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한동후는 아직도 얼얼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거하게 소금 세례를 받았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나았다. 오늘은 소금만 맞았으니까. 어제는 쌀 세례도 받았다.
“제발, 저 있는 돈 다 드릴게요. 네?”
“아, 안 받는다고!”
“저 좀 살려 주세요. 임 도령님…….”
한동후는 마당에 넙죽 엎드려 빌었다. 지금 그는 마루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루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앳된 청년이 앉아 있었다.
“감히 거꾸로 선 귀를, 그것도 넷이나 끌고 내 집에 들어와?”
임 도령님이라 불린 청년은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호통쳤다. 그리고 옆에 둔 단지에서 소금을 한 주먹 잡아 한동후에게 냅다 뿌렸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무얼?”
“거꾸로 귀신이요…. 그것도 넷…….”
“지금 널 가운데 두고 빙빙 돌고 있는데 모르면 등신이지. 어디서 저런 흉측한 것을 네 마리나 달고 온 거야. 어? 당장 꺼지지 못해?!”
“도령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아이고.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만 좀 해라. 고막에 딱지 앉겠다.”
“있는 돈 다 드릴게요.”
“있는 돈? 얼마나 있는데. 1억? 10억?”
“헉…….”
아무리 많이 들어도 3천만 원 내로 해결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한동후는 억 단위를 부르는 임 도령의 말에 혀를 깨물었다.
“어, 억이요?”
“그러면. 몇천으로 퉁 치려고? 눈이 시뻘게서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는 거꿀 귀신을?”
“…….”
한동후는 악몽 속 귀신의 모습을 그대로 말하는 청년을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
‘지금 감탄할 때냐? 어떻게든 있는 돈 내에서 해결해야 해.’
집이 잘사는 것도 아니고, 돈이 있더라도 부모님은 이런 일로 돈을 쓸 사람도 아니었다. 세상에 귀신은 절대 없다고 믿는 분들이니까.
“저거 하나당 최소 3억씩은 받아야 해.”
“뗄 수는 있나요?”
“아니.”
“네? 그게 무슨…….”
“못 떼. 하지만, 도와줄 수는 있지.”
“뭐든 할 테니까—.”
“넷에 12억.”
“…….”
“뭐, 꼬락서니를 보니 그럴 만한 돈이 있어 보이진 않긴 해.”
‘네. 맞습니다. 제게 그런 큰돈이 있을 리가요.’
한동후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한동후의 얼굴에 한 차례 더 소금을 뿌린 그는 부채를 접어 손을 탁탁 치며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한동후의 다리가 저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졌을 즈음.
임 도령이 한동후를 불렀다.
“어린 것아. 이름이 뭐냐?”
“하, 한동후입니다.”
“하한동후?”
“아니요. 한동후요.”
“그래. 한동후. 어디 이야기나 들어 보자.”
“네? 이야기… 네! 다 해 드릴게요!”
“다는 무슨. 간략하게 말해. 귀찮으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한동후는 자신이 처음 꾸었던 악몽부터 어제 죽기 직전까지 갔던 내용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고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 귓가에 쿵쿵, 콩콩 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아무래도 아까 도령이 주변에 거꿀 귀신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인 듯했다.
한동후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임 도령의 얼굴에는 따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서 육두문자를 뱉더니 지금은 눈앞에서 거꿀 귀신이 돌아다녀도 놀라긴커녕 심드렁했다.
“너. 그 꿈, 한 번만 더 꾸면 바로 저승길이야.”
“헉…….”
저승길이란 말에 한동후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들이 보면 어린 나이에 무슨 사연이 있으면 저리 처량하게 울까 궁금해할 모습이었지만, 임 도령은 짜증만 냈다.
“김 아무개야! 마실 것 좀 내와라. 내 열불이 터져 뭐라도 마셔야겠다.”
