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뒤를 돌자 새카만 덩어리가 도화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놈이다!]
어디서 씻었는진 모르지만, 깔끔해진 현천이 먼저 날아와 도화의 앞을 막아섰다. 덕분에 검은 덩어리는 현천의 검날에 맞고 폐공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김진규인가 보군요.”
묵범이 부용삭을 꺼내 들며 말했다. 도화는 들고 있던 복권을 주머니에 잘 챙겨 넣고 현천을 잡았다. 새로 지급받은 부용삭도 있지만, 아무래도 현천을 휘두르는 게 편했다.
[내 복권…. 내 복권!!!]
다시 달려드는 김진규를 이번에는 묵범이 막아섰다. 하지만, 김진규는 묵범과 부딪히기 전에 미꾸라지처럼 몸을 틀어 도화에게 날아갔다.
정확하게는 복권을 넣은 도화의 바지 주머니를 향했다.
“역시. 복권 때문이었군.”
도화는 현천을 던져 김진규를 막고 허리춤에서 부용삭을 꺼냈다.
‘제발 말 좀 들어라.’
속으로 간절히 바라며 부용삭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저승 차사가 된 이상, 차사의 무기인 부용삭은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했다.
‘묶어 버려!’
도화가 속으로 외친 것을 들은 것일까.
부용삭이 웬일로 목표물인 김진규를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김진규의 검은 영혼을 쥐어 터트릴 기세로 꽁꽁 포박하기 시작했다.
[으어? 으어어?!]
[으아아!!! 내 복권! 이거 놔라!!!]
[뭐냐, 이거? 이봐, 홍도화! 이거 풀어!!!]
“…….”
도화의 부용삭은 김진규의 영혼과 함께 대치하고 있던 현천까지 묶어 버리고 말았다.
“웬일로 말을 잘 듣나 했다…….”
“그래도 망자를 잘 포박했으니 된 겁니다.”
묵범이 잘했다고 도화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물론, 현천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되긴 뭐가 돼!!! 이거 안 풀어?!]
* * *
탈주 망자 김진규를 잡는 것으로 오늘 일은 일찍 끝이 났다. 하지만, 도화의 일은 끝이 난 게 아니었다. 오늘도 국장실의 술 창고에서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해야 할 처지였다.
‘우선 집에 가서 씻고 다시 출근하자.’
김진규의 시신을 찾느라 쓰레기 더미를 헤집는 바람에 옷에서 냄새가 났다. 직접 쓰레기를 치운 묵범도 마찬가지였다.
“씻고 다시 차사국으로 갈 겁니까?”
집으로 운전하던 묵범이 도화에게 물었다.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시선에 묵범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도 차사국에 들어가야 하니까 같이 집에 들렀다가 출발하죠. 저도 좀 씻어야 해서요.”
“그러든지.”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한 도화였다. 차가 없으면 택시를 타고 한강 다리까지 가거나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씻고 두어 시간 자는 건 어때요? 피곤해 보이는데.”
“됐어. 조금이라도 빨리 야근을 끝내는 게 더 중요해.”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눈 좀 붙여요.”
“도착하면 바로 깨워.”
“알았어요.”
괜히 위한답시고 집에 도착했는데 깨우지 않는 일은 사전에 방지한 도화는 편안히 시트에 몸을 기댔다.
[홍도화야. 나는 집에서 쉬련다. 오늘 정신이 너무 피폐해졌어.]
[시끄러워. 엄살은.]
도화는 창밖으로 보이는 앙상한 나무들을 구경하다 눈을 감았다. 묵범의 말대로 차 안에서라도 자 두는 게 나을 듯싶었다.
* * *
한 시간 뒤.
도화는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국장의 술 창고에 도착했다.
“오, 오늘은 스케쥴이 일찍 끝났나 보군.”
강림 도령은 마시던 술을 한입에 털어놓고 도화를 맞이했다.
“그러면 열심히 일하게. 난 밖에서 내 일을 할 테니까.”
