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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100화 (101/146)

100화

저번보다 더욱 다양한 음식이 상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이 차사가 양 옆구리에 술을 끼고 즐거워했다. 유 차사는 그런 이 차사 옆에서 그를 감시했다. 둘이 한 팀이라더니, 잘 맞아서가 아니라 유 차사가 일방적으로 이 차사를 챙기는 관계인 것 같았다.

“범 수석님! 부장님은요?”

강 차사가 손을 들고 묵범에게 질문했다.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의 음식에 왁자지껄 즐거워하던 차사들은 강 차사의 질문에 갑자기 조용해졌다.

“안 오십니다. 카드는 받아 왔으니 걱정 말고 드세요.”

“와아!!!”

묵범의 대답에 추혼부 차사들이 환호했다. 그 속에서 도화는 어정쩡하게 박수만 몇 번 치다 말았다.

‘불편해.’

산해진미가 눈앞에 한가득한데 딱히 먹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끄러운 분위기도 별로고 같은 부서 차사라지만, 친하질 않으니 서로 대화하는 것도 껄끄러웠다.

‘차라리 저 자식이랑 싸우는 게 더 편하겠—.’

미쳤냐, 홍도화?

도화는 차라리 묵범이 편하다는 생각을 떠올린 자신에게 냅다 화를 냈다. 화르륵- 속에서 열불이 치밀어 앞에 놓인 물컵을 단번에 들이켰다.

“컥…!!”

“이야~ 신입이 아주 호탕하구먼! 이 독한 술을 원샷 때려 버리네?”

“역시 도방 선생이야.”

“잔이 비면 통장 잔고도 빈다는 말 들어봤나? 자자, 어서 꽉꽉 눌러 담아!”

“…….”

도화는 멍하니 다시 가득 채워지는 자신의 잔을 쳐다보았다. 물… 아니었나? 투명한 컵에 투명한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어서 당연히 물인 줄 알았는데?

부지불식간에 뱃속에 쏟아 부은 독한 술이 위장을 홧홧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로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했다.

“마셔라! 마셔라!”

“선배님이 주는 술이니 감사히 마시도록!”

분명 저쪽 상에 있던 이 차사였는데.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인지 도화 옆에 찰싹 붙어서 술잔을 도화의 입에 가져다 댔다.

처음에는 물인 줄 알고 단번에 마셔서 미처 맡지 못했던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독한 알코올 향에 인상을 쓰자 이 차사가 어허! 어서 마시지 못할까? 으름장을 놓았다.

“술은 즐기지 않습- 읍….”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그 틈을 노린 이 차사가 냅다 도화의 입에 술잔을 기울였다. 기습 공격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상당량의 술이 입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에 들어간 만큼 입가와 옷에 흘러 적셨다.

“…….”

이 차사가 추혼부에서 가장 진상이라는 말은 들어 알고 있긴 했다. 저번 회식 때에도 꼰대 짓을 하다 묵범과 유 차사에게 제지당했던 기억도 난다.

그래도 그때 묵범한테 한 소리 먹었으니 이번에는 자제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때 못했던 꼰대 짓을 지금 몰아서 하는 것 같았다.

“딱 한 잔만. 응? 선배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안 마실 거야?”

‘선배는 무슨. 주정뱅이 자식이…….’

싫다고 입을 벌리자니 술을 부을 것 같고. 밀치자니 감히 선배를 민다고 인상을 쓸 것 같아서 가만히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차사님. 저번에도 한 번 경고했던 것 같은데…….”

“헛?”

언제 다가왔는지 묵범이 손을 뻗어 이 차사가 들이밀던 술잔을 도화의 입술에서 떼어 냈다.

“홍도화 씨는 술을 즐기지 않으니 강요하지 마시고. 여기, 이쪽에 양보하면 원만히 해결될 것 같군요.”

“?”

묵범은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술잔에 퐁당 빠트렸다.

[어~ 맛 좋다!]

기분 좋은 남자 목소리와 함께 술잔의 술이 순식간에 쑥쑥 줄어들었다. 깜짝 놀란 이 차사가 쥐고 있던 술잔을 놓자 도화가 재빨리 받아 들었다.

