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잠깐 잠든 사이 꾼 꿈은 호윤과 처음 만나던 날에 관한 것이었다.
“참 귀여웠는데…….”
침대에 누운 도화는 무구부에서 회수한 귀령면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호윤을 처음 봤을 때는 제게 스스럼없이 다가온 사람이 스승님 말고는 처음이라 놀란 마음이 커서 호윤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나중에 찬찬히 살펴본 호윤은 무척이나 귀여운 아이였다. 작고 마른 몸과 달리 젖살이 올라 통통한 볼은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보고 싶을 정도였다.
새카만 눈은 어찌나 크고 맑던지. 투명한 피부와 고운 손은 대궐집 귀한 아가씨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그러나 걸친 옷은 도화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넝마라 그런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였다.
말투도 거칠었다. 만약 말투까지 고상했다면 귀한 집에서 잃어버린 아이라 믿고 부모를 찾아 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호윤은 제 입으로 부모와 형제 모두 자신이 어릴 적 죽어 하늘 아래 피붙이 없는 단신이라 소개했다.
도화는 호윤이 저처럼 홀로인 게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저와 처지가 같단 사실에 반갑기도 했다. 물론, 겉으론 절대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호윤에게 미안해서 항상 잘 대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래 봤자 비렁뱅이인 도화가 호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햇빛 드는 자리나 어렵게 구한 풀뿌리를 양보하는 게 다였다.
그래도 날이 풀려 앙상했던 산에 다시 녹음이 찾아올 때면 시원하게 그늘진 자리를 양보했다. 마을에 내려가지도, 사탕 살 돈도 없던 도화는 대신 씹으면 달큰한 맛이 나는 꽃을 따다 호윤에게 주었다. 풀뿌리 대신 새콤한 나무 열매를 내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줘도 안 먹을 것들이었네.”
피식 웃으며 말한 도화는 만지작거리던 귀령면을 들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 20분. 다시 잠들기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책이라도 좀 읽다 잘까.’
그는 들고 있던 귀령면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들고 서재로 향했다. 차사국에 입사하기 전에는 항상 가방에 넣어 다녔던 귀령면이지만, 지금은 흑립 덕분에 쓸 일이 사라졌다.
수습 차사는 반드시 차사국에 출근해서 차사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사내 규칙이 있다. 그러나 도화가 그걸 지킨 기간은 고작 며칠이 전부였다.
수습 차사이지만, 수석 차사 묵범의 파트너라는 특수성과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어 감시가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국장 강림 도령의 허가 덕분에 도화는 차사복을 반출해도 되는 혜택을 누리는 중이었다.
‘혜택은 좀 아닐지도…….’
퇴근 후나 쉬는 날에 우연히 사건 현장을 맞닥트리면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어쩌면 수습 기간을 길게 갖는 게 편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특별히 허락한다면서 실실 웃더라니.
도화는 수상쩍었던 강림 도령의 미소의 의미를 이제야 알아차렸지만, 취소하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차사복을 외부로 반출했다 해서 아무 때나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타당한 이유 없이 차사복을 사용했다간 징계 처분을 받는다. 일이 커지면 해고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윤회의 길에 오를 때 그 죄를 물어 삶의 등급이 낮게 책정될 수도 있다고 했다.
‘삶의 등급 책정은 현생을 기준으로 잡는다던데.’
지금보다 더한 시궁창으로 들어간다?
“으….”
도화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끔찍하다. 지금이야 운이 좋아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지만, 불과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여름엔 쪄 죽고 겨울엔 얼어 죽는 코딱지만 한 원룸에서 살았었다. 그나마 원룸이면 다행이게. 도화는 방금 꾼 꿈속의 제 모습을 떠올렸다. 그나마 그건 감지덕지지. 스승을 만나기 전엔 사람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쉰 고구마 반쪽이라도 얻는 날이면 진수성찬이라고 기뻐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고구마가 뭔가. 땅을 기어가는 개미도 우선 입에 넣고 봤었다.
“…다 지난 일이야.”
한번 생각난 그때 그 시절의 끔찍했던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떠올랐다. 뭐라도 다른 생각을 해서 고리를 끊어 내야 했다.
도화는 들고 있던 귀령면을 책상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컴퓨터 전원을 켜서 메일과 블로그를 확인했다. 며칠 신경 안 쓴 사이에 의뢰 문의 메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블로그도 마찬가지였다. 공지글은 댓글 기능을 막아 놔서 깨끗했지만, 방명록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자신의 의뢰를 꼭 받아 주셔야 한다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대부분이었다. 비밀글로만 작성하게 해 두어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서로 본인이 먼저라고 댓글로 싸움이 날 뻔했다.
그는 딱 봐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메일은 거절의 답장을 보내고 모조리 휴지통에 넣어 버렸다. 방명록은 확인하지 않고 통째로 게시판을 없애 버렸다. 그렇게 메일을 추스르던 끝에 단 두 건의 의뢰를 수락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자정이 되었다.
굳은 어깨를 풀기 위해 팔을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하던 도화의 손에 채인 귀령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펫이 깔려 있어 요란한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스승이 남긴 유품을 함부로 굴렸다는 생각에 뜨끔해서 재빨리 집어 들었다.
“스승님.”
