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도화-90화 (91/146)

90화

함부로 생자 명단을 열람한 일이라든가, 귀물과 결탁하여 인간을 궁지에 몬 일은 중징계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강림 도령은 본인이 제시한 기한 내에 별 탈 없이 해결해서 그런지 한동후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런 일을 벌인 것을 들켰으니 언제든 강림 도령에게 트집 잡힐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징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오늘, 차사부에 중요한 인물이 방문한다고 했기에 일찍 출근해서 청소를 해야 했다.

“아~ 요즘 아주 죽겠습니다. 수석님.”

책상을 정리하던 이 차사가 죽는시늉을 하며 묵범에게 엄살을 부렸다.

“진짜 죽기 전에 어서 청소하세요. 이 차사님 책상이 제일 더럽잖습니까.”

“흐어어.”

묵범이 웃는 낯으로 이 차사를 다그쳤다. 그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은 평소에도 정리를 잘해 둔 탓에 단순히 정리 정돈만 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차사의 책상은 온갖 서류철과 군것질을 하고 남긴 쓰레기로 난장판이었다.

“이제 곧 오실 겁니다.”

“힉….”

곧 온다는 말에 이 차사는 괴상한 소리를 내고는 청소에 박차를 가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분주해진 추혼부였다.

도화의 입사를 반기는 환영회 이후로 처음으로 모두 모인 자리였지만, 다들 오늘의 방문자가 누구인지 알기에 사소한 잡담도 나누지 않았다. 오직 눈치는 개나 줘 버린 이 차사만 묵범에게 징징댈 뿐이었다.

“그러니까 수석님. 회식 좀 찔러 봐요. 네?”

“그건 이 차사님이 직접 찔러 보시죠.”

묵범은 웃으며 이 차사의 부탁을 칼같이 자르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20분. 슬슬 도착할 시간이다. 그는 느긋하게 사탕 하나를 입에 까 넣고 그가 오길 기다렸다.

평소라면 단것 좀 그만 먹으라고 한 소리 했을 도화였지만, 이제 곧 그 사람이 온다는 말에 잔소리 대신 입구만 쳐다보았다.

뚜벅. 뚜벅.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보통 덩치로는 내지 못할 무거움이었다. 발소리는 정확하게 추혼부 부서 앞에서 뚝 끊어졌다.

‘왔다.’

손잡이가 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다들 숨도 크게 안 쉬고 문에 집중하느라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문이 열리고 온통 흙투성이인 낡은 부츠가 불쑥 나타났다.

‘…흙?’

부츠에서 떨어진 흙이 바닥을 더럽혔다. 바닥 청소를 담당했던 도화의 눈썹이 꿈틀댔다. 부츠가 한 걸음, 한 걸음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먼지 한 톨 없던 바닥이 엉망이 되었다.

“뭐야. 이렇게 청소할 시간에 나가서 악귀 한 놈이라도 더 잡아야 하는 거 아냐?”

낮고 거친 목소리가 부서 안을 긁고 지나갔다. 그제서야, 더럽혀진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도화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마침, 남자도 도화를 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 들어왔다던 반도깨비가 너냐?”

“……네.”

도화를 위아래로 훑으며 탐색하는 남자의 눈은 겨울 바다 같은 검푸른색이었다. 멋대로 자라 어깨 아래로 내려온 흑발도 검푸른 빛이 돌았다. 길게 찢어져 날카로운 눈매는 거친 목소리와 달리 예민해 보였다.

‘덩치가 굉장히 클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남자는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키는 컸지만, 묵직한 발걸음을 낼 만한 덩치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여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오늘, 추혼부에 방문하기로 한 귀한 사람은 추혼부 부장, 청우였다. 고라니를 잡으러 비무장지대로 간 뒤 연락이 끊겼다는 남자. 이 이야기를 한 여름에 들었는데 겨울이 되어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부장님.”

