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묵범의 말에 도화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게 지금 누굴 놀리나? 안 그래도 사기 사건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당사자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묵범의 인성이 의심되었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그렇게 하냐고 따지려던 도화의 말은 갑자기 끼어든 담마에 의해 끝맺지 못했다.
빡! 소리와 함께 묵범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윽….”
“?”
담마의 발끝이 묵범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찍어 버렸다. 퍽! 도 아니고 빡! 소리가 부서에 울릴 정도였으니 묵범이 아파하는 건 당연했다.
“한 번만 더 그 일을 입에 올리면 다음엔 종아리가 아니라 다리 사이일 줄 아세요.”
담마의 살벌한 경고에 묵범이 재빨리 머리를 끄덕였다. 저 강도로 다리 사이를 강타하면 남자의 소중한 그것이 멀쩡할 리 없었다.
순간, 도화도 움찔했다. 담마의 눈빛이 ‘지금 맛보기로 한번 차 줄까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목표물은 묵범이었지만, 같은 남자로서 묵범이 지금 느낄 위협이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홍도화 씨. 일이 밀렸습니다. 빨리 외근하러 가죠.”
“어, 어. 그래야지. 일해야지.”
도화와 묵범은 담마에게서 도망치듯 부서를 나왔다.
“진짜. 애도 아니고.”
부리나케 멀어지는 두 남자를 보며 담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피식, 소리 없이 웃었다. 묵범이야 항상 자신과 제 삼촌에게는 말랑한 모습만 보여 주니 저런 반응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삼촌이 저러는 건 처음 본다.
‘거기를 맞으면 그렇게 아픈가?
게임에서 남자 길드원들과 대화를 나누다 알게 된 정보였다. 거길 맞으면 그냥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느낀대서 한번 운만 띄워 본 건데 저렇게 질색할 줄이야.
‘나야 남자가 아니니 알 수 없지. 뭐.’
담마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부장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일이 수월하길 바라며.
* * *
도화가 몽식에게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잠이 든 날 밤.
현천은 도화가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눕기만 해도 드르렁 코를 고는 현천이 늦은 밤까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몽식과의 거래는 위험했다.
‘정말 겁이 없어도 너무 없단 말이야.’
도깨비가 워낙 겁이 없는 귀물이긴 하나 그래도 누울 자리는 보고 눕던데. 저놈의 절반은 대체 무엇과 섞여서 저리 겁이 없을꼬.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운 현천은 날이 밝자마자 도화의 방으로 갔다.
[아직 자냐?]
똑똑 노크를 여러 번 해도 안에서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한 현천은 문손잡이를 돌렸다. 손이 없는 현천을 위해서 둥근 손잡이가 아닌 길쭉한 막대 형태의 손잡이였다.
[잘만 자고 있군.]
예상대로 도화는 옆에서 난리 굿을 쳐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의 예민한 도화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집이라 다행이었지.]
몽식이 위험한 귀물인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대가를 치르는 방식이었다.
몽식이 악몽을 먹는 밤이 찾아오면 지금의 도화처럼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몽식은 워낙 변덕스러워서 대가를 당장 받아 가는 경우도 있고 날짜를 정할 때도 있으며 한참 지난 후에 받으러 올 때도 있다. 문제는 날짜를 정한 경우 외에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잠이 들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만약, 적이 많은 자가 적과 대치 중에 몽식의 밤을 맞이한다면?
악몽은 악몽대로 꾸다 저승 차사까지 만나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날짜를 정하는 것도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몽식더러 왜 변덕이 심하다고 하겠는가. 몽식은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은 칼같이 받지만, 그 외에는 제 기분에 따라 지킬지 말지 제멋대로 정하는 귀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화와 친분이 있던 몽식은 약속한 날짜도 지키고 오히려 도화의 컨디션까지 챙겨 주기까지 했다.
[이래서 인간들이 연줄, 연줄 하는구만.]
현천은 노래하듯 혈연, 지연, 학연을 흥얼거리며 도화에게 다가갔다.
[어이. 홍도화야. 몽식이 무슨 악몽을 꾸게 하길래 이렇게 죽은 듯이 잠을…… 으잉?]
잠이 든 도화의 얼굴 위로 날아간 현천은 도화의 호흡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이, 이 녀석이? 숨을 왜 이렇게 쉬어? 어이, 홍도화?]
검 손잡이로 도화의 볼을 콕콕 찔렀으나 몽식의 악몽에 잠식된 도화는 깨어날 리 없었다.
[원래… 이랬나?]
몽식이 악몽을 포식할 때 악몽의 주인이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고 전해 들은 게 전부라 현천은 죽은 듯이 누워있는 도화가 걱정이 되었다.
[주, 죽었나?]
이불을 들치고 가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안 움직이는데?]
이번에는 코 밑에 바짝 다가갔다. 그러자 아주 옅은 숨이 현천의 몸을 간지럽혔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안심한 것도 잠시.
[이거 이러다 죽는 거 아녀?]
절대 정상적인 호흡이라고는 볼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한 현천은 냅다 담마의 방으로 날아갔다.
[아이고~ 담마야! 큰일 났다! 담마야!]
“?!”
현천의 외침에 깜짝 놀란 담마가 방에서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네 삼촌이…! 도화 저 녀석이!]
“삼촌이요?!”
현천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도화 이름만 부르자 답답한 담마는 현천을 제치고 도화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삼촌!!!”
처음 방에 들어갔을 때는 ‘뭐가 문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처럼 잘 정돈된 방, 그리고 그림처럼 똑바로 누워 잠든 도화. 이상할 게 없었다.
