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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99화 (100/146)

99화

현천의 난데없는 으른 타령에 담마는 조용히 냉장고로 갔다. 그리고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으엉? 나 술 주려고?]

따닥, 뚜껑 여는 소리에 현천이 반응했다. 담마는 그런 현천을 무시하고 소주병에 하얀 가루를 듬뿍 탔다.

[오오. 설탕 뿌려 주는 거냐? 달착지근한 거 좋지. 아암. 좋고말고.]

“자요.”

현천은 담마가 화를 낼 타이밍에 화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술을 내미는 데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도화 저 녀석 때문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는데 잘 됐다. 시원하게 쭉 들이켜야지.]

현천은 하얀 가루가 설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몸 크기를 줄였다. 그리고 술병 속으로 퐁당 입수했다.

담마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뚜껑을 닫아 버렸다.

[으잉?!]

갑작스러운 담마의 행동에 놀란 현천이 술병 안에서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으려던 그는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짜디짠 술맛에 재차 놀랐다.

[담마야! 이게 무슨 짓이냐! 설탕이 아니잖아!]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면서요? 시원하고 짭짤하게 쭉 들이켜고 나오세요.”

[아니, 담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금 소주라니!]

“아, 시끄러워요.”

담마는 현천이 든 소주병을 들고 현천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침대에 현천을 가둔 술병을 눕히고 이불과 베개로 덮어 버렸다.

[내가 못 나갈 줄 알고?]

몸을 부르르 떨어 소주병을 깨부수려고 하는 현천에게 담마가 협박하듯 속삭였다.

“깨고 나오시는 건 상관없는데 대신 침대랑 이불 더러워지는 건 알아서 책임지세요.”

[…….]

아니, 그럴 수가…….

방을 나오는 담마의 등 뒤로 현천의 난처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짜디짠 술을 흡수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소리도 들렸다. 뽀그르르르-.

현천을 침대에 가둔 담마는 조용한 거실에 홀로 서성였다. 너무 조용해서 불안이 다시 슬금 올라왔다.

TV를 틀면 적막은 사라지겠지만, 자신 때문에 삼촌이 저리되었는데 고작 적막을 이기지 못해서 TV를 틀 순 없었다.

“아, 마실 것이라도 갖다 드려야겠다.”

도화의 집에 도착한 묵범의 안색은 담마만큼이나 질려 있었다. 많이 놀랐을 테니 진정 효과가 있는 따뜻한 차가 좋을 것 같다.

담마는 녹차 티백을 넣은 머그컵에 꿀을 쏟아 붓듯 넣었다. 티스푼으로 한참을 저었지만, 꿀이 바닥에 가라앉았다.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의 단내가 나는 녹차를 들고 도화의 방으로 갔다. 혹시 중요한 무언가를 하고 있을지 몰라 아주 조용히 문을 연 담마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

담마가 본 것은 묵범이 도화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처럼 머리를 숙인 모습이었다. 도화의 손등에 기운을 불어넣듯 입술을 꾹 누른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담마는 도화의 손을 내려놓는 묵범과 눈이 마주쳤다. 묵범은 소리 없이 웃으며 이제 좀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여기 두고 갈게요. 마시세요.”

“도화 씨 땀 좀 닦아 주게 물수건 좀 가져다줄래?”

“제가 해도 되는데…….”

“아저씨가 돌볼 동안 넌 좀 쉬고 있어. 너도 많이 놀랐잖아?”

“……네.”

고개를 끄덕인 담마는 묵범의 심부름을 하러 방을 나왔다. 물그릇과 수건을 들고 다시 와 보니 묵범은 도화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고 있었다.

담마는 괜히 저 분위기를 깨기가 싫어서 열린 문틈 사이로 물그릇과 수건을 밀어 넣었다. 묵범은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현천이 말한 ‘묘하다.’는 건가? 손등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게 으른의 세계?’