묵범이 답지 않게 예의를 갖춰 부장에게 인사했다. 외모만 보면 묵범이 상사로 보였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검푸른 눈동자의 깊이는 부장이 상당히 긴 세월을 살아왔음을 알렸다.

“나 없는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나 보더군.”

“국장님께 들으셨습니까?”

“그래. 다 들은 건 아니지만, 골치 아팠겠어.”

묵범은 이렇다 할 대답 대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도화의 팔을 끌어당겨 부장 앞에 세웠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입니다.”

묵범의 간단한 소개를 들은 부장은 한쪽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도화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도화는 부장의 검푸른 시선이 제 몸을 샅샅이 검사하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신입 차사 홍도화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장 청우다.”

청우라고 제 이름을 밝힌 부장은 신입에게 의례적으로 할 만한 격려나 조언은 일절 하지 않고 도화와의 대화를 끝냈다.

긴장한 것치고 너무 싱겁게 끝난 소개에 도화는 맥이 풀렸다.

“이제 완전히 차사국으로 돌아오신 겁니까?”

“음? 아니.”

“그때 그 고라니… 아직 못 잡은 겁니까?”

“고라니는 잡아서 무구부에 넘겼다. 이번에는 까치를 찾으러 가야 해.”

“언제 가십니까?”

“좀 더 추워지면.”

애매한 대답을 한 부장은 차사들에게 간단히 잘 하라는 격려 인사를 하고는 부서 내에 있는 부장실로 들어갔다. 천천히 닫히는 문틈 사이로 부장의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 말이 부장실이지 서류 보관 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장실에는 엄청난 서류가 쌓여 있었다. 모두 부장의 검토와 분류가 필요한 서류라 갖다 버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날이 더 추워지면이 언제일까.”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12월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11월?”

“무슨 까치인데 한겨울에 잡아야 한다는 거지. 역시 부장님은 통 알 수가 없어.”

평소와 달리 다들 속닥거리며 대화했다. 아무래도 부장이 돌아와서 눈치를 보는 듯했다. 남의 눈치를 보는 추혼부 차사들의 모습이 생소했다.

그리고 도화도 저들과 똑같이 목소리를 함부로 내기 어려웠다. 부장이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묵범의 질문에 평범하게 대답한 것뿐인데.

오늘 처음 본 부장은 존재만으로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실전에선 엄청날 것 같은데. 고라니나 잡으러 다니는 건 전력손실 아닌가?’

남 부려 먹기 좋아하는 강림 도령이 밖으로만 내도는 부장을 내버려 두는 게 이상했다. 고라니 한 마리 잡으러 다니는 시간이면 악귀 수백 마리 잡는 건 거뜬하겠다.

“저… 수석님. 회식 좀 찔러 봐요. 산월관으로. 네?”

이 차사가 부장이 왔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묵범에게 속닥였다. 고개를 끄덕인 묵범은 부장실로 들어갔다.

“간만에 위장에 기름칠 좀 해 봅시다.”

“미세먼지 때문에 목이 칼칼했는데… 청주로 소독 좀 해야겠어.”

각자 산월관에서 먹고 싶은 것을 주절거리던 차사들은 금방 부장실에서 나온 묵범을 기대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회식은 허락하셨습니다.”

“와아아!!!”

“회식이다!!”

방금까지 부장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 속닥거리던 분위기는 회식 허락이라는 말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어진 묵범의 전언은 축제 분위기를 단번에 가라앉혔다.

“면담 후에.”

“……면담?”

“면담이라고?”

“면담이라뇨?”

“설마 그 면담?”

술과 고기를 위에 때려 넣을 생각에 활짝 폈던 얼굴이 순식간에 칙칙해졌다.

‘면담? 그걸 왜 한다는 거지?’

면접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며 수도 없이 해 봤지만, 면담은 처음이다.

[회사에서도 면담 같은 걸 하나?]

