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흐음.
묵범은 도화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꾸 흐음, 소리를 냈다. 도화는 그 소리가 거슬렸다. 흥미로워서 내는 건지, 가소로워서 내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신경 쓰였다.
흥미로워서라면 담마가 사기당한 게 재미있나? 싶고 가소로워서라면 피해자는 담마인데 사기당했다고 우습다는 건가? 싶었다. 어찌 됐든 둘 다 도화에겐 기분 나쁜 의미였다.
평소라면 진지하게 듣지 못하냐고 화를 냈을 도화였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묵범이 유일했기에 꾹 참고 사건의 전말을 풀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전해 들은 것을 다시 전달하자니 내용이 많이 부실했지만, 그렇다고 담마에게 직접 설명하게 할 순 없었다.
‘또 물건을 부수는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어. 강림 도령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호골로 돌려보낸다고 할 게 분명했다. 인간도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조절하지 못하는 것처럼 귀물도 다를 바가 없다. 종에 따라서 조절을 잘하고 못 하고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짓은 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다.
물론 지키지 않는 자도 있으나 걸리면 중한 처벌을 받는다. 이건 반귀물인 담마에도 해당하는 불문율이라 담마가 인간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면 안 되었다.
그래서 도화는 묵범에게 부탁했다.
“국장님께는 말하지 마.”
“담마를 호골로 보낼까 봐요?”
“…….”
도화가 대답이 없자 묵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담마가 마음에 드니 호골로 보내긴 싫—.”
“설마 ‘마음에 든다.’가 이성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
“……그게 무슨 막말입니까? 제가 담마, 그 꼬맹이를요?”
하하!
묵범이 어이없다 못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 참. 둔한 건 참을 수 있는데 눈치 없는 건 좀 난감하군요.”
“?”
도화는 묵범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지만, 마음에 든다는 뜻이 자신이 우려하는 그런 의미가 아닌 듯하여 가만히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건 이쪽이니 몸을 낮출 필요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거액 사기라. 그런 놈들 특징은 사기를 딱 한 번 치고 끝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등학생이라면 1학년이라 해도 촉법소년은 아니겠군요. 금액이 크니 보호처분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나라는 반성문만 몇 장 쓰면 감형이란 감형은 다 해 주니 법으로 합당한 벌을 주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
어쩌지?
도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했다. 담마가 사기당한 아이템을 되찾으면서 호되게 벌을 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데. 묵범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답답하기만 했다.
“본명과 은행 계좌번호, 사기 전적이 있으니 명부 검색을 해 보면 얼추 범인을 추릴 수 있을 겁니다.”
“그게 가능해? 그래도 되는 건가?”
망자 데이터라면 모를까.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의 데이터는 국장급 이상부터 열람 가능으로 알고 있다. 추혼부 수석인 묵범은 열람 권한이 없을 텐데. 어떻게?
도화의 질문에 묵범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누굽니까. 전직 산신, 천지왕께 예쁨 받는 진선 묵범 아닙니까? 거기다 강림 도령과도 친분 있고 가끔 저승시왕과 독대도 하는 사이입니다. 그깟 생자 명단 열람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징계를 받을지도 몰라.”
“절 걱정해 주다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감동했습니다.”
“……?”
“하지만, 괜찮습니다. 당신이 제가 준 정보로 사기꾼을 죽이기라도 하겠습니까? 겁이나 주고 말겠지요. 안 그래요?”
“그건…….”
묵범은 도화에게 물리적 상해를 직접적으로 입히는 짓은 벌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돌려 생각하면 몸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는 뭘 해도 괜찮다는 뜻이기도 했다.
“알았어.”
“좋습니다. 그러면 내일 출근하자마자 열람해 보도록 하죠.”
“고마워.”
“고맙기는요. 담마가 호골로 가 버리면 시무룩해할 것 같아서 돕는 겁니다. 그리고 대가, 받았잖아요?”
그는 도화의 밋밋한 머그컵을 흔들며 말했다.
“그러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제가 준 사탕은 꼭 먹어요.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될 겁니다.”
“누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도화의 반박에 묵범은 손을 들어 도화의 이마를 툭 쳤다.
“잔말 말고 먹어요. 지금도 담마 일로 잔뜩 인상 쓰고 있으면서.”
묵범은 주머니에서 작은 사탕 하나를 꺼내 책상에 올려 두고는 서재를 나갔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 같이 먹자며 좀 더 질척댈 줄 알았는데 미련 없이 가 버리니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허전?’
빡!
도화는 주먹으로 제 머리를 가열차게 후려쳤다. 지금 누굴 상대로 허전하단 생각을 하는 거냐. 미련한 놈아. 자책하며 몇 대 더 주먹을 휘두른 그는 얼얼한 머리를 문지르며 막대사탕을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책상 위에 두고 간 노란 사탕도 같이 버렸다. 크게 움직인 것도 없는데 괜히 숨이 거칠었다.
한참을 씩씩대던 도화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이마와 눈썹 사이를 슬쩍 만졌다.
“…그렇게 인상을 썼나?”
놈이 사탕을 주고 갈 만큼?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나 싶어 만졌지만, 손에 힘을 주어 꾹꾹 누르니 주름이 만져질 리가 없었다. 있던 주름도 눌려 펴지고 있는 걸 알면서도 도화는 미간 만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꾹꾹 누르던 손끝이 어느새 손톱을 세워 긁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곧 겨울이라 모기는 자취를 감췄을 텐데. 아니, 이 집에는 벌레 자체가 없건만, 도화는 뭐에 물려 간지러운 것처럼 긁었다. 그가 긁는 부분은 묵범이 인상 피라며 손으로 툭 친 부분이었다.