“홍도화 씨가 현천을 잊은 것 같길래 제가 챙겼습니다.”

“아…….”

묵범의 말을 듣은 도화는 그제야 자신이 면담 전에 책상 서랍에 넣어 둔 현천을 까맣게 잊고 있던 걸 깨달았다.

순간 멈칫했던 도화의 반응을 놓치지 않은 현천은 술잔 안에서 웅웅 울듯 말했다.

[도화, 너…. 어떻게 날 잊을 수 있어? 내 너를 그리 안 키웠건만…….]

[미쳤어?]

[흠, 흠.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쨌든, 내가 네 흥기사를 하러 왔으니 걱정 마라. 하하!]

[흥…기사?]

푸훗-.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묵범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현천이 도화와 묵범에게만 들리게 말을 하고 있었기에 다른 차사들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진 묵범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이게 말로만 듣던 ‘현천’인가요?”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이 차사를 갈구던 유 차사가 술잔 속 현천을 보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도화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회식을 즐기던 다른 차사들도 우르르 도화 곁으로 몰려들었다.

“정말? 현천상제의 신기 현천이라고? 저게?”

“너무 작은 거 아니야?”

“그런데 검이 왜 술을 마셔? 무기도 밥을 먹어야 하나?”

“내가 아냐? 직접 물어봐.”

빈 술잔 안에 들어 있던 현천은 차사들의 관심이 온통 제게 쏠리자 우쭐해졌는지 술잔에서 빠져나왔다.

[하하! 내가 바로 현천상제의 신기! 현천이올시다!]

“오오오! 말도 한다! 말도 해!”

맨날 도화에게 구박만 받던 현천은 추혼부 차사들의 감탄 어린 눈빛에 기뻐했다. 이 차사가 얼른 술을 따라 현천에게 내밀자 현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차사가 든 술잔으로 들어갔다.

“오오! 현천이 내게 왔어!”

“야, 술 어딨냐? 뭐? 벌써 다 마셨다고?”

누가 열심히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이 추가 주문을 받기 위해 청운각으로 올라왔다.

“아무래도 산월관의 술 창고가 바닥날지도 모르겠군요.”

“술 창고가 아니라 부장님의 카드 걱정을 해야 하는 거 아냐? 현천 저거, 절대 안 취하는 놈인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부장님은 우리보다 훨씬 많이 벌고 전혀 쓰질 않으니까요. 이 정도는 잔고에 흠집도 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

차사들은 현천을 모시고 대화하느라 묵범과 도화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현천은 관심을 받아서 좋고 도화는 이 차사에게서 벗어나서 좋았다.

도화는 현천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차사들에게서 좀 더 떨어져 앉았다. 그러다 보니 묵범과의 거리는 더욱 좁혀졌다.

여기서 더 가까워졌다간 서로 팔이 닿을 것 같아서 멈춘 도화는 묵범을 힐끔 쳐다보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흠. 고…맙다.”

“음? 뭐가 말입니까?”

“아까 이 차사님한테서 구해 줬던 거.”

“아, 그거요? 그야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하긴. 책임자니까 음주 강요를 막는 건 당연하긴 하지. ”

“아닌데요?”

“?”

도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범이 반박했다.

“아니면 뭔데?”

“그야 당신이 술을 좋아하지 않으니 막은 겁니다. 뭐, 좋아했어도 막았겠지만.”

“무슨 헛소리야.”

“술을 따라 줘도 제가 따라 줘야지요. 자, 절 따라 말해 보세요.”

“아니, 뭘…….”

도화는 묵범과 대화를 하면 자신의 어휘력이 점점 퇴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놈은 이러쿵저러쿵 별의별 말을 다 하는데 자신은 뭔데, 뭐, 뭐야, 뭘… 같은 말만 반복했다.

따지고 보면 묵범은 개소리, 헛소리,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해 대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묵범은 도화의 손에 빈 술잔을 쥐여 주고는 말했다.

“이리 와 술 한 잔 따라 보아라.”

