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임도령’이라고 적힌 초록색 간판 아래 선 한동후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여기가 맞긴 한데…….’
상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한옥 카페라 해도 믿을 정도로 깔끔한 건물이었다. 심지어 입구 앞에는 초록색 철제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만약 입간판에 적힌 내용만 아니었다면 잘못 찾아온 줄 알고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임도령
OPEN AM 10:00
CLOSE PM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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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한 신점 - 100,000원
아주 용한 신점 - 200,000원
신년 사주 - 50,000원
종합 사주 - 100,000원
궁합 - 50,000원
기타 - 시가
‘……시가?’
수산물 시장도 아니고 대체 무당집에 시가가 왜 있는 걸까. 정말 여기가 그 용하다던 무당집이 맞는 건가?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한동후는 주먹을 불끈 쥐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외부보다 훨씬 카페 같았다. 들어서자마자 작은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하는 사람도 대기 중인 손님도 보이지 않아 멀뚱히 서 있던 한동후는 에라 모르겠다,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보통 점집이나 무당집이라면 떠오르는 울긋불긋한 그림과 등불 같은 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탱화가 있긴 했지만,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린 것이라 고전적인 인테리어에 녹아들어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저… 아무도 없나요?”
아무 방이나 들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몇 분을 홀로 서성이다 소리 내어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근처에 있는 방에서 젊은 남자 한 명이 나와 한동후에게 물었다.
“음? 이제 곧 영업 종료할 시간인데… 어떻게 오셨는지요?”
“저, 점을 보려고…….”
“점이요? 급한 일이 아니시면 내일 오세요. 20분 후면 도령님 퇴근할 시간이라서요.”
“급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도령님…? 도령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내일 오라니.
내일까지 기다리다가 또 깜빡 잠이 든다면?
이번에는 진짜 세상을 하직할지 모른다. 한동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자에게 매달렸다. 꿈에서 끔찍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돈은 얼마든 드릴 테니까…!!”
한동후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외쳤다. 그러자 남자의 주머니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한동후를 밀쳐내고 전화를 받았다.
“네. 도령님. 네. 아…. 네. 알겠습니다.”
통화는 일방적인 대답이었고 남자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통화를 끊은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저기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
“뭐… 저는 한번 말렸으니, 나중에 제게 뭐라 하진 마세요.”
“……?”
남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한동후는 남자가 알려 준 방으로 향했다. 어서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조급했다.
“저어… 안녕하세요…?”
문살 미닫이문을 열고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조금은 더 무속 느낌이 나는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도령님이라 불린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완전히 안에 들어가려는데.
“아! X발! 깜짝이야!!!”
“으앗!!?”
안을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욕설과 함께 하얀 알갱이가 따갑게 한동후의 얼굴에 뿌려졌다.
* * *
담마는 출근길에도 표정이 영 안 좋더니 퇴근길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얼굴이 죽상이라 차사국 복도를 걷다 보면 담마와 친분이 없는 저승차사들도 슬쩍 다가와 괜찮냐고 넌지시 묻는 일도 있었다.
“초상났냐?”
강림 도령이 퇴근할 준비를 하는 담마에게 물었다.
“아닌데요.”
“얼굴은 초상났는데?”
“…….”
담마는 강림 도령의 시답지 않은 농담을 흘려 넘기고 가방을 들었다. 국장실 밖에 홍도화가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나가야 했다.
“거, 네 삼촌한테 적당히 하고 끝내라 전해. 되도록 이번 주말 내로 끝냈으면 좋겠군.”
“……?”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강림 도령은 술 창고 안으로 사라졌다.
‘적당히 하고 끝내라고?’
삼촌이 자기 대신 사기꾼을 잡으려고 손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하는 중인지는 모른다.
물어보고 싶어도 묻지 못했다. 안 그래도 요즘 원귀며 악귀가 판을 쳐서 야근을 밥 먹듯 하는데 자신의 일까지 신경 쓰는 게 너무 미안해서였다.
‘그래도 오늘은 물어봐야지.’
만약, 이렇다 할 진척이 없다면 그냥 포기하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항상 묵범의 일방적인 질척임과 도화의 변함없는 철벽으로 가득 찬 대화가 오갔다. 담마는 둘의 틈을 끼어들 수도, 끼어들 마음도 없었다. 오늘도 담마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묵언 수행하듯 조용했다.
“저, 삼촌.”
“응?”
개운하게 씻고 나온 도화는 주눅 든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담마를 보고 속으로 아차 싶었다.
게임에서 사기를 당한 일로 담마가 겉보기와 달리 화도 많고 걱정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았으면 좀 더 신경 써 줬어야 했는데.’
[뭐야, 뭔데. 무슨 일인데.]
“넌 가서 밥이나 먹어.”
눈치 없게 끼어들려는 현천을 술병에 담가 버린 도화는 담마를 데리고 서재로 향했다. 주방에서 즐겁게 홍홍거리는 현천의 콧노래가 들렸다.
서재로 들어간 도화는 벌서는 학생처럼 책상 옆에 서 있는 담마를 자신의 의자에 앉혔다. 그는 아니라고, 삼촌 앉으라고 일어서려는 담마의 어깨를 꾹 눌러 다시 앉히며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있지?”
