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금요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담마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담마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고 있는 도화는 힘을 내란 의미로 용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하지만, 담마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평소에는 단정하게 묶거나 귀 뒤로 넘겨 고정하던 머리카락이 자유분방하게 흔들렸다. 이제 출근해야 하는데 머리카락도 정돈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쏙 빠진 듯했다.
“흠.”
도화는 고개까지 푹 숙인 담마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국장님? 네. 오늘 담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삼촌…?”
침울해하고 있던 담마가 ‘국장님’이란 말에 화들짝 놀라 고래를 들었다. 자신을 달래 주고 같이 출근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강림 도령에게 보고를 할 줄은 몰랐다.
가만히 있어. 도화가 담마에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대화 중에 끼어들 수 없던 담마는 어쩔 수 없이 도화와 강림 도령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입원까진 안 해도 되고요. 약 먹고 푹 쉬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저도요?”
강림 도령이 뭐라 했는지, 도화의 한쪽 눈썹이 위로 휙 올라갔다. 저도요? 라고 반문한 것으로 보아 담마와 도화를 한데 묶어 지시를 내린 듯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 주 월요일에 데리고 출근하겠습니다.”
강림 도령과 통화를 끝낸 도화는 이번에는 묵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일이 생겨서 출근 못 하니까 혼자 출근해. 뭐? 너도 안 간다고? 어딜 와? 절대 문 안 열어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
그리 긴 통화도 아니었는데 담마는 묵범이 도화에게 뭐라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자기도 출근 안 하고 같이 있겠다고 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제 삼촌이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잠시 통화로 옥신각신하던 도화는 오면 멱을 따 버리겠다는 살벌한 협박을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오늘 출근 안 해요?”
“그래. 어차피 이 상태로 출근해 봤자 제대로 일도 못 할 거 아니야. 괜히 국장님께 한 소리 듣는 것보다 그냥 주말까지 푹 쉬어.”
“네…….”
푹 쉬라는 말에 담마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그런 담마의 손에 아까의 용돈 봉투를 쥐여 준 도화는 밀린 일 좀 하겠다며 서재로 들어갔다.
“…….”
담마는 억지로 쥐여 주느라 꾸깃해진 하얀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안에 느껴지는 두께감이 두툼한 걸 보면 상당한 금액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슬쩍 열어 본 봉투에는 따뜻해 보이는 적황색 지폐가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한 장을 빼 보니 신사임당과 눈이 마주쳤다.
[오우. 이게 다 얼마냐?]
늦게 방에서 나온 현천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세상에. 홍도화가 이만큼이나 돈을 줬다고? 그 짠돌이가?]
“그러게요. 이거 한… 이백은 넘을 거 같은데.”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홍도화가 용돈을 주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1~2만 원도 아니고 이백? 허허. 해가 서쪽에서 뜨는 정도가 아니라 종말이 오는 거 아니여?]
세상이 망할 거라며 현천이 난리를 쳤다. 담마는 그런 현천을 뒤로하고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에는 현천의 정신 사나운 수다가 재미있었지만, 지금은 신경이 예민해진 탓에 고막이 징징 울리고 있었다.
[어? 담마야? 졸리냐? 자러 가는 거야?]
다행히 현천은 담마의 방까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귀를 쫑긋, 밖의 소리에 집중하니 방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침잠이 많은 현천이니 아마 다시 자러 들어간 듯했다.
담마는 손에 들고 있던 용돈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졸리진 않았다. 잘 생각도 없다.
“…….”
담마는 자꾸만 컴퓨터로 향하려는 신경을 끊어 내려고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누웠다. 누가 보면 컴퓨터와 싸웠다고 할 분위기였다.
‘나쁜 자식. 개자식…!’
등을 보이고 누웠다지만, 어제 있었던 일은 자꾸만 떠올라 담마를 괴롭혔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담마는 최대한 주먹을 휘두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을 어제의 그 사기꾼에게 날려 버리고 싶었다.
어제. 퇴근 후, 씻고 컴퓨터에 앉은 담마는 항상 그랬듯이 게임을 켰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일 퀘스트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지겨운 숙제라며 투덜댔지만, 담마는 뭐든 재미있었다. 심지어 호미 들고 풀을 캐는 것마저도.
이유는 단순했다. 돈이 되니까.
게임 속 돈이 되기도 하고 현실 돈이 되기도 했다. 다른 유저들은 돈도 안 되는 게 자리 차지한다며 먹지 않는 잡템도 하나 흘리지 않고 모아다 상점에 팔았다. 이게 돈이 안 된다니? 티끌 모아 태산이랬다. 담마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모든 것을 모아다 팔았다.
그렇다고 해서 잡템만 모아 판 것은 아니었다. 담마의 주 수입은 사냥. 비싼 아이템을 먹어 내다 파는 것이 주 수입원이었다. 운이 좋은 것인지 담마의 득템 확률은 다른 이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체력이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으니 쉬지 않고 게임을 한 탓도 있었다.
어쨌든, 담마는 이런 식으로 쌀먹을 해서 돈을 쏠쏠히 모았다. 벌써 통장에 대학 등록금 4년 치는 모아 둔 상태. 지금껏 담마가 도화의 용돈을 거절하며 살아온 이유였다.
“그런 내 돈이…….”
빠드득. 담마의 턱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움켜쥔 주먹 안에서 손톱이 살짝 길어졌다. 항상 잔잔했던 금빛 눈동자에 붉은 기가 스쳤다 사라졌다. 모두 평소의 담마와는 거리가 있는 변화였지만,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했고 거울을 보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변화였기에 정작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굳게 닫은 잇새로 새어 나온 이가는 소리가 무척 살벌하게 들렸다는 것만 느꼈다.
“내 아이템…!!”
일주일 전.