그는 선반에서 술 몇 병을 꺼내 옆구리에 끼고는 국장실로 나갔다. 도화는 근무 시간에 음주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하는 강림 도령의 모습을 지적할 힘도 남지 않았다.
‘뜨거운 물로 씻고 왔더니 너무 피곤해.’
현천도 집에 들른 김에 소독을 해야겠다며 뜨겁게 데운 정종에 몸을 푹 담갔다. 그 여파인지 현천도 테이블 위에 늘어진 상태였다.
사실 이 정도의 피로는 도화에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지금 도화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는 복권 때문이었다.
‘내 돈…….’
도화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사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들어 있던 복권이었지만, 지금은 텅 빈 상태다.
[주인이 없으니 그 복권은 홍도화 씨, 당신 것입니다.]
폐공장에서 묵범이 했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처음으로 차사국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했던 도화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내 복권…….’
복권은 차사국에 들어서는 순간 경리부에서 수거해 갔다.
[경리부에서 나왔습니다. 임무 중 획득한 재화는 차사국 귀속입니다. 탈주 망자 김진규에게서 수거한 복권을 제출하세요.]
싫다. 안 된다. 내 거다. 라고 주장할 틈도 없이 경리부는 도화를 압박했다. 복권에 미련이 많은 도화가 바로 움직이지 않자 경리부는 재차 말했다. 두 번째는 마치 경고 같았다.
[홍 차사님. 이건 차사국 규칙입니다. 예외는 없으니 제출하세요.]
결국, 도화는 손까지 내밀고 있는 경리부 차사에게 김진규의 복권을 건네줘야 했다. 복권을 강탈당했으니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오늘은 대충 연도별 분류만 하고 내용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마음먹은 그때. 누군가 도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 놀란 도화가 재빨리 상체를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도화보다 상대방이 더 빨랐다.
어깨를 둘렀던 팔이 도화가 도망가지 못하게 어깨를 꾹 내리눌렀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도화에게 물었다.
“이렇게 산더미 같은 일을 혼자 하고 있던 겁니까?”
“……너였냐?”
바늘처럼 곤두섰던 온몸의 신경이 묵범의 목소리를 듣자 풀 죽은 것처럼 꺾여 사라졌다. 기습 상대가 적이 아니라는 것에 다행이라고 안도한 것도 잠시. 뒤늦게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너 이 새끼! 또 흑립 썼지!!”
“흑립을 안 쓰면 제가 온 걸 알아차릴 텐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너는 진짜… 하, 됐다. 말을 말자.”
묵범과 말싸움을 해 봤자 이쪽만 손해라는 것을 아는 도화는 주먹에 힘을 풀고 묵범의 팔을 어깨에서 떼어 냈다.
‘좋게 생각하자. 허리나 엉덩이를 만진 건 아니니까. 어깨…. 뭐. 동료끼리 어깨동무 정돈 할 수 있어.’
화를 낼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서류 분류를 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도화는 묵범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묵범을 무시하며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묵범은 도화의 옆에서 알짱거리며 말을 걸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
“흠. 이거 원귀, 악귀, 귀물로 분류하면 되는 겁니까?”
“…….”
도화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묵범은 쌓인 서류 내용을 대충 훑어보고는 본인 나름대로 분류를 하기 시작했다.
“어라? 이건 인간끼리 있던 일이군요. 이게 왜 여기에 껴 있지?”
“그만.”
“인간은 따로 이쪽에 빼 두겠… 네?”
“그만하라고!! 만지지 마. 건들지 마!!”
결국, 도화는 묵범의 만행에 폭발하고 말았다. 도화의 고함에 놀란 묵범이 실수로 분류가 끝난 서류 더미를 건들고 말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국장실에 있던 강림 도령이 술 창고로 들어왔다. 잔뜩 날 선 눈으로 묵범을 노려보고 있는 도화가 눈에 들어왔다.
