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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93화 (94/146)

93화

‘시작된 건가?’

양을 세다 잠이 든 것 같은데, 사방이 온통 검은색인 것을 보면 몽식이 부른 악몽이 시작되었나 보다.

하지만, 첫 시작은 이상하게도 악몽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었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쿵, 쿵.

밖에서 내부로 충격이 들이닥쳤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안으로 들어오다 사그라들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난리지? 여긴 편안한데.’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른다. 그저 따뜻하고 부드럽고 아늑하다는 것만 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평생을 여기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어찌나 편안한지 악몽 같지 않았다.

‘나가면 나쁜 일만 생길 것 같아.’

겁이 많은 걸까. 아니면 본능이 경고를 하는 걸까. 이것 역시 모르겠다. 어쨌든 나가기 싫으니 밖의 소란스러움은 호기심을 일으키기보다 짜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짜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이어진 거대한 충격으로 의식이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 * *

가뭄이란 모두를 지치게 했다. 마실 물은 말라 버린 지 오래, 물만 말랐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것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깊은 땅속까지 황폐하게 만들어 나무란 나무는 모두 말라비틀어졌다.

“모두 저 괴이한 것 때문이다!”

도화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은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호윤과 함께 지낼 때도 핍박을 받았고 스승과 지낼 때도 그러했다.

호윤과 스승의 유무에 따라 핍박을 견디는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유년 시절뿐 아니라 인간이 귀물을 믿지 않는 세상이 올 때까지 줄곧 그러했다.

‘이때가 언제더라?’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대충 호윤을 만나기 전 시절인 것 같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해서 왜 배척받는지 모르고 심신이 너덜대던 시절이었다.

인간은.

인간이나 귀물이나.

아니, 모든 생각할 줄 아는 것들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이유를 찾는다.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뭐라도 이유가 될 만한 것을 만들려고 한다.

대부분 개인 또는 소수의 사람이 어거지로 만들어진 이유에 피해를 본다. 그리고 도화는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만들어진 이유가 되었다.

비단 한 마을뿐이 아니다. 핍박을 피해 도망친 마을마다 그랬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랬다.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가 미움을 사는 게 아닐까 싶던 시기였다.

자신이 왜 저들에게 배척받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아는 게 없다. 부모가 없어서라기엔 전쟁이나 전염병, 자연재해 등으로 부모 잃은 아이가 발에 챌 정도일 때도 그러했다.

생긴 것이 달라서도 아니다. 오히려 씻으면 양반집 규수보다 훨씬 희고 고운 피부에 단아한 이목구비가 빛이 났다.

성장 속도가 기이할 정도로 느렸지만, 그것 역시 이유가 되지 못했다. 1년에 몇 번이고 마을을 옮겨 다닌 통에 도화의 성장을 제대로 지켜본 이는 없었으니까.

퍽! 소리와 함께 주먹만 한 돌멩이가 어린 도화에게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머리를 감쌌다. 다행히 머리는 맞지 않았지만, 어깨가 우릿하게 아팠다.

“가뭄이 든 건 다 저 귀물 때문이다!”

“흉작을 부르는 귀물!”

“당장 우리 마을에서 꺼지지 못해?!”

한 명이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어린 도화에게 돌팔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돌은 몸을 상처입혔고 당장 죽여 버려야 한다는 고함은 마음을 상처입혔다.

‘저땐 진짜 작았구나.’

최대한 돌을 피하려고 웅크려 앉았으나 날아든 돌이 한두 개가 아닌지라 작은 몸뚱이에 금세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인정이라곤 모래알만큼도 없는 인간들이었지.’

도화는 제삼자가 되어 어릴 적 제 모습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구름 한 점 없이 쨍쨍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근처 어딘가에서 몽식이 이 상황을 모두 관망하고 있을 터.

악몽을 먹는 몽식이니 당연히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꿈으로 불러들일 것은 예상하고 있던 바다.

하지만, 순식간에 계절이 가을로 바뀌는 것을 보고는 쯧, 혀를 찼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긴 악몽을 꾸게 하려고 이러는 겁니까?’

벌써 세 번째 꿈이다. 그래도 두 번째까지는 별 타격이 없으니 세 번째도 그러하길 바라는 수밖에.

‘가을이라. 가을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중 그나마 가장 무난했던 계절은 가을이다. 그러나 약 600번의 가을을 지내는 동안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지내게 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야, 이것 봐라? 식량을 야무지게 숨겨 놨는걸?”

당연히 새로이 시작된 꿈은 몽식이 원하는 악몽답게 도화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식량을 약탈당하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지금 이 상황이 정확히 언제의 기억인지까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푸하하! 다람쥐냐? 도토리만 잔뜩이잖아?”

“다람쥐가 서운하겠다. 비교할 게 없어서 저딴 괴물 새끼랑 비교하냐?”

“하긴. 다람쥔 귀엽기나 하지.”

겨울을 나기 위해 모은 식량이었다. 여름과 가을에 아무리 먹을 것이 풍부하다 한들 겨우내 쟁여 둬도 상하지 않는 식량은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농사를 지을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식도 없는 도화는 떨어진 도토리나 잣을 줍는 게 다였다.

누가 훔쳐 갈까 꽤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 땅속에 숨겨 두었는데 자신을 괴롭히던 인간 아이들에게 뒤를 밟혔었다.

“야, 다 태워 버려.”

“불이 어딨다고.”

“피우면 되잖아. 아버지 부싯돌 가져왔어.”