현천이 도화에게만 들리게 물었다. 도화는 좌절하는 차사 무리에서 한걸음 물러나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회사 면담’을 검색했다. 그러자 검색 결과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휴직, 복직, 퇴사 등 다양한 면담 내용이었다.

[어째… 후기가 다 별로냐.]

목걸이에 매달려서 휴대폰을 보던 현천이 불길하게 중얼거렸다. 더 읽어 봤자 도움 될 건 없어 보인 도화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여기가 일반적인 회사라면 모를까. 궁금한 것을 인터넷에 검색해 봤자 원하는 답이 나올 리 없다.

“홍 차사는 면담이 처음이지요?”

슬쩍 도화 옆으로 다가온 유 차사가 팔꿈치로 도화를 툭 치며 물었다.

“면담도, 부장님을 보는 것도 처음입니다.”

“아, 맞다. 홍 차사는 부장님이 고라니 잡으러 자리를 비웠을 때 온 걸 잊고 있었네.”

“무슨 면담인 겁니까…?”

묵범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면담하기 싫다는 차사들을 진정시키고, 면담 순번을 정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냥 실적에 대해 물어보는 게 다예요.”

“실적?”

“아, 수석님이 실적에 대해선 설명 안 하셨나 봐요?”

“네. 처음 듣습니다. 실적.”

강림 도령한테도 들어 보지 못했다. 실적 때문에 다들 그렇게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주말까지 반납하며 일을 했던 걸까?

[실적으로 따지면 꼴찌는 도화, 네가 따 놓은 당상 아니냐?]

[…시끄러워.]

정곡을 찌르는 현천의 말에 도화는 울컥 짜증이 솟았다. 경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꼴찌가 되어도 상관이 없단 것도 아니었다.

“다른 부서도 실적을 따집니까?”

“실적이야 모든 부서에 있긴 한데 실상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어요. 감직부는 아예 없고요. 있어 봤자 무구부 정도? 하지만, 무구부는 부서 인원 전체가 한 가지에 매달려서 연구하는 분위기라 있으나 마나죠.”

“그러니까 차사국에 있는 여러 부서 중에 실적을 따지는 곳은 추혼부가 유일하다 이 말이군요.”

“추혼부만큼 실적 따지기 좋은 부서도 없으니까요.”

유 차사가 웃으며 말했다.

“여어. 신입도 실적 전쟁에 뛰어들려고?”

묵범에게 면담하기 싫다고 징징대던 이 차사가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수습 차사는 실적을 쌓아도 안 쳐 주는 건 알고 있지?”

“수습은 실적, 안 쌓아도 됩니까?”

“그런 셈이지. 수습이면 뭐든 미숙할 텐데 실적까지 신경 쓰다 큰 사고라도 치면 안 되잖아. 뭐, 자네는 경력직이니 국장님한테 건의하면 될지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도화는 여전히 면담 순번을 정하고 있는 묵범을 쳐다봤다. 수습 때 처리한 임무는 실적과 상관이 없다라.

[네 녀석이 돈에 환장한 걸 알고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날 생각해 주긴. 내가 실적 올리겠다고 돌아다니면 지도 따라다녀야 하니까 그게 귀찮아서 그런 거겠지.]

도화는 현천의 의견을 매몰차게 튕겨냈다.

‘실적…. 전쟁 수준으로 뛰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하면 좋을 텐데.’

차사가 되어 일을 해 보니 혼자 임무 수행을 하러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니 묵범과 함께 다니는 게 맞긴 한데……. 문제는 묵범이 뜻대로 함께 다녀 줄지 여부였다.

그를 움직이게 하려면 실적에 대한 특별한 메리트가 있어야 했다.

‘저 자식이 좋아하는 게…….’

곰곰이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다. 사탕, 초콜렛, 케이크, 휘핑 가득 올린 카라멜마끼아또, 시럽 농도 70% 이상인 아메리카노. 온통 달콤한 음료와 디저트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