임 도령의 외침에 어제 본 젊은 남자가 커다란 대접을 대령했다. 대접에 담긴 것을 단번에 들이켠 임 도령은 부채를 촥! 펼쳐 입을 가렸다.
“네놈. 꿈에서 무얼 들었지?”
“네? 뭘… 듣다니요?”
거꿀 귀신 넷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것만 기억이 났다.
“멀쩡히 죄 안 저지르고 사는데 갑자기 그런 악몽을 꿀 린 없잖느냐?”
“그, 그렇지요…….”
“필시 네놈이 무언가 한 짓이 있기에 저 해괴망측한 것이 붙은 것이겠지. 자, 아둔한 놈아. 다시 머리를 굴려 봐라. 저것들이 네게 뭐라 말했는지 기억해 내.”
“…….”
“그게 네 목숨을 건질 유일한 길이다.”
한동후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어제 꾸었던 악몽을 떠올렸다. 다신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임 도령이 액수를 얼마나 부를지 걱정되었지만, 우선 살고 보기로 했다.
‘뭐라고 했더라. 내 방에 들어왔을 때 한 거 같은데.’
생각해 내. 생각해 내.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뜯고 나서야 네 마리의 귀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놀부보다 더한 것이 여기 있네?]
[놀부보단 김선달이지.]
놀부. 김선달.
등쳐먹고 사기 치는 인물의 대명사 아니던가.
“…….”
한동후는 귀신이 했던 말을 임 도령에게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악몽을 꾸는 이유가 너무 확연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악귀도 아닌 생자가 악귀 같은 짓을 하니 혼 좀 내야 하지 않겠어?]
한동후는 얼마 전 인터넷으로 보았던 기사 하나가 생각났다. 보이스 피싱을 당한 사람이 안 좋은 선택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가해자더러 나쁜 놈들이라고 욕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과 자신이 다를 바가 뭐가 있나 싶었다.
“왜. 안 떠오르냐?”
“…아니요.”
“어디 읊어 보거라.”
“놀부… 김선달 같다 했어요.”
“오호. 놀부와 김선달이라. 네 녀석. 사기꾼이구나?”
“…….”
입에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한동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고개라도 끄덕이면 제 주위를 돌고 있다는 귀신들이 당장 달려들 것만 같았다.
“부, 부…적이든 굿이든… 뭐든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돈은 드릴 수 있을 만큼—.”
“더러운 돈은 안 받는다.”
“흡…!”
돈을 안 받는다는 말에 한동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귀가에서 낄낄낄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네 살길은 네가 더 잘 알겠지. 김 아무개야! 사기꾼 좀 쫓아내라!”
“예. 도령님!”
“저 녀석 나가면 소금도 팍팍 치거라. 거 뭐냐, 핑크 솔트? 그거로 한 포대 뿌려야지 안 되겠다. 아주 악독한 걸 끌고 들어와서 악취가 진동을 한다.”
“알겠습니다.”
한동후는 김 아무개의 손에 덜렁 들려 건물 밖으로 내팽개쳐졌다. 거친 시멘트 바닥에 쓸려 손바닥과 무릎이 얼얼했지만, 지금 상처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네 살길은 네가 더 잘 알겠지.
임 도령의 말대로다. 한동후는 곧장 집으로 달렸다. 택시를 탈까 싶었지만, 지갑 속 돈은 자신의 돈이 아니었다. 모두 사기로 얻은 돈이었다.
‘다 돌려줘야 해.’
돈도 아이템도. 사과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경찰에 자수도 할 작정이다. 뭐든 죽는 것보단 낫겠지.
한동후는 집으로 달려가는 내내 자신이 저지른 사기 짓을 헤아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해서 이미 수중에 없는 돈과 아이템이 대부분이다.
‘꿈을 한 달 전부터 꾸기 시작했으니까…….’
한 달 전에 저지른 것부터 수습하기로 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부터 켰다. 삭제했던 게임을 설치하고 무수하게 날아든 쪽지를 확인했다. 모두 제게 속아 게임 머니와 아이템을 사기당한 사람들의 쪽지였다.
