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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84화 (85/146)

84화

높아진 도화의 언성에 담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옆에 동동 떠 있던 현천도 놀라서 움찔할 정도였다.

“사기라니. 무슨 사기?”

“그게 어찌 된 일이냐면요….”

담마는 최대한 울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삼촌이 게임에 대해 잘 모르니 중간중간 부연 설명까지 하면서 길마 놈의 만행에 대해 고했다.

“그러니까… 네가 사기당한 S9급 성검이라는 게 최저가로 팔아도 2천이 넘는다는 거지?”

“네. 그런데 절대 최저가로 팔릴 일은 없어요. 워낙 매물이 없는 템이라—.”

파삭!

담마의 이야기를 듣던 도화는 순간 화를 이기지 못하고 쥐고 있던 컵을 깨트렸다.

“소, 손 괜찮아요?!”

“…괜찮다. 그런데, 2천이 넘는 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사기 쳤다고?”

“어… 네.”

“잡으려고 했는데 도망갔고?”

“직접 만나서 거래하자고 꼬시는데 안 넘어오네요.”

아까 봤던 ‘죄송하게 됐습니다.’가 그 뜻이었군. 도화는 손바닥에 붙은 유리 조각을 털어 내며 한탕이라는 놈의 말뜻을 파악했다.

“사진이나 나이, 생년월일, 이름. 아는 거 있어?”

“없어요…….”

“이름도?”

“잠시만요.”

담마가 후다닥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 십 분 정도 기다리니 담마가 종이에 무언가 써서 가지고 나왔다.

“본명이랑 계좌번호는 알아 왔어요.”

“흠…….”

도화는 종이에 적힌 글씨를 보고 고민에 빠졌다. 사진이나 생년월일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이름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이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고등학생이랬어요.”

“고등학생이라.”

고민에 빠져 있던 도화는 무언가 결심했는지 종이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하시게요?”

“삼촌이 좀 더 알아볼 테니까 너는 방이나 청소해 둬.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네에.”

알아보겠다는 도화의 말에 담마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이름만 가지고 뭘 어찌해 보겠단 것인진 모르겠지만, 삼촌이라면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뭐야. 그 새끼 잡을 거냐? 잡으면 나도 혼내 주면 안 돼?]

“네가 뭘 하게.”

[감히 우리 담마한테 사기 친 놈인데. 어디 한 군데 확 찔러 줘야지. 안 그래?]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너도 가서 담마랑 같이 방이나 치워. 사람 죽이면 뒤처리 귀찮아.”

[쳇.]

현철의 말도 안 되는 부탁을 거절한 도화는 다시 한번 헛짓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춘기는 아니라는 건데.”

하지만, 그 웃음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슬쩍 올라갔던 입꼬리가 단단하게 굳어 아래로 쳐졌다.

“사기를 쳐?”

도화의 머릿속은 담마가 사기당한 아이템의 현 거래가를 듣는 순간부터 핑핑 돌고 있었다. 뉴스에서 몇 번 보긴 했었다. 게임 아이템의 현 거래와 사기, 그리고 피해 보상에 대해서.

그때는 자신이 게임을 할 리 없으니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렸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될 일은 절대 없겠거니 했는데. 자신은 아니지만, 함께 사는 담마가 당해 버렸다.

그것도 최소 2천만 원짜리를.

2천만 원이면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한데. 그런 큰 금액을 고등학생 놈한테 사기당했다는 사실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나도 이런데 담마는 얼마나 화가 났을까.’

아까, 담마의 방에 들어갔을 때. 부서진 물건으로 난장판이 된 방을 본 도화는 전에 묵범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었다.

[만약 담마가 학교에서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을 겪는다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담마를 학교에 보내고 인간 세상에 적응시킬 계획에 나눈 대화였다. 지금은 학교는 아예 입학도 안 했고 인간과 부대끼긴커녕 차사국과 집만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도화와 묵범, 둘 다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직접 인간과 마주하지 않아도 어울릴 수 있는 가상 공간이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담마도 감정이 격해지면 당연히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담마는 인간이 아닌 반귀물. 과연 말로 화를 내는 것에서 끝이 날까?

말로 끝나면 다행이게. 주먹질을 해도 진심이 담기면 상대 인간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그때, 묵범의 질문에 떠올렸던 대답과 똑같은 답이 나왔다.

그리고 오늘, 담마는 인간에게 사기당한 것에 분을 참지 못하고 기물을 파손했다. 자기 물건을 자기가 부쉈으니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만, 뭐든 ‘만약’이란 가정은 하는 게 안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해결하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 담마의 상태로 그 사기꾼과 대면하게 했다간 사기꾼 놈은 두 발로 걸어 들어와서 네발로 기어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금 담마는 강림 도령의 특별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 국장의 비서로 일하는 담마이지만, 악귀가 될 뻔했던 반귀물이 조금이라도 엇나가지 않도록 감시 목적도 있는 채용이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담마 혼자서 해결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하지만, 본명, 계좌번호, 확실치 않은 나이만으로는 도화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젠장. 그 수밖에 없나.”

한참을 고민하던 도화는 짓씹듯 짜증 섞인 말을 중얼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좀 하자는 도화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은 채 3초도 유지되지 못했다.

“뭐? 대가? 넌 어떻게 된 놈이 대가부터 바라냐? 됐어! 끊어!”