“싸우냐?”
어제까지만 해도 홍도화가 여기까지 다 분류했다며 뿌듯하게 보여 주던 테이블이었는데. 지금은 엉망이 된 게 도화의 야근 첫날 상태로 돌아간 듯했다.
“허이고. 이게 뭔 개판이냐. 다 된 밥에 재를 아주 거하게 뿌렸네.”
강림 도령의 탄식을 들은 묵범은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 * *
“많이 피곤했나 보군.”
강림 도령은 테이블 옆에 설치한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는 도화를 보고 쯧, 혀를 찼다.
묵범이 자신의 도포를 벗어 잠든 도화에게 덮어 주었다.
“그러길래 진작에 저를 부르지 왜 홍도화 씨만 혼자 고생하게 한 겁니까?”
난장판이 된 테이블은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도화는 내용을 하나하나 다 확인하며 간략하게 메모까지 하느라 진행이 느렸지만, 묵범은 그저 다시 분류만 한지라 원상 복귀는 빨랐다.
“대체 언제 적 미해결 사건까지 다 끌어내 온 건지…. 뒤늦게 신입 괴롭히기에 맛 들리기라도 한 겁니까?”
“이것 보게? 어디 감히 까마득한 상사한테 기어올라?”
“상사인 건 맞지만, 까마득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 차사국이 아니라 천계 소속이라고요. 거참. 아무리 인간들 조직도를 가져왔다지만, 블랙 기업이나 할 짓까지 따라 할 필욘 없지 않을까요?”
“…….”
묵범의 비아냥에 강림 도령은 부들부들 떨었다. 통쾌하게 한마디 날려 주고 싶은데 하는 말마다 맞는 말이라 반박 거리가 없었다.
“홍도화 씨에게 이렇게 무리하게 장기간 야근을 시키는 것도 권위에 의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이, 이 자식이! 말이면 단 줄 아냐! 내가 홍 차사에게 사비로 야근 수당을 얼마나 쏟아 붓고 있는데! 내가 강제로 시켰냐? 돈 준다니까 하겠다고 한 건 저 녀석이다!”
“애초에 안 시켰으면 될 일이잖아요?”
“모르면 좀 닥치고 있지?”
평소라면 네까짓 놈이 뭘 아냐며 탁자를 버럭 화를 냈을 강림 도령이 낮게 목소리를 깔고 경고하듯 말했다.
의외의 반응에 묵범은 빈정거리던 태도를 고쳐 앉았다.
‘단순한 야근이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이유가 있다 해도 이렇게 한 명에게 일을 몰아 주는 것은 비정상적이었다. 묵범은 도화에게 보조 인력을 최소 한 명은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르니까 알려 주시죠.”
“젠장. 좀 조용히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다 글러 먹었군.”
“?”
강림 도령은 짜증 난다는 듯이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나다. 국장실로 와 봐. 의논 좀 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상대방과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연락을 할 만큼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누굽니까?”
“곧 올 테니까 직접 봐. 너도 아는 사람이니까.”
곧 온다는 것을 보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묵범의 추측대로 5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누군가 술 창고 문을 불쑥 열고 들어왔다.
“어? 부장님?”
강림 도령과 통화한 사람의 정체는 추혼부 부장 청우였다.
“여기도 내 사무실과 다를 바 없군.”
청우는 테이블 외엔 서류가 난잡하게 쌓여 있는 술 창고 내부를 살펴보고는 혀를 찼다. 그리고 테이블 근처 간이침대에서 자고 있는 홍도화를 발견했다.
“저놈은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지?”
“저기 저 흑호 놈이 지금껏 한 야근을 도루묵으로 만들어서 내가 좀 쉬라고 했어. 네 쪽은 어때?”
“어떻긴. 대충 마무리 작업 중이다.”
“그거 다행이군.”
“?”
다행이란 강림 도령의 말에 청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추혼부 일 다 하면 너도 이쪽으로 붙어.”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