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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94화 (95/146)

94화

어린 도화는 호윤을 찾다 찾다 체력이 고갈되어 쓰러졌다. 그 모습은 동영상을 일시정지 한 것처럼 그대로 멈췄다.

[이런. 겨우 이 정도 가지고 흔들리면 쓰나.]

지켜보던 도화의 옆으로 몽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몽식은 두툼한 발로 도화의 머리를 툭 쳤다.

‘몽식?’

[이제 정신이 돌아왔군.]

‘아…….’

[쯧쯧.]

몽식이 혀를 차며 길쭉한 코로 도화의 등을 밀었다. 몽식에게 밀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니 온통 축축한 산속이었던 주변이 천천히 물에 씻겨 내려가듯 지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았네. 하지만, 이건 내 선심 써서 자네 의식과 꿈을 분리해 주도록 하지.]

‘…고맙습니다.’

[고맙긴. 분리해도 악몽은 악몽. 기분은 그리 좋지 않을 것이야.]

‘동화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몽마는 도화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완전히 녹아내린 주변은 새로운 악몽을 만들어 냈다.

우르릉—.

멀리서 하늘이 성내는 소리가 들렸다. 한여름 밤의 숲. 장마철이라 해도 과히 내리는 비. 그리고 멀다가도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천둥소리.

‘설마.’

호윤을 찾던 악몽과 달리 완전히 의식이 분리된 상황이지만,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에 도화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눈을 한 번 깜빡이니 순식간에 좁은 당집에 갇힌 어린 도화의 몸이 되어 버렸다.

‘무슨?’

네 가지 악몽을 꾸는 내내 제삼자가 되어 관찰하던 도화였다. 그런데 이번 꿈은 어린 도화가 되어 버렸다.

당황한 도화가 몽식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으나 몽식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몽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식은 분리해 주었으니 된 것 아닌가?]

‘…….’

[아니면 의식까지 합쳐 주리?]

‘아닙니다.’

큰일 날 소리.

도화는 머리를 마구 흔들며 아니라고 거절했다. 이에 몽식이 낮게 웃었다.

‘잊을 만하면 꾸던 꿈이야. 겁낼 필요 없어.’

덜덜 떨리는 몸을 양팔로 꼭 끌어안으며 도화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때였다.

“여기 숨어 있으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장대비와 무거운 공기를 뚫고 도화의 귀에 똑똑하게 들렸다.

이제 곧 산의 어둠을 순간적으로 몰아낼 번개가 내리꽂힐 것이다. 그 잠깐의 순간, 도화는 제 스승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도화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새파란 빛이 산의 어둠을 갈가리 찢듯 터트렸다.

번쩍!!!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환한 빛이 터졌다. 평소의 악몽대로라면 도화의 시선은 죽어 가는 스승의 얼굴에 고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도화는 스승의 얼굴이 아닌 스승을 죽인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뒷모습뿐이겠지만.’

악몽이 왜 악몽이겠는가. 꿈이지만, 꿈인 줄 모르고 몰입하기에 악몽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 살인범의 단서를 찾아낼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오늘 이후로도 이 악몽은 쭉 꾸겠지만, 오늘처럼 의식이 완전히 분리된 꿈은 아닐 테니까.

게다가 몽식은 대가가 없으면 절대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대가도 본인이 원하는 것만 받는다.

이번 일은 그저 몽식이 도화의 악몽이 먹고 싶었기에 성사될 수 있던 거래였다.

그래서 도화는 시린 눈을 부릅뜨고 최대한 남자의 모습을 기억에 남기려고 노력했다.

‘머리는 산발. 무기는 장검. 검이 붉은 것은 피 때문인 건가?’

어린 도화가 스승님! 스승님! 하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동안 어른 도화는 살인범의 정보를 뇌에 각인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스승의 마지막이 아닌 살인범에게 집중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스승님은 이해해 주시겠지.

제자의 잘못이라면 뭐든 용서해 주셨으니까.

하늘이 일부러 내리꽂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독한 천둥 번개가 지나간 뒤, 범인이 사라지고 검은 옷의 남자가 나타났다.

‘저자의 정보도 모아야 해.’

검은 옷의 남자는 뒷짐을 지고서 쓰러진 스승 주변을 천천히 맴돌았다. 지금 보니 남자의 옷은 저승 차사가 입는 도포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색은 똑같이 검었지만, 도포를 여민 술띠가 눈에 들어왔다. 왜 온통 검게만 보였는지 알 만했다. 술띠와 술띠에 달린 둥근 장신구 또한 검었기 때문이었다.

‘연화문 장식?’

도화가 술띠를 자세히 눈에 각인하는 동안 남자는 스승에게 말을 걸었다.

“악연을 만든 것은 자네이니 이리 죽은 것을 원망 말게. 곧 차사들이 올 걸세. 어디 도망갈 생각은 하들 말어.”

차사들이 온다는 말인즉슨, 저 남자 또한 저승 차사라는 의미. 차사가 아니어도 어쨌든 차사국 관련자라는 것은 틀림없다.

[이제 끝이군.]

말없이 지켜보던 몽식이 도화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를 좀 더 눈에 담고 싶었으나 몽식의 형태 없는 검은 연기가 도화의 시야를 가렸다.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제 악몽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아암. 마음에 들다마다. 질도 양도 아주 상급이라 한동안은 허기지진 않을 듯하군.]

