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새삼, 저놈이 단것에 환장한 게으른 변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돈도 많은 놈이니 디저트 제공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뭘 그리 생각해? 너도 실적 올리고 싶어서?]
[돈 벌어서 나쁠 건 없잖아.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 놔야지.]
[맞는 말이긴 하다만. 묵범, 저자는 실적에 전혀 연연해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래서 저 자식을 움직이게 할 만한 조건을 생각 중이야.]
[뭘 그리 고민해?]
[?]
현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도화는 그게 뭔지 말하라고 닦달했다. 그러자 현천은 당연하단 듯이 말했다.
[저 자식. 네 몸, 좋아하잖아.]
“무—!!”
헙!
하마터면 육성으로 크게 소리 지를 뻔했다. 도화는 다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현천에게만 들리게 소리쳤다.
[뭐!?]
[왜 그렇게 놀라?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
당연하단 듯이 되묻는 말에 도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부분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건만. 현천 때문에 모두 허사가 되어 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사도 없이 네 허리며 엉덩이며—.]
[좀 닥쳐.]
[헛.]
도화의 목소리가 현천을 땅에 묻어 버릴 정도로 낮게 깔렸다. 안다. 잘 알고 있어서 문제다. 묵범과 함께 있으면 그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는지 너무나도 잘 느끼고 있다. 아니, 느끼기 싫다. 하지만, 하도 묵범의 시선을 신경 써서 그런가 그가 쳐다보는 게 느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최대한 몸을 가리는 옷을 입었다.
[차라리 실적을 포기하겠어.]
생각해 보니 실적을 올리려면 추가 근무를 해야 할 텐데. 붙어 다니는 동안 또 묵범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버텨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잘 생각했다. 담마를 생각해서라도 집에 좀 붙어 있어라.]
[그래야지.]
안 그래도 자신보다 강림 도령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담마다. 어렸던 자신의 과거와 겹쳐 보여 거둔 아이인 만큼, 자신이 어릴 적 필요로 했던 것들을 채워 주고 싶었다. 그중 하나가 가족이라는 울타리였다.
짧지만, 스승님이 해 주었던 그 역할을 자신이 담마에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실적 욕심에서 도화를 벗어나게 해 주었다.
‘한동안 쓸 돈은 충분히 벌어 놨으니까. 조급해할 필욘 없지.’
실적 수당을 놓치는 것은 아깝지만, 그만큼 아끼면 된다. 도화는 욕심을 내려놓고 묵범에게 다가갔다. 그의 근처에 몰려 있던 차사들이 하나둘 흩어지는 것을 보니 면담 순번 정하기는 대충 마무리가 된 듯했다.
“아, 홍도화 씨.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습니다.”
“몇 번짼데?”
묵범은 도화에게 들고 있던 달력을 내밀었다. 달력에는 면담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처음만 아니면 되는데.’
제일 마지막이면 좋겠지만, 그건 욕심이니 중간 정도만 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달력에는 도화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첫 번쨉니다.”
“……뭐?”
“애석하게도 홍도화 씨가 첫번째 면담자로 일정이 잡혔습니다.”
설마 했던 게 현실이 되었다. 그래도 신입이니까 어느 정도 봐줄 줄 알았는데.
“하하…. 다른 건 몰라도 부장님 면접은 우리도 좀… 그래.”
“미안하게 됐어요. 홍 차사.”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잖나. 눈 꼭 감고 제일 먼저 해치워 버려.”
그걸 말이라고…….
차사들의 응원과 격려는 도화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묵범은 도화가 들고 있던 달력에 빨간 펜으로 별 표시를 하며 말했다.
“다음주 월요일이 홍도화 씨의 면담 날입니다.”
“…….”
도화가 아무 대꾸 없이 달력 속 별표만 쳐다보자 다른 차사들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다 어서 일을 해야겠다며 하나둘, 추혼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추혼부에는 도화와 묵범, 그리고 부장실에 있는 이름 모를 부장만 남게 되었다.
“우리도 이제 나가 볼까요? 오늘은 잔챙이만 잡는 거라 금방 끝날 겁니다.”
부장의 등장에 오전부터 피곤한 차에 반가운 소식이다. 도화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빠르게 부서를 나섰다.
* * *
“여어. 서류는 다 봤냐?”
강림 도령은 술 창고로 찾아온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방문자는 추혼부 부장 청우였다.
“다 봤을 것 같나?”
“하긴. 1년 치 서류가 밀린 건데. 까치 잡으러 가기 전까지 끝내려면 매일 야근이겠는걸?”
“…….”
맞은편 의자에 앉은 청우는 강림 도령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인상을 썼다.
“내 비서 좀 빌려 줄까?”
“비서? 너한테 비서가 있다고?”
“이번에 아주 유능한 녀석으로 뽑았지.”
“네가 쓰려고 뽑은 비서를 내가 왜 써.”
“그야, 한동안은 나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 비서는 필요 없거든.”
“흠.”
청우는 빙글빙글 웃는 강림 도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앳된 얼굴에 드러난 장난기 때문에 강림 도령의 말은 항상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일은 안 하고 술만 마시는 모습을 보여 주니 차사국 내에서 제일가는 월급 루팡을 뽑으라면 무조건 강림 도령이 뽑혔다.
그래서 강림 도령이 비서를 뽑았을 때 ‘얼마나 더 농땡이를 피우고 싶었으면.’이란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청우는 대외적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이 모두 꾸며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또 버러지가 기어 들어왔나?”