심술이 그득한 남자아이가 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보였다. 그제야 도화는 이날이 그 날임을 떠올렸다.

저들이 낸 불에 건조한 가을 산이 홀랑 타 버렸었다. 하필 바람이 심술 맞게 불어 민가까지 번졌다. 재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도 많이 불타 죽었다.

그리고 모든 원망은 식량을 뺏겼을 뿐인 도화에게 향했다.

“네놈이 우리 마을에 오지 않았다면!”

“너 때문에 내 자식이 둘이나 죽었다!!”

“아버지를 돌려내!!”

한 걸음 물러나 지켜보던 도화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이었지만, 다시 맞닥트리니 아문 상처가 벌어진 느낌이 들었다.

부싯돌로 불을 낸 아이들은 저들이 낸 산불을 피하지 못하고 타 죽었다. 물론 어린 도화도 몸 여기저기 지독한 화상을 입었다.

어딜 봐도 도화는 피해자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삶을 망친 지독한 귀물일 뿐이었다. 자신의 가족은 죽었으나 도화는 죽지 않았으니 저들의 원망이 더욱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네가 죽었어야지! 왜 내 아들이 죽은 건데!”

그야 네 아들이 불을 질렀으니까.

지금 같으면 이렇게 되받아쳤겠지만, 저 때는 인간들의 칼을 문 저주와도 같은 외침에 정신이 난도질당했던 때다. 받아치긴커녕 ‘정말 나 때문에 죽었구나.’라고 자책하던 시기였다.

마을 사람들의 폭행이 이어졌다. 당연히 도화를 죽일 목적이었다. 또다시 조그만 몸 위로 무차별적인 폭력이 쏟아졌다. 주먹과 발길질에 어린 도화의 화상 입은 피부가 더욱 처참해졌다.

그럼에도 도화는 살아남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을 사람들은 너도 똑같이 타 죽으라고 아직 활활 타오르는 산에 도화를 던져 버렸다.

‘맞아. 저 때 깨달았었지.’

자신이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저 날은 살면서 처음으로 광범위한 상처를 입은 날이기도 했다. 그 덕에 도화는 제 자체 치유 속도가 절대 인간에겐 나올 수 없는 빠르기라는 것도 깨달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간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산에서만 지냈고 민가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또다시 계절이 바뀌었다. 네 번째 악몽을 알리는 변화였다.

‘도대체 악몽을 얼마나 포식하려고…….’

적당히 먹으면 좋으련만.

일요일은 통으로 쉬라는 몽식의 말을 생각해 보면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내내 꿈을 꿀 각오를 하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과유불급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몽식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인지 그는 계절마다 도화의 각기 다른 나쁜 기억을 끄집어냈다. 어찌나 획획 바뀌는지 몽식의 배가 터지진 않았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어느새 어린 도화의 키가 쑥 올라올 정도의 시점으로 바뀌었다. 계절은 더위와 습도로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이었다.

도화는 무성하게 웃자란 풀과 덩굴로 뒤덮인 산을 마구 달렸다. 위로 오르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다. 목표 위치를 정하고 다니는 모습은 아니었다.

‘쯧.’

아래로 마구 내달리던 어린 자신이 덩굴에 걸려 사정없이 바닥에 처박히는 꼴을 본 도화가 혀를 찼다. 그리고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바로 기억해 내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실체가 없으니 입술을 씹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때의 불안이 그대로 옮겨올 것 같아서였다.

호윤아, 호윤아!!!

하필 넘어져도 진흙탕 위로 넘어졌다. 입 안으로까지 진흙이 흘러들었지만, 제대로 뱉어 낼 생각도 못 하고 호윤의 이름만 애타게 불렀다.

저 모습을 호윤이 봤다면 칠칠맞은 게 또 칠칠맞은 짓을 했다며 타박했을 테지만. 도화가 저리 정신을 반쯤 빼놓고 산을 헤집고 다니는 이유는 호윤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라 불가능했다.

어디로 간 거야!! 호윤!!

도화의 외침에 호윤이 아닌 하늘이 대신 대답하듯 우렁거렸다. 어제도 그리 비가 내렸건만, 또 비를 퍼부을 작정인가 보다.

후두둑,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뛰느라 잔뜩 열이 오른 몸 위를 차가운 빗방울이 매섭게 때렸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라지만, 이런 비를 장시간 맞으면 탈이 날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도화는 사라진 호윤을 애타게 부르며 날이 저물고 해가 완전히 저 너머로 넘어갈 때까지 찾고 또 찾았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서 찾았고, 달빛마저 구름에 사라졌을 땐 허겁지겁 반딧불이를 잡아 시야를 밝혔다.

‘호윤…….’

결국은 못 찾는다. 같이 지내던 산을 샅샅이 뒤지고 주변 산도 뒤지고, 마을까지 내려갔다. 사람들에게 온갖 폭력을 당하면서도 찾았으나 결국은 못 찾았다.

결말을 알지만, 도화는 미친 듯이 호윤을 찾는 과거 속 어린 자신에게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제삼자가 되었으니 혹시 저 때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지 않을까 싶어 눈에 힘을 주고 호윤의 흔적을 찾았다.

‘젠장. 젠장…!!’

악몽이 왜 악몽이겠는가.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이 펼쳐지니 악몽이다. 결국은 호윤을 찾지 못했던 끔찍한 기억이 생생하게 펼쳐지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경계선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호윤과의 예기치 못한 이별은 스승의 사망을 두 눈으로 지켜봤던 것만큼이나 참담했던 기억이라 도화의 정신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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