버럭! 화를 낸 도화는 무슨 부탁을 할지 말도 꺼내지 않고 그대로 통화를 끝내 버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무척이나 분에 찬 모습이었다.

“나쁜 새끼. 언제는 좋다고 매달리더니, 뭐? 대가? 이딴 새끼 번호를 등록해 둔 내가 등신이지.”

도화는 방금 통화를 끝낸 상대방의 연락처를 지우려고 휴대폰을 만졌다. 연락처에서 ㅁ을 꾹 누르는데 딩동- 딩동- 벨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도화는 선뜻 방문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꺼려졌다. 도화가 서재에서 나갈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담마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나가지 말라고 막았어야 했는데.’

후회했지만, 이미 집 안으로 들어온 묵범이 서재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집에 다른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둬야지 안 되겠어.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겁도 없이.’

도화는 괜한 트집을 잡으며 속으로 담마를 타박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강도가 집에 침입한다면 피해자는 담마가 아니라 강도가 될 게 뻔한데도 도화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묵범이 서재 앞에 도착한 게 느껴졌다.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던 도화는 서재 문이 열리는 것을 알면서도 의자를 돌려 문을 외면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출퇴근 시간 외에 만나는 묵범은 건강에 해롭다. 그의 얼굴, 몸, 옷차림까지 모두.

힐끔 눈알만 굴려 묵범을 훑어보니 역시나다. 저런 몸으로 저렇게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다니다니.

옷을 입고 있는데 왜 외설스럽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홍도화 씨. 사람이 왔는데 쳐다보지도 않습니까?”

도화의 속내도 모르고 묵범은 도화의 냉랭한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웃으며 말을 걸었다.

“왜 마음대로 남의 집에 온 거지?”

서재로 들어온 묵범을 쳐다도 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묵범은 돌아보지도 않는 도화에게 다가가 그의 눈앞에 막대 사탕 하나를 흔들며 말했다.

“제게 부탁할 게 있다면서요. 간절해 보이길래 들어주려고 왔지요.”

“간절…? 누가?”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부디 제발 도와주세요~ 라고 연락한 홍도화 씨지요.”

“웃기시네.”

도화는 정신 사납게 눈앞에서 흔들리는 막대사탕을 손으로 탁 쳐내며 말했다.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당장 내 집에서 나가.”

“대가만 준다면 다 들어준다니까요?”

“헛소ㄹ… 뭐라고?”

가차 없이 쫓아내려던 도화는 묵범의 말에 자신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대가만 준다면 다 들어준다고?’

그렇다는 것은 사탕 껍데기를 대가로 줘도 부탁을 들어준다는 건가? 도화는 의심 어린 눈으로 묵범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쳐서 바닥으로 날려 보낸 막대 사탕을 집어 들었다.

“이걸 대가로 줘도 되나?”

“흐음…. 그건 제가 가져온 거라 안 되겠는데요?”

“아, 그런가?”

그러면 뭘 주지?

도화는 막대 사탕 대신 줄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서재를 쭉 둘러보았다. 다 읽은 책 중 한 권 골라서 줄까? 아니면 볼펜? 메모지?

아니면 아까 관상 본 부작용으로 추워서 흘린 콧물을 닦은 휴지?

“…….”

생각 없이 그냥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주면 될 텐데.

‘묵범에게 준다.’는 사실 하나로 도화는 무엇 하나 쉽게 고르지 못했다.

‘저 새끼가 뭐라고. 내가 왜 이러지?’

도화는 책상에 올려 둔 검은색 볼펜을 집어 묵범에게 주려고 했다. 그런데 도화보다 묵범의 손이 더 빨랐다.

“저는 이게 마음에 드는군요.”

“…그게 마음에 든다고?”

묵범이 고른 대가는 아까 도화가 관상을 본 후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뜨거운 물을 담아 온 머그컵이었다.

“네. 제 마음에 딱 드는군요.”

‘놀리는 건가?’

도화는 묵범이 머그컵을 잡은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는 답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도화의 머그컵은 밋밋하다는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림 하나 그려지지 않은 그저 하얗기만 했고 모양도 원통형에 D자 손잡이가 달린 게 끝이었다. 어딜 봐도 탐낼 만한 머그는 아닌데. 도화는 저걸 고른 묵범의 취향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묵범은 도화가 제 취향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대가로 고른 머그컵을 들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머그컵의 모서리 부분을 빙 돌려 가며 유심히 관찰했다. 아무래도 사용했던 컵이니 흠집이 있나 보는 듯했다.

“이쪽인가?”

“?”

묵범은 도화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컵이 놓여 있던 자리와 도화의 의자 위치를 확인하고는 손잡이를 잡고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위로 휙 올라간 것이 보통 만족한 것이 아니었다.

도화는 묵범의 미소를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푼도 안 들이고 대가를 주긴 했으나 어쩐지 저 머그컵을 준 걸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자, 대가는 받았으니 부탁을 들어 드려야겠지요?”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대가부터 덥석 받아?”

“뭐, 저더러 죽어 달란 부탁만 아니면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죽어 주면 안 되나?”

“음… 그건 곤란합니다. 제가 당신을 두고 어떻게 죽습니까. 같이 죽는 거라면 모를까.”

“같이 죽… 아니, 됐다.”

더 말해 봤자 혈압만 오르니 이쪽만 손해다. 도화는 묵범의 수작을 끊어 냈다. 그리고 담마가 당한 사기와 사기 친 놈을 어찌 응징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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