“뭐, 항상 그렇지.”
“자네도 고생이군.”
“너만 하겠나. 한잔해.”
강림 도령은 질렸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며 청우의 잔에 술을 채웠다. 생긴 것은 우아하게 와인이나 마실 것처럼 생겼으면서 그의 잔에 채워진 것은 뽀얀 막걸리였다.
“우리 부서에 들어온 신입 말이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음? 본 게 아니라 들어 본 거 아냐? 도방이라고. 차사국에서 유명했잖아.”
“…도방? 설마 그 반도깨비?”
“뭐야. 아무리 도깨비 피가 반만 섞였다지만, 네가 그걸 눈치채지 못하면 어떡해?”
강림 도령의 질문에 청우는 대답 대신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반도깨비라고?’
도깨비처럼 덩치가 크긴 했지만, 얼굴은 너무 담백했다. 게다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미세하게 흘러나오던 기운에선 도깨비의 ㄷ도 느낄 수 없었다. 귀물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귀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귀기를 완벽하게 숨길 수 있거나 귀물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왜?”
강림 도령은 청우가 무슨 생각을 깊게 하는지 궁금했다. 홍도화가 도방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도깨비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청우가 저리 반응하니 의아했다.
“내가 감이 많이 죽었나 보군. 신입한테서 도깨비 기운을 느끼지 못했어.”
“전혀?”
“전혀. 인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교맥국에선 홍도화를 죽이려고 수차례 위협을 가했다고 들었어. 생존을 위해서 숨긴 게 아닐까?”
“일리 있는 말이군.”
청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찜찜함은 가시지 않았다. 도방이 반도깨비라는 것은 들어 봤으나 도방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도 낯이 익었던 걸까.
‘내가 아는 도깨비의 핏줄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홍도화는 귀령면도 사용한다고. 귀령면을 인간이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귀령면의 이름에 왜 귀(鬼)가 들어갔겠는가. 귀기를 가진 귀물이 쓰는 가면이기에 귀령면이다.
“홍도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자네한테 붙여 줄 비서나 불러 볼까?”
“지금?”
“쇠뿔도 단김에 빼라잖나. 당장 오늘부터 담마하고 밀린 업무나 처리해. 최대한 빨리 끝내고 밀린 이야기나 나누자. 불의사망이니 역천이니… 상의할 이야기가 많아.”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골치 아픈 일만 골라서 터졌나 보군.”
말도 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은 강림 도령은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담마냐? 안으로 좀 들어와 봐야겠다. 뭐? 일하느라 안 된다고? 그 일 나중에 하고 우선 들어와. 아니, 재택도 야근도 안 시킬 테니까 그만두고 들어오기나 해!!”
처음에는 부드럽게 비서의 이름을 부르던 강림 도령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강림 도령의 성격이 불같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어 놀랍진 않았다. 하지만, 불같이 화를 냈어도 강림 도령이 밀리는 모습은 처음 본다.
“이게 비서인지 상전인지, 원!”
잠시 후, 누군가 술 창고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강림 도령은 조용히 열리는 문을 향해 손짓했다.
“여기다.”
청우는 강림 도령의 손짓에 다가오는 소녀를 보고 설마 했다.
‘저 아이가 비서?’
청우는 강림 도령이 제 입으로 유능한 비서라고 하길래 긴 경력을 가진 성인이라 예상했었다. 차사국 국장의 업무는 가히 살인적인 양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을 열고 다가온 사람은 아무리 많이 봐줘도 고등학생 정도의 외견을 갖고 있었다.
“부르셨어요, 국장님? 제게 또 무슨 밀린 일을 맡기려고 그러시는진 모르지만— 엇, 손님이 계셨네요?”
반 박자 늦게 청우를 발견한 담마는 강림 도령을 파렴치한 보듯 노려보았다.
“이젠 하다 하다 근무 시간에 여자까지 불러 놓고 술이나 마시다니…….”
경멸의 시선을 던진 담마는 술 창고를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아니! 어딜 봐서 얘가 여자라는 거냐!”
“?”
하극상을 참다못한 강림 도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의 외침에 술 창고에서 나가려던 담마가 멈칫했다.
‘여자가 아니라고?’
잠깐 휙 봤지만, 머리카락도 길고 얼굴도 예뻤다. 거기다 차분한 분위기까지 합산한 담마의 뇌는 강림 도령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여자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여자가 아니라니.
테이블로 돌아간 담마는 다시 이름 모를 사람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다. 그래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따지려는데 여자라고 생각한 사람의 입에서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반귀물이 자네 비서인가?”
“역시 자네야. 반귀물인 걸 바로 알아차렸군.”
담마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살짝 당황했다. 여자이니 분명히 목소리도 영롱하겠거니 했는데 뜬금없이 어울리지 않는 남자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일은 끝내 주게 잘하니까 나 대신 잘 부려 먹어.”
“흠.”
청우는 앳된 담마를 거절할까 하다가 자신의 사무실을 가득 채운 서류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국장님? 저분은 누구시고, 지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설명 좀 해 주실래요?”
대충 자신을 저 아름다운 남자에게 넘기는 분위기인 것 같다. 어차피 강림 도령의 비서직도 온전히 자의로 선택한 것은 아니니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의 비서가 된다 한들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저 남자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도와야 하는지 정도는 설명해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쪽은 추혼부 부장 청우. 올겨울은 나 대신 청우를 돕거라.”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