담마는 득템을 했다. 그리고 어제 그 아이템을 사기 당했다.
문제는 사기를 당한 아이템이 전 서버에서 먹은 사람이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드랍률이 극악인 아이템이란 것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아이템인지, 아이템을 먹은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귓속말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물론, 담마는 그런 귓속말은 모두 무시하고 경매장에 올리려고 했다. 바로 올리진 않고 정보를 모았다. 이 아이템이 지금까지 총 몇 개가 나왔는지. 그중 거래가 된 건 몇 개이고, 최고가와 최저가는 얼마인지 찾았다.
그리고 게임 정보 사이트에 들어가서 자신이 먹은 아이템을 얼마면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반응도 살폈다.
그렇게 담마 다름대로 최저와 최고가를 정하고 경매장에 올리려는데 귓속말이 왔다.
-삼최 님. 지금 경매장에 올리시게요?
평소라면 귓속말은 깔끔하게 무시하는 담마였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귓속말을 보낸 사람이 담마가 몸담고 있는 길드의 길드 마스터였기 때문이었다.
-네. 왜요?
-아, 그… 다름이 아니라. 좀 무례하지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요?
-삼최 님이 드신 S9급 성검이요. 저 딱 한 번만 착용샷 찍어 보고 싶어서요. 안… 되겠죠?
-무례한 건 아시네요.
-하하. 네. 그렇지요…….
그냥 아이템도 아니고 가장 비싼 아이템을 착용해 보고 싶다고 부탁하다니. 무례해도 굉장히 무례했다. 그러니 무시하고 경매장에 올려야지, 했던 담마는 대화가 끊긴 채팅창을 보고 괜히 마음이 찝찝해졌다.
‘찝찝했을 때 손절하고 경매장에 올렸어야 했는데.’
몇 달 동안 친절하게 게임에 대해 설명해 주던 사람이라 믿었던 게 화근이었다. 거래창으로 아이템을 건네주고. 눈앞에서 착용하고. 이리저리 캐릭터를 움직이며 스크린샷을 찍는 것 같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30분 뒤. 길드도 폭파되었다. 길마가 탈퇴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냥 내가 쓸걸….’
후회해 봤자 늦었다. 담마는 경매장에 올리기 직전, 확인했던 아이템의 최저가를 떠올렸다. 3천만 원. 최소가 3천이니 경매가 시작되면 그보다 수 배는 오를 텐데.
분을 참지 못한 담마는 침대에서 이리저리 구르다 결국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컴퓨터로 달려가 게임을 틀었다.
‘혹시 잠깐 사이에 착해졌을지도 몰라. 반성했다면서 다시 돌려준다고 귓말을 보낸다면 용서해 줘야지.’
방금까진 분노에 차 이를 갈던 담마였지만, 길마 놈이 반성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게임에 접속했다. 익숙한 BGM이 흐르고 길드명이 사라진 담마의 캐릭터가 화면에 나타났다. 물론 인벤 창에도 문제의 그 아이템은 없었다. 당연했다. 길마 놈이 먹고 날랐으니까.
“…….”
귓속말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폭파된 길드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길마 소식을 물어보는 것을 보면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길마에게선 귓속말은커녕 접속 메시지도 뜨지 않았다. 아마 그런 비싼 아이템을 사기 치고 날랐으니 한참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담마는 자신이 너무 순진했음을 인정했다.
사과하고 아이템을 돌려주면 용서해 줄 거라고? 웃기는 소리. 아예 작정하고 잠적한 놈이 퍽이나 아이템을 돌려주겠다.
담마는 길마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어떻게 해야 다시 그 아이템을 찾아올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해킹이라도 하지. 이건 내가 직접 거래로 준 거라 게임사에서 되찾아 주진 않을 것 같아. 직접 길마 새끼를 만나면 쥐어패서라도 찾아올 텐데.’
문제는 길마에 대한 개인 정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친하게 지내던 길드원도 없어서 누구 한 명 붙잡고 길마에 대해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놈이 어디 사는지만 알아도 당장 가서 쥐어패 줄 텐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데 귓속말이 왔다. 길마인가 했지만, 폭파된 길드의 길드원 중 하나였다.
-저기. 삼최 님. 그거 아세요?
-그거라니요?
-길마 새끼 말이에요. 그 새끼, 고등학생이래요.
-……네?
고등학생……?
담마는 자신이 하는 이 게임의 이용 등급을 떠올렸다. 선정성, 폭력성, 사행성 모두 청소년 이용 불가 게임인데. 길마가 고등학생이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사기를 쳐?
담마 본인은 태어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으면서 길마가 고등학생이라는 소식에 매우 분개했다.
-그리고 길드 폭파하기 전에 여기저기 사기를 많이 치고 다녔나 보더라고요. 골드도 엄청 빌리고, 템도 일주일만 써 보겠다고 빌려 가고. 다들 잡으려고 이를 갈고 있어요.
-잡을 방법이 있나요?
-게임을 접을 생각으로 크게 한탕 한 것 같아서 우선 거래소 감시부터 하기로 했어요.
-거래소?
-네. 사기 친 골드랑 템을 현금화해야 하니까요. 아, 삼최 님도 혹시 그 새끼한테 뭐 빌려 주거나 그러셨어요?
-저도 빌려 준 게 있는데….
-역시. 그 미친 새끼. 누구 한 명 빼먹지 않고 아주 골고루 사기 쳤네요. 피해자 단톡방에서 어떻게 잡을지 대화 중인데, 삼최 님도 들어오실래요?
-음, 아니요. 일이 바빠서 거기까진 신경 못 쓸 것 같아요.
단톡방이란 말에 담마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게임으로 족했다.
-아… 하긴. 현생이 더 중요하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뭐라도 단서가 생기면 연락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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