”
묵범은 강림 도령의 타박에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이 홍도화에 대한 생각을 하며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는 홍도화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화가 몸을 뒤척이자 묵범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런 의미로 쳐다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것 봐. 깼잖아.”
잠자리가 불편해서 뒤척이는 줄 알았는데. 강림 도령의 말대로 불편한 시선 때문에 깬 듯했다.
“부장님은 언제 오셨습니까?”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도화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잠에 취한 낮은 목소리를 들은 묵범은 괜히 텅 빈 컵에 꽂힌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홍 차사. 깼으면 이리 와 앉아.”
“네.”
강림 도령이 손짓에 도화는 순순히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 멈칫했다.
‘이건 누구 도포지?’
어차피 도화 본인도 도포를 입은 상태로 누운지라 추위를 탈 일은 없지만, 그래도 신경 써 준 게 고마워서 인사라도 하려고 했다.
도포의 주인을 찾으려고 술 창고에 모인 셋을 훑어본 도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림 도령과 청우는 아주 멀쩡히 도포를 입고 있었다.
탁자에 앉아 빨대를 신경질적으로 씹고 있는 묵범만 도포를 입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도포의 주인이 묵범이란 뜻이었다.
“가져가. 춥지도 않은데 뭐 하러 덮어 주고 있어.”
묵범의 도포란 것을 알자마자 감사 인사 대신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안 춥더라도 잘 땐 뭔가 덮어야 잠이 잘 오잖아요? 난 그렇던데.”
“그건 네 사정이고.”
묵범에게 도포를 던진 도화는 슬쩍 탁자로 다가왔다. 강림 도령과 청우, 그리고 묵범과의 거리를 재다가 강림 도령 옆으로 가 앉았다.
“여기 자리 많은데…….”
“네가 있잖아. 싫다.”
“그렇군요.”
도포를 다시 걸친 묵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풀 죽은 대형 맹수처럼 보여서 좀 불쌍해 보였다.
‘속지 마. 다 연기야.’
강림 도령의 옆에 앉은 도화는 묵범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앞에 있는 서류 뭉치를 붙들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뭐라도 시선을 고정시킬 게 필요했다.
“홍 차사. 그거 다 읽고 분류한 거 아닌가?”
“아, 맞다. 그랬었죠.”
하지만, 눈치 없는 강림 도령의 참견질에 도화는 아직 읽진 않고 분류만 해 둔 서류를 들고 왔다. 술 창고에 모인 사람 중 자신이 가장 말단이니 의논을 하든 뭘 하든 끼어들 틈은 없을 게 뻔했다.
“그래서 대체 그 의논할 게 뭔데. 불의사망자에 대해 뭐 알아낸 거라도 있나?”
청우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이걸 가지고 천계로 가서 회복 좀 시키는 게 우선이야.”
“그러면 뭘 의논하자고.”
도화는 서류를 보는 척하며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홍 차사. 미해결 사건 읽어 보면서 뭐 느낀 점 없어?”
“예?”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귀를 기울이던 도화는 갑자기 제게 던져진 질문에 깜짝 놀랐다.
“내가 말했잖나. 읽다 보면 뭔가 느낌 오는 게 있을 거라고.”
“뭔가 짚이는 게 있긴 합니다만. 아직 명확하게 말할 정도까진 아니라…….”
“그냥 느낀 대로 말해 봐.”
강림 도령의 재촉에 도화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의 머릿속은 지금 엉망이었다.
하루 평균 다섯 시간 동안 미해결 사건을 머릿속에 쑤셔 녛는 짓을 한 달을 넘게 했더니 뒤죽박죽이 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상하다고 느꼈던 사건이 뭐가 있었더라.’
강림 도령은 ‘자네가 직접 미해결 사건들을 훑어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다.’라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들은 도화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국장이 헛소리를 한 것이라는 도화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무얼 읽어도 잔혹 전래 동화를 읽는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처음으로 도화가 기시감을 느낀 미해결 사건이 나타났다.
작은 마을의 자손 많은 거부에게 닥친 불행이었다.
장남이 머리가 아프다 하여 용하다는 의원이란 의원을 불렀으나 도통 병증이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두통이 미간으로 모이더니 이내 종기가 되어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크기를 늘리더라. 결국, 종기가 터지며 장남은 사망했다.
두통과 종기는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장남에 이어 차남, 삼남, 손자에게까지 번졌다.
거금을 들여 굿을 하고 부적을 썼으나 차도는 없고 모두 괴이한 병증에 목숨을 잃었다.
병증으로 사망한 망자를 인도할 차사와 병증을 거부의 집안에 푼 원귀를 잡을 차사가 이승에 올랐으나 난관에 부딪혔다.
망자가 되어서도 병증은 사라지지 않아 되려 차사를 공격하니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을 하였다.
원귀는 단서조차 흘리지 않아 과연 원귀의 짓이 맞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두통.’
정확히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나 아주 어릴 적, 호윤과 스승을 만나기 훨씬 전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였다.
산 넘어 물 건너 어느 마을에서 소문난 거부 가문이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났다더라. 대를 이를 손자까지 모조리 머리가 터져 죽었으니 아주 악독한 원귀가 붙어 대대손손 저주를 내린 게 분명하다- 라는 소문이었다.
그때는 머리가 터졌다는 말에 누가 머리를 공격했다고 생각했는데, 미해결 사건 일지를 보니 두통 뒤에 부푼 종기가 터져 죽은 것이었다. 대체 두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종기가 자라고, 종기가 얼마나 크고 깊게 뿌리박혔으면 터져 죽은 건지 감은 잡히지 않았으나 분명 도화가 알던 사건이었다.
이때는 ‘이런 일도 있었지.’라는 정도로 읽고 지나쳤었다. 하지만, 두 번째 기시감을 받은 사건을 접한 도화는 강림 도령이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다.’라는 게 무엇인지 얼추 감이 잡혔다.
최 진사댁 하인이 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갔다가 주워 온 감투. 도깨비감투라고 소문이 돌아 너도나도 써 보겠다고 한바탕 소란이 일었으나 최 진사 역시 감투를 탐내어 하인에게서 빼앗았다.
쓰면 모습을 감출 수 있다고 전해지는 도깨비감투라 생각하고 썼으나 어찌 된 일인지 모습을 감추긴커녕 터질 듯한 통증이 감투를 쓴 머리를 옥죄였다.
감투를 벗으려 했으나 감투는 머리에 철썩 붙어 강제로 떼었다간 머리 가죽이 벗겨질 것 같았다.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던 최 진사는 갑자기 광증이 도져 자신을 치료하러 온 의원을 베어 죽였다.
광증은 의원 하나를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말리러 온 하인부터 잡으러 온 관졸까지 베어 넘기다 고꾸라져 죽었다. 죽은 뒤에 벗겨진 감투 안은 최 진사의 피로 흥건했더라.
차사들이 감투의 원주인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 뒤로도 한두 개씩 도화의 옛 기억을 자극하는 사건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을 한데 모으니 두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두통과 광증.”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