“죄송, 죄송합니다.”
그는 쪽지 하나하나마다 사과의 답장을 써서 보냈다. 실시간으로 귓속말이 날아들었다. 온갖 육두문자부터 해서 사기 친 것을 돌려주면 없던 일로 해 주겠다는 내용까지 다양했다.
“삼최 님. 삼최 님부터 해결해야 해.”
한동후는 자신의 인벤에서 번쩍이는 S9급 성검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흉기로 보였다.
* * *
게임을 할 의욕은 없지만, 혹시나 무슨 연락이라도 오지 않을까 싶어 접속만 해 두고 웹서핑을 하고 있던 담마의 귀에 띠링- 쪽지 알림음이 들렸다.
“어? 누구지?”
몽식이란 귀물이 이번 주말까지 해결이 될 것이라 했지만, 담마는 반신반의하던 차였다. 그리고 아직 주말이 끝나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해결이 되더라도 일요일 오후쯤에나 되겠거니 했는데.
“어어???”
쪽지를 보낸 사람은 예전 길드의 길마. 자신의 S9급 성검을 꿀꺽하고 나른 사기꾼 자식이었다.
- 삼최 님 계세요?
‘뭐라고 답장하지? 너 이 자식. 걸리면 죽었어? 당장 내 아이템 내놔? 우리 삼촌한테 혼나 볼래? 칼에 찔려 봤냐? 간 빼 먹히고 싶냐?’
예상치 못한 길마의 연락에 담마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다 물음표 하나만 간신히 날렸다.
- ?
- 헉. 계셨군요. 삼최 님……!
한 달 만에 나타난 길마는 담마를 아주 애달게 불렀다.
- 지금 어디세요?
- …왜요?
- 왜긴요. 저번에 제가… 들고 튀었던 S9급 성검… 돌려드리려고요.
“???”
담마는 지금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 진심입니까?
- 그럼요. 진짭니다. 믿어 주세요. 제발.
담마는 의심부터 했다. 이 자식, 또 사기 치려고 밑밥 까는 거 아냐? 당연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빌보 마을 창고 앞.
-바로 갑니다.
2분 뒤.
담마는 사기당했던 S9급 성검과 함께 상당량의 게임 머니를 받았다. 그 뒤, 길마에게 사기당했던 예전 길드원들한테도 연락이 왔지만, 대충 대답하고는 게임을 꺼 버렸다.
“이제 끝난 건가…?”
아이템도 받고 게임 머니도 받았다. 한 달간 마음고생을 한 것에 비하면 턱도 없는 보상이었지만, 우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뛰쳐나갔다.
“삼촌!!!”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던 도화가 깜짝 놀라 담마를 쳐다보았다.
“아이템 돌려받았어요!”
“!!”
드디어 일이 해결되었다는 말에 도화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만세를 외칠 뻔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참아 냈다.
“다음부터는 속지 말고. 알았지?”
도화는 만세 대신 담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는 정말 드물게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담마의 얼굴은 한 달 내내 죽상이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활짝 피었다.
“가서 쉬어. 잠도 제대로 못 잤잖아.”
“네. 안 그래도 자려고 했어요.”
긴장이 풀리자 부족했던 잠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크게 하품을 하며 제 방으로 들어가는 담마를 확인한 도화는 큰 걱정을 던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해결한 거냐?]
담마와 도화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현천이 물었다.
“응. 이제 한숨 좀 돌리겠어.”
[한숨은 무슨. 몽식한테 악몽을 주려면 고생 꽤나 할 텐데.]
“그렇긴 하지. 그래도 주말이 지나기 전에 해결됐으니 됐지, 뭐.”
도화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TV에 집중했다. 잠시 한눈판 사이 뉴스는 어느새 전국 날씨를 알려 주고 있었다.
어느새 계절은 완연한 겨울이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