여전히 담마는 현천이 말한 묵범과 도화 사이의 묘한 기류라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화를 만지는 묵범의 모습을 본 순간, 둘의 은밀한 사생활을 훔쳐보는 느낌이 들어 재빨리 도화의 침실에서 나왔다.

“후우….”

주방으로 간 담마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묵범이 도화를 걱정하는 모습을 본 것뿐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벌렁거리고 목이 탔다.

‘묵범 아저씨가 삼촌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 같긴 했는데…….’

침실 문을 완전히 닫기 전, 가느다란 문틈으로 본 마지막 장면은 묵범의 손이 도화의 얼굴에서 내려와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었다.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데.’

가끔 늦은 밤, 거실에 나가 보면 현천이 불이란 불은 다 꺼 놓고 드라마를 보곤 했다. 궁금해서 옆에 앉아 같이 보려고 하면 ‘어허! 어디 으른이 보는 걸 애가 보려고! 애들은 가라!’라고 말하며 담마를 쫓아내곤 했다.

그래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짧게 스치듯 보던 장면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입술을 부비고 있는 모습이었다. 살짝 스치듯 닿는 것도 있고 아주 잡아먹을 듯이 전투적으로 부비는 것도 있었다.

물론 저게 무슨 짓인지는 안다. 번식 또는 쾌락을 위한 행위. 그리고 대부분 성별은 남자와 여자로 짝지어지는데 같은 성별끼리 엮이는 경우도 많다.

‘그걸 묵범 아저씨가 우리 삼촌한테 하는 건가?’

담마는 괜히 두근대는 심장을 손으로 꼭 누르고 도화의 방을 힐끔 쳐다봤다. 어차피 거실에 아무도 없이 당당히 쳐다봐도 될 텐데. 이상하게 닫힌 문만 쳐다봐도 보면 안 될 것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손 다음에 이마, 볼이랑 입술이었지?’

묵범의 손이 닿았던 도화의 신체 부위를 떠올리다 문득 손대신 입술을 부비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러자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미, 미친 거 아냐?’

스스로 미쳤다고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은 담마는 싱크대로 달려가 머리를 숙이고 찬물을 틀었다.

[으잉? 여기서 뭐 하냐?]

술병째 방 밖으로 탈출한 현천은 싱크대에서 머리를 잔뜩 적히고 있는 담마를 불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도화도 정상이 아닌데 너까지 그러면 안 된다. 응?]

“제가 뭘요.”

[뭐긴. 멀쩡한 욕실 내버려 두고 싱크대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데 내가 걱정이 안 되게 생겼냐?]

“…….”

현천의 말이 맞다. 담마는 정말 괜찮냐는 현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젖은 머리를 수습했다.

소주병에서 탈출한 현천은 소금물 때문에 녹이 슬겠다며 싱크대에서 목욕을 했다. 그리고 도화의 상태를 봐야겠다며 침실로 향했다.

“아, 안 돼요!”

[에엥? 왜?]

“그러니까… 그게…….”

[?]

담마는 차마 저 방 안의 분위기가 매우 묘하고 후끈하고 간질거려서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방문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둘을 방해하는 것 같았는데. 현천을 들어가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묵범 아저씨가 사, 삼촌 기력이 너무 떨어진 것 같다고 확인 중이랬어요.”

[그래? 어디 어떻게 확인하는지 좀 봐야겠다.]

‘아, 진짜!’

도화에게 툭하면 구박받는 현천을 불쌍하게 여겼던 담마는 이제야 도화가 왜 구박을 했는지 이해됐다.

쓸데없는 오지랖에 고집불통인 현천을 항상 같이 다니니 그럴 만도 했다.

“맞다. 전에 산월관에서 보낸 술이 아직 몇 병 남았는데. 그거 드실래요?”

[오? 산월관 술이 아직 남았다고? 그거 좋지!]

현천의 관심을 술로 돌린 담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잠잠한 도화의 침실 문을 쳐다봤다.