“간지러. 으. 젠장. 느낌 이상해.”
그는 이마가 발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긁고 나서야 이마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이마에서 뗀 손을 입술로 가져갔다.
“미치겠네.”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지르다 안 되겠는지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이마에 닿은 묵범의 손이 자꾸만 신경 쓰여서 그런지 한참 전의 일마저 갑자기 되살아났다.
“안 되겠다. 양치라도 해야겠어.”
결국, 도화는 칫솔에 치약을 듬뿍 짜서 20분 동안 양치를 하고 나왔다.
* * *
“국장님은?”
“보고차 위에 갔습니다. 시왕들도 죄인 판결하느라 바쁠 테니 살짝 열람하는 것 정도는 티도 안 날 겁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평소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출근한 도화는 묵범이 아무렇지 않게 생자 관리부를 열자 침을 꿀꺽 삼켰다. 열람하는 것은 묵범이지만, 열람 정보를 이용하는 것은 본인이기에 걸리면 묵범과 본인뿐 아니라 담마까지 연대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조마조마한 도화와 달리 묵범은 세상 태평했다. 사기꾼의 본명을 타이핑하는 손놀림마저 느긋했다. 둘만 있는 추혼부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도화의 심장 박동이었다.
“한동후. 나이 18세. 어린 나이에 전과 34범이군요.”
“모두 사기네.”
저승의 시스템은 피해자 한 명당 전과 1범으로 치기에 전과 34범이라 함은 34명의 사람이 한동후에게 사기 피해를 당했다는 의미였다.
도화가 사기꾼의 이름과 생년월일 등을 메모하는 사이 묵범은 한동후에게 당한 피해자 명단을 눌렀다.
“어디 보자. 피해자 목록에… 여기 담마도 있군요. 피해 금액이 꽤 크네요. 그래서 혼내 주려고 이를 갈고 있던 것이군요.”
묵범이 이제 이해했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벌을 줄 생각입니까? 관상으로 혼내 줄 순 없을 것 같은데…….”
“다 방법이 있어.”
“흐음?”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은 도화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부서실을 나섰다. 어서 오늘 할 일을 끝내고 한동후, 이 사기꾼 새끼를 혼내야 했다.
* * *
단순 탈주 망자 둘. 원귀 셋. 총 다섯을 잡으니 오늘의 할 일은 모두 끝이 났다. 잡는 시간보다 이동 시간이 더 긴 하루였다.
묵범과 함께 퇴근한 도화는 차에서 내려 아파트 내에 있는 산책로로 향했다. 함께 가자고 들러붙는 묵범을 떼어 내느라 고생 좀 했다.
[역시 돈은 많고 봐야 하는구먼.]
현천의 말에 도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산책로는 볼 때마다 감탄하곤 했다. 산책로라기보단 작은 숲길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렸다. 분수와 연못까지 있어서 가끔 산책로 벤치에 앉아 있으면 복잡한 도심이 아닌 산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집엔 안 들어가고 산책이냐? 퇴근 후엔 무조건 집 아니었나?]
[만날 귀물이 있어서.]
[귀물? 누구?]
현천의 질문을 뒤로한 도화는 허공을 향해 박수를 탁탁 두 번 쳤다. 그러자 나뭇잎 그늘진 밑면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뭐냐. 이거.]
[몽식(夢食).]
[몽식…? 그런 기괴한 놈을 왜 불러?]
[이유가 있으니까 부르지. 넌 주변에 누가 오는지 망이나 봐 줘.]
[흠. 그렇다면야.]
현천은 도화가 어련히 다 알아서 하겠거니, 믿고 근처에 다가오는 사람이 있나 망을 보기 시작했다.
[호오. 도방 선생 아닌가.]
한데 뭉친 검은 연기는 거대한 네발짐승으로 변했다.
발만 보면 호랑이인데 몸뚱이는 곰이고 코끼리 코에 멧돼지의 엄니를 가진 기묘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몽식.]
[허허. 그 이름, 오랜만에 듣는구려.]
[불가살이라 부를까요?]
[아니, 몽식이 듣기 좋으니 그리 부르게.]
몽식은 도화 옆에 앉아 코를 흔들며 말했다. 오랜만에 몽식으로 불려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날 부른 겐가? 듣자 하니 그리도 치를 떨던 저승차사 소굴로 들어갔다더만. 날 잡으려고?]
[설마요. 차사들이 귀물을 잡는 경우는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칠 때입니다. 몽식은 소소하게 악몽 수집을 하니 차사가 찾아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참 다행스러운 일이군. 그러면 날 부른 이유가 뭔가?]
[부탁 좀 드리려고 합니다.]
[부탁? 도방 선생이 내게 부탁을?]
[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어디 무슨 부탁인지 들어나 봅세.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
몽식의 요구에 도화는 간략하게 담마가 당한 사기에 대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까 묵범이 생자 관리부를 열람했을 때 메모해 두었던 것을 꺼내 몽식에게 내밀었다.
[이자가 그 사기꾼이로군.]
[네. 이자에게 당신의 악몽을 조금 나누어 주십사 연락드린겁니다.]
[음? 내 악몽을?]
처음에는 당황한 반응을 보이던 몽식은 이내 도화의 의중읠 파악하고 꼬리를 흔들었다.
[사기꾼에 걸맞는 악몽을 선사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대가는 제 악몽으로 치르겠습니다.]
[간만에 포식 좀 하겠군. 자넨 한 번 꿈을 꾸면 꽤 길게 꾸니.]
몽식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곧 밤이다. 밤은 몽식의 시간. 그는 지체할 필요 없이 바로 움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