“……?”

도화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런 도화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묵범이 작게 속삭였다.

“오늘 밤, 수청을 들라- 라고 말해 줘요.”

“!!!”

도화의 몸이 화들짝 놀라다 못해 앉은 자리에서 크게 튕겼다. 과장해서 엉덩이가 바닥에서 5cm 정도는 튀어 올랐을 것이다.

수청을 들라고 말해 달라는 기가 막힌 요구 때문이 아니었다. 귓가에 스친 묵범의 입술 때문이었다. 그의 속삭임은 공기 반, 소리 반이 되어 귀의 솜털을 흔들고 고막을 간지럽혔다.

‘으… 미친!’

도화는 자신의 양팔을 마구 쓸어내렸다. 하지만, 대책 없이 솟은 소름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팔을 쓸어내리던 도화는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말해 줘요.’란 속삭임이 고막에 달라붙어서 반복되고 있었다.

“으, 으!”

“귀 다쳐요.”

묵범이 귀를 후비다 못해 손으로 팍팍! 소리 나게 때리는 도화를 저지했다.

“윽!”

묵범의 손에 손목을 붙잡힌 도화가 또 흠칫 몸을 떨었다. 손목에 감긴 묵범의 손에서 뜨거운 체온이 전달되었다. 마치 불에 달군 쇠사슬을 손목에 감은 것 같았다.

“얼굴이 왜 이렇게 붉어요?”

묵범의 질문에 도화는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네놈 때문에 그런 거라고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말했다간 기고만장해서 더욱 이상한 요구를 할 게 뻔했다.

그런 도화의 마음도 모르고 묵범은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도화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감기 때문에 나는 열은 아닌 것 같은데…. 몽식에게 시달린 여파가 아직 남은 겁니까?”

“그, 그래.”

그럴 리가 있나. 전혀 아니다. 몽식에게 대가를 지불한 지 벌써 2주나 지나지 않았던가. 첫 주는 피로감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멀쩡했다.

“제 불찰입니다. 회식 날짜를 좀 더 뒤로 잡았어야 했는데……. 입맛이 없으면 먼저 집으로 돌아갈까요? 음식은 산월에게 부탁해서 싸 달라고 하면 됩니다.”

“됐어. 술만 안 마시면 괜찮아. 현천도 간만에 신난 것 같고.”

도화의 말에 묵범이 차사들에게 둘러싸인 현천을 쳐다봤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모임을 뽑으라면 저기 현천과 저승 차사들을 고르면 될 정도로 하하, 호호, 껄껄 즐거워하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현천만 쏙 빼갈 순 없겠군요.”

“그러니까.”

얼굴에 과하게 열이 오르는 바람에 묵범에게 화낼 타이밍을 놓친 도화는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묵범을 만나기 전의 자신은 절대 이런 바보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묵범을 만난 이후로 자신의 정체성이 점점 부서지는 기분이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부서지고 있었다.

‘이 자식을 멀리해야 하는데…….’

그래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 하지만, 묵범과 파트너로 묶여버린 이상 그럴 가능성은 없다. 낮은 것도 아니고 0%.

이유는 하나다.

‘저 자식이 날 놓아줄 리 없을 테니까.’

지금도 호시탐탐 수작을 부리려고 별 거지 같은 짓을 다 떠는데 순순히 파트너를 바꿔 줄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추혼부 부장이 돌아왔어도 실세는 묵범인 게 훤히 보였다. 부장은 밀린 서류 업무만 처리하면 까치인지 까마귀인지 모를 새를 찾으러 떠난다고 하니 말이다.

‘아, 머리 아프다.’

도화는 차사직을 때려치우지 않는 이상 묵범과 헤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출근, 업무, 퇴근도 모자라 집도 현관문을 공용으로 사용하는 사이라니. 이보다 더 끔찍할 수가 있을까.

묵범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도화를 보더니 본인의 다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어? 머리 아픕니까? 제 무릎에 누워서 좀 쉴래요?”

도화는 무릎베개를 해 주고 싶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묵범에게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냥 좀 닥치고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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