도화는 귀령면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스승의 유품이니 소중한 물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스승을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기에 속이 울렁거렸다.
귀령면은 평범한 사람이 봐도 그리 낯설지 않을 외양의 가면이다. 겉보기엔 볼품없는 검은 나무 가면이지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박물관에서 본 귀면와(鬼面瓦)를 떠올릴 것이다.
귀면와와 귀령면 모두 도깨비를 형상화한 물건인데, 귀면와가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사기(邪氣)를 몰아내는 벽사(辟邪)를 주목적으로 만들었다면 귀령면은 사귀로부터 기척을 숨기는 것을 주목적으로 만든 가면이었다.
물론 벽사의 기능도 어느 정도 있어 악한 귀물을 상대할 때 상당한 도움을 받곤 했다.
‘그래 봤자 차사복에겐 비비지도 못하지만.’
도화는 의자 등받이에 체중을 실어 편히 기댔다. 그리고 귀령면을 들어 얼굴에 가져갔다. 그러자 귀령면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화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마치 원래 도화의 피부였던 것처럼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뭐지?’
전에도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데에 큰 불편함이 없긴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예 안 쓴 것처럼 느낌이 없진 않았다.
“무구부에서 뭔가… 손댔나?”
귀령면을 벗은 도화는 무구부 차사들이 연구를 핑계로 귀령면에 무언가 손을 쓴 곳이 있는지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꼼꼼하게 들여다보아도 수상한 구석은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착용감이 더 좋아졌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도화는 괜히 무구부를 의심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겠거니. 도화는 괜한 의심은 그만두기로 했다. 이럴 시간에 스승이 죽던 순간, 나타났던 저승차사를 찾을 계획을 세우는 게 훨씬 생산적일 터.
“흠.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지?”
그때 보았던 저승차사는 분명 스승님이 죽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감직부 차사일까? 스승님의 성격상 저승차사의 인도를 거부하고 도망쳤을 확률은 낮다. 그는 모두들 기피하고 혐오하는 반도깨비를 친자처럼 길러 준 분이니까.
하지만, 저승차사가 직접 되어 보니 그때 나타난 저승차사의 행동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차사는 망자의 명부가 뜬 다음에 움직인다. 이것은 감직부나 추혼부, 모두 예외는 없다. 그런데 그 차사는 스승의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나타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스승님이… 나 모르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던 걸까? 죄질이 극악무도해서 도주할 것 같아 항시 감시하고 있었을는지도 몰라. 하지만… 스승님이?’
도화가 아는 스승님을 떠올리면 절대 후자일 리 없다.
스승이 극악무도한 자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 시절의 차사국은 지금처럼 현대화된 망자 관리 시스템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대단히 큰 착오가 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착오를 일으킨 차사를 찾아야 하는 건가. 몇백 년 전의 일인데 과연 찾을 수 있으려나.
강림 도령과 좀 더 친해져서 차사국과 차사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묵범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했다.
‘변태 새끼. 이럴 때 써먹어야지. 언제 써먹나.’
변태긴 해도 묵범 덕분에 몰랐던 정보를 꽤 얻고 있다. 별천계의 산월관이나 불의사망자, 그리고 업신과 역천까지. 원하는 정보는 아니지만, 아예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이대로 계속 정보를 얻다 보면 스승이나 호윤과 관련된 정보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게 언제가 될는진 모르지만.’
차사국에 들어오면 금방이라도 단서를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처음 생각했던 계획과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초조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잘 풀릴 거란 생각이 불안함을 잠재웠다.
“처음으로 편안한 집이 생겨서 그런가…?”
호윤과 함께 지냈을 때는 즐거웠고 스승이 곁에 있을 때는 든든했다. 하지만, 두 시기의 공통점은 세간이며 살림이며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풍족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배만 곯지 않으면 감지덕지였다. 스승은 착했으나 생활력은 제로인 남자였으니까.
스승을 여의고도 고난은 길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간의 수명은 짧다는 것이었다. 도화를 괴물 취급하던 인간들은 죽고 죽어 세대가 몇 번이고 바뀌었다. 귀물은 점점 귀계에서 나오질 않게 되었고 인간들은 신, 귀신, 요괴 등을 모두 미신 취급했지만, 덕분에 도화가 하계에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부족할 것 없는 세간살이. 자신을 의지하는 담마. 친우 같은 현천.
그리고 억지로 인간 틈바구니에 비집고 들어가 사는 것이 아닌 귀물인 제 본 모습을 드러내고 지낼 수 있는 환경까지.
태어나 가장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스승님과 호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저 혼자 고생 끝에 낙을 누리는 것 같았다. 이 넓은 집에서 함께 지내면 좋으련만. 호윤의 성격이 좀 괄괄하긴 하지만, 담마라면 죽이 잘 맞을 것이다. 방정맞은 현천은 알아서 서로 친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줄 것이고.
스승님은 그 큰 덩치로 덤벙거리다 실수를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수습하겠지.
도화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상상 속에 잠겼다. 이렇게 큰 집이면 모두 모여 살아도 괜찮을 텐데.
‘그렇게 되었으면.’
이루어질 리 없는 희망 사항이지만, 도화는 상상 속에서나마 행복하게 지내는 스승과 호윤을 그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