‘묵범 아저씨가 삼촌한테 나쁜 짓을 할 린 없겠지.’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진 모르지만. 그냥 둘만 있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 * *

현천이 두 번째 술병을 깔끔하게 비웠을 때, 묵범이 방에서 나왔다.

“삼촌은 어때요?”

“꿈이 언제 끝날진 모르지만, 깨어나면 먹을 것을 만들어야겠다.”

“제가 준비할 게 있을까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어. 악몽이 좀 심한 듯하니 가서 이마에 수건 좀 갈아 주면 좋겠어.”

“네. 알았어요.”

“그러면 좀 이따 오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묵범의 발걸음은 담마의 연락을 받고 왔을 때보다 훨씬 안정되어 보였다. 아무래도 도화가 무사한 것을 확인해서인 듯했다.

“현천 아저씨는 그만 마시고 쉬세요. 저는 삼촌 좀 볼게요.”

[그려, 그려.]

맛 좋은 술을 만족스러울 만큼 포식한 현천은 텅 빈 술병 속에서 나오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 안에서 저대로 잠이 들 기세다.

담마는 묵범의 부탁대로 물수건을 갈고 도화의 옆에 앉아 책을 읽었다. 두 권 정도 읽었을 즈음. 묵범이 거대한 가마솥을 들고 나타났다.

묵범은 재등장과 동시에 산월관에서 온 사람이 거실 한쪽을 가득 채울 만큼 온갖 음식을 쌓아 두고 갔다.

다시 모인 셋은 도화가 깨어나길 마냥 기다렸다. 묵범이 도화의 집에 오면 항상 둘이 말싸움을 하고 현천과 담마는 관전했었다. 그런데 도화가 빠지니 너무 어색했다. 현천이야 묵범이 뭘 하든 도화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상관없어 했고 담마는 애초에 묵범과 친해질 계기가 없었다.

게다가 어제 그 모습을 봐 버린 뒤로 담마는 묵범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도 난감했다. 과연 삼촌의 얼굴을 손으로만 만졌을까? 드라마나 영화처럼 그런 것도 하지 않았을까?

도화가 담마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면 얘가 진짜 사춘기가 왔다고 할 정도로 담마는 방에서 묵범이 무슨 짓을 했는지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기에 그저 속으로만 애가 탈 뿐이었다.

그렇게 셋은 도화가 깨어날 때까지 어색한 삼각형처럼 거리를 두고 제 할 일을 했다.

* * *

도화를 선두로 시작된 면담은 하루에 한 명씩 진행되었다. 면담이 끝날 때마다 이번에는 무슨 질문을 했는지 정보 교류를 한 다음에 외근을 나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약 2주간의 면담은 무사히 완료되었다.

그리고 차사들이 그토록 원하던 회식 날이 되었다.

“크하하! 회식이다!”

산월관에 도착하자마자 이 차사가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그는 아직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도 꽐라가 된 것 같았다.

“이런.”

추혼부 차사들을 마중 나온 산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유 차사가 손칼로 이 차사의 목덜미를 세게 후려쳤다.

“억!”

이 차사가 단말마의 비명을 짧게 토하며 쓰러졌다. 유 차사는 여자인데도 남자인 이 차사를 한 팔로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요. 요즘 금연한다고 그러더니 담배를 끊은 게 아니라 정신 줄을 끊어 버렸나 봐요. 죄송합니다. 산월.”

혼절한 이 차사를 대신해서 유 차사가 산월에게 사과했다. 산월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눈매가 살풋 휘어진 것으로 보아 웃고 있는 듯했다.

“괜찮아요. 유 차사님이 먼저 나서 주셔서 오히려 감사한걸요? 행랑아범을 부르려던 참이었거든요.”

행랑아범이란 말에 유 차사가 난처하게 웃었다.

“그러면 회식 장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산월이 안내한 장소는 도화의 신입 차사 환영회를 했던 청운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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