“삼촌 자는데요?”
[숨을 잘 안 쉰다.]
“숨?”
현천의 말에 담마는 도화의 가슴부터 확인했다. 너무 천천히, 얕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서 손가락을 코 밑에 가져다 댔다. 뜨끈한 숨이 손가락에 닿긴 했지만, 이것 역시 너무 느리고 가늘었다. 현천이 왜 놀라서 자신을 불렀는지 이해했다.
“삼촌! 일어나 봐요! 삼촌!?”
담마는 도화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도화는 담마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으나 작은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몽식 때문인가요? 오늘 대가를 지불한다고 했잖아요.”
[그래. 몽식 때문이다.]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요? 꿈에서 깨면 끝나는 거 아닌가요?”
[몽식이 왜 위험한 귀물이라고 다들 멀리하는 것이겠냐. 변덕스러움이 하늘을 찌를 정도라 그렇다. 악몽만 꾸게 할지, 악몽을 꾸게 하다 죽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헉…!”
죽인다는 말에 놀란 담마는 갑자기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으로 묵범에게 연락했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묵범이 도화의 집으로 왔다.
“홍도화 씨 상태가 어떻다는 겁니까?”
편안하게 쉬고 있던 묵범은 담마의 다급한 전화에 살살 녹여 먹고 있던 사탕이 목에 걸릴 뻔했다.
홍도화가 요즘 저 몰래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 눈치채고는 있었다. 무얼 하는지 알아내고 싶었지만,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질색을 하니 적당히 거리를 두고 주시하던 차였다.
‘하지만, 딱히 수상한 건 없었는데?’
끽해야 퇴근 후, 아파트 산책로를 홀로 걷는 게 전부였다. 한두 번 정도?
그래서 도방 선생 때 하던 일을 조금씩 다시 시작하는 중이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군.’
질색하더라도 밀착 감시를 할 것을.
후회해 봤자 늦어 버린 것 같다. 묵범은 죽은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도화의 얼굴을 보고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또 이런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오창석의 시신으로 관상을 봤을 때는 체온이 정말 시신처럼 뚝 떨어졌던지라 그때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몽식 때문이라고?”
“네. 저 때문에 삼촌이 몽식과 거래를 했는데…….”
담마는 자신이 게임에서 사기를 당했던 일과 도화가 사기당한 아이템을 돌려받기 위해 몽식과 거래한 일. 그리고 오늘이 몽식에게 악몽을 대가로 지불하는 날임을 알렸다.
“하필이면 몽식이라니.”
묵범의 긴 한숨에 담마가 움찔했다. 그녀는 죄인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일어나. 네 잘못이 아니니까.”
“저 때문이에요. 괜히 게임을 하고 사기를 당해서…. 아니, 삼촌한테 말만 안 했어도.”
“잘못은 네게 사기 친 그 인간 놈이 한 게 잘못이지. 넌 피해자야. 그리고 일어나. 네 삼촌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
삼촌을 들먹이며 일어나라고 말하자 담마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침대나 의자에 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어나긴 했으나 여전히 제 잘못인 것 같아서였다.
[이보게. 묵범. 뭐 어찌 안 되겠나?]
현천이 묵범에게 물었다.
“이건… 거래이기 때문에 저라도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떡해요? 우리 삼촌… 큰일 나는 건 아니죠?”
담마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묵범이라면 무슨 방법이 있을 거라 믿었는데. 방법이 없다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현천도 크게 실망했는지 둥둥 떠 있다 아래로 뚝 떨어졌다.
“몽식이 홍도화 씨에게 호의적이었다는 것에 희망을 가져 봅시다. 변덕스럽지만, 본인이 인정한 사람에 한해서는 후한 귀물이니까요.”
[그건 걱정 말게. 몽식은 가끔 특식이 먹고 싶을 땐 도화에게 찾아오곤 했거든.]
“다행입니다. 특식 제공자인 홍도화 씨를 해하진 않을 테니까요.”
묵범의 말에 담마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쩡한 사람에게 특식 제공자라는 호칭은 거부감이 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몽식이 삼촌을 해하진 않을 거란 게 중요했다.
“후우…….”
묵범은 이마에 맺힌 진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도화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말이지…. 사람 놀래키는 재주는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군요. 홍도화 씨.”
그는 도화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놀라서 쿵쾅대던 심장도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는 이상 완전히 안심하긴 일렀다.
“…….”
[흠.]
담마와 현천은 묘한 눈빛으로 도화를 내려다보는 묵범을 보고는 슬쩍 방에서 나왔다.
방금까지 도화에게 큰일이 났다고 난리 법석을 떨 땐 언제고, 묵범이 곁에 있단 이유 하나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한시름 놓았어요.”
[그러게 말이다. 떼잉, 못난 녀석 같으니라고. 쯧.]
“그러지 마세요. 저 때문인 거니까.”
[얼씨구? 아까부터 네 탓이라고 삽질을 오지게 하고 있는데, 자꾸 그러면 볼기짝에 불이 나도록 때려준다?]
“하지만…….”
그래도 나 때문이라고 말하려던 담마는 ‘볼기에 불이 나게’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엉덩이를 맞긴 싫었다.
[그나저나… 둘이 붙어있으면 참 묘한 기류가 흐른단 말이야.]
“뭐가요?”
[쯧쯧. 애송이는 가서 잠이나 자. 으디 으른의 세계를 알려고 그래.]
“…….”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