고개를 끄덕인 담마는 퇴근 전, 강림 도령이 한 말을 도화에게 전했다.
“국장님이 삼촌한테 적당히 하고 끝내라고 그랬어요.”
“적당히?”
“네. 되도록 이번 주말 내로 끝냈으면 좋겠다고 하던데요?”
“…….”
담마의 전언이 도화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내가 뭘 하는지 알고 있던 건가…?’
도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알면서 계속 모른 척하고 있던 건가?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거지? 적당히 하라는 건 이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경고인 건가?
그나저나 이번 주말이면 앞으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끝낼 수 있을지는 몽식에게 물어봐야 했다.
“삼촌. 그 사기꾼 때문인 거죠……?”
담마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화는 한숨을 쉬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들키지 않게 꿈에서만 괴롭혔는데. 국장님은 이미 다 알고 있던 것 같구나.”
“꿈?”
“그래.”
대답을 한 도화가 허공을 향해 박수를 탁탁 두 번 쳤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사, 삼촌?! 저게 뭐예요?”
깜짝 놀란 담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도화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도화는 괜찮다며 담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서 오세요. 몽식.”
“…몽식?”
처음 듣는 단어에 담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화가 괜찮다고 했지만, 등장하는 모습이 워낙 평범치 않아서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강림 도령이 눈치챈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 양반은 전부터 그랬지. 알면서도 모른 척 상황이 어찌 굴러가나 구경하곤 했어.]
“강림 도령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한때는 같이 바둑도 두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서로 바빠서 그럴 틈도 없지만.]
“그러셨군요.”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연기 상태였던 몽식의 몸이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추었다. 방 안이라 그런지 산책로에서 드러냈던 모습보다 훨씬 줄어든 크기였다.
담마는 뭐라 딱 정의할 수 없는 몽식의 기묘한 모습을 보고 두 눈을 깜빡였다.
[호오. 인간 사기꾼에게 당한 아이가 이 반귀물인가.]
반귀물이라는 말에 담마의 몸이 움찔했다. 도화는 괜찮다는 의미로 담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네. 제가 돌보고 있는 아이입니다.”
[신기한 일이로고. 도방이 타인을 거두다니.]
“뭐…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몽식. 사기꾼은 어찌 되었습니까? 강림 도령이 이번 주말까지 끝내라 하더군요.”
[이번 주말까지 갈 일도 없다네. 아마 내일이면 끝이 날 게야. 엄선해서 보낸 악몽이라 효과는 끝내 줬을 것이네.]
“다행이군요.”
[대가는 여드레 후에 가지러 오겠네.]
“여드레 후면 금요일이군요.”
[평일에 가지러 오면 출근에 지장이 생기지 않겠나. 불금에 고생 좀 하고 주말 간 쉬면 될 게야.]
몽식의 말에 도화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한 듯했다.
[음? 왜 그런가?]
“당신 입에서 불금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도화의 말에 몽식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언제까지 구태한 귀물로 머무를 순 없지 않은가. 그래도 꽤 벗어났다 생각했는데…. 저승차사를 그토록 싫어하던 자네가 차사가 된 걸 보니 난 아직도 멀었구려.]
“구태….”
도화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콕 짚은 몽식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몽식의 눈엔 내가 구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건가?’
그러고 보니 차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며 차사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지긴 했다. 순간, 도화는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스승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장 큰 원인은 정체불명의 남자였지만, 저승차사 역시 죽음에 일조했다. 그런데 차사 일을 한다 해서 차사에 대한 증오와 경계를 허물다니.
[나 때문에 다시 구태의연한 도방으로 돌아가지 말게나.]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이런…. 쯧쯧.]
몽식은 깊게 가라앉은 도화의 눈동자를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하지만, 자신이 그러지 말라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기에 깔끔하게 물러섰다.
[나는 이만 가 보겠네. 강림 도령에게 조만간 바둑이나 두자고 전해 주면 좋겠군.]
그 말을 끝으로 몽식은 다시 검은 연기로 변하여 사라졌다. 담마는 몽식과 도화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지만,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렴 저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산 도화이니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몽식이 말한 ‘대가’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했다. 도화가 저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도화가 깊은 생각에 잠긴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팔을 붙잡아 흔들었다.
“삼촌. 뭘 주기로 한 거예요?”
“별거 아니야.”
“저 때문에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이 녀석이?”
도화는 손가락으로 담마의 이마를 튕겼다.
“아얏!”
일부러 힘주어 튕긴 탓에 담마의 이마가 붉게 변했다. 하지만, 담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뭔진 몰라도 제가 드릴게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말하는 담마를 보며 도화는 피식 웃었다. 어른스럽다가도 이런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어린아이다.
“몽식이 원하는 것은 내 악몽이니 넌 절대 줄 수 없어.”
“악몽?”
“그래. 몽식이 한번 악몽을 가져가면 한동안은 꾸지 않으니 오히려 나는 이득이지.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가서 놀아.”
“……네에.”
도화가 오히려 이득이라 말하니 담마는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