몽식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두툼한 발로 도화의 이마를 꾹 눌렀다. 그러자 방금까지 또렷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잠 보따리에 풍덩 빠진 느낌이다. 분명 꿈이건만 꿈속에서 잠이 드는 경험은 기이했다.

[깨면 한동안 아플 것이야. 그래도 마지막 꿈은 내 선심 썼으니 출근엔 문제없을 거라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끝으로 도화의 의식은 깊은 잠에 빠졌다.

* * *

“삼촌!”

[이봐! 홍도화!]

담마와 현천의 부름에 귀가 윙윙 울린다.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솟구친 것 같았다. 자신을 부르는 둘의 목소리가 고막을 마구 찌르는 느낌이다.

“으… 그만…….”

그만 좀 부르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이 완전히 잠겨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담마가 어서 깨어나라고 몸을 흔드는 통에 천장이 빙빙 돌고 있었다. 눈도 크게 못 떠서 가늘어진 시야로 창백하게 질린 담마의 얼굴이 보였다.

‘왜 저러지?’

몽식이 악몽을 가져갈 때는 바로 옆에 폭탄이 터져도 깨어날 수 없다. 게다가 꿈을 연달아 다섯 개나 꾸었으니 평소 일어나는 시간을 훌쩍 넘겼을 테고. 담마가 걱정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하지만, 저렇게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걱정할 일은 아닐 텐데. 도화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단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으……!”

뭐지?

몸을 한쪽으로 돌려 일어나려고 했는데 몸이 돌아가긴커녕 양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만 안 들어가는 게 아니라 코끼리에 잘근잘근 밟힌 것처럼 전신이 아팠다.

“삼촌!”

[야이, 멍청아! 가만히 누워 있어!]

“?”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다시 일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전신을 달리는 통증, 늘어지는 몸, 꽉 잠겨 나오지 않는 목소리.

“삼촌. 정신 차렸으니까 됐어요. 일어날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 그냥 누워서 쉬세요.”

“이ㄱ…….”

목에 힘을 주니 날카로운 가시를 삼킨 것처럼 아프다. 그나마 눈은 제대로 뜬 도화는 눈동자를 굴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물었다.

[눈알 운동하냐?]

“…….”

현천은 도화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헛소리를 뱉었다. 도화 역시 현천이 이럴 줄 알았기에 현천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다행히 눈치 빠른 담마는 도화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바로 파악했다.

“삼촌. 어제 일찍 잔다고 누웠잖아요.”

고개도 끄덕이기 힘들어서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눈에 뭐 들어갔냐? 왜 그렇게 깜빡여? 호 불어 주랴?]

“…….”

도화는 대답 대신 현천을 노려보았다. 도화와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현천이었지만, 지금 도화의 시선에 담긴 살기는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생존본능이었다.

[다… 닥치고 있으마.]

현천이 더는 헛소리를 하지 않자 담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도화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 현천 때문에 더 악화되면 안 되었다.

“지금 8시예요.”

‘아침 8시?’

평소보다 살짝 늦긴 해도 출근 안 하는 주말인 것을 생각하면 꽤 이른 시간 아닌가?

잔뜩 주름 잡혔던 도화의 미간이 살짝 풀어졌다. 그러나 이어진 담마의 부연 설명에 주름이 아까보다 더욱 깊게 파였다.

“저녁 8시요.”

‘저녁…….’

“삼촌 오늘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잠만 잤다고요.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고. 현천이 손가락을 찔러도 미동도 없고…….”

담마의 눈이 글썽거린다 싶더니 눈물이 고일 새도 없이 후두둑 떨어졌다. 당황한 현천이 재빨리 티슈 박스로 날아갔다. 검날에 푹 꿰인 티슈 박스를 받아 든 담마는 눈물을 닦았지만, 눈물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괜…차…….”

괜찮다고 안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짜려는데.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두 번씩 연달아 눌린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다. 자신의 몸 상태와 담마의 눈물, 그리고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잠 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도화였지만, 벨을 누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떠올랐다.

두 번씩 벨을 누르는 사람은 묵범밖에 없다. 어차피 집에 찾아올 사람도 묵범뿐이지만.

“잠시만요. 문 좀 열어 주고 올게요.”

담마가 빠른 걸음으로 도화의 침실에서 나갔다. 도화는 일어나려던 것을 포기하고 몸에 힘을 쭉 뺐다. 괜히 움직이려다 더 녹초가 되는 것보단 그냥 쉬는 게 나았다.

현천은 그런 도화의 옆을 지켰다. 눈빛으로 한 소리 먹어서 입은 열지 않았지만, 옆에 동동 떠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도화를 걱정했다는 게 느껴졌다.

“홍도화 씨!”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묵범이 도화의 침실에 들이닥쳤다. 한껏 눈썹을 찌푸려도 잘생긴 놈은 빛이 나는구나. 도화는 멍하니 제게 달려오는 묵범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무…ㄱ…ㅂ….”

“됐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도화는 아까 하던 대로 눈을 깜빡였다. 묵범은 도화의 대답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몽식 때문입니까?”

‘그걸 어떻게?’

도화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자 담마와 현천이 크흠, 흠! 하고 괜한 소리를 냈다.

“담마와 현천에게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담마의 일을 해결하느라 몽식과 거래를 했다지요?”

끄덕.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질문하는 묵범의 표정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몽식이 얼마나 위험한 귀물인데 무슨 배짱으로 거래를 한 겁니까!”

묵범의 호통에 도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식이, 내가 아파서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니 막 대하는 건가?

자신을 걱정해서 온 줄 알고 조금은 고마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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