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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80화 (81/146)

80화

기력이 다 빠진 것 같다. 정신이 기진맥진한 적은 정말 오랜만이다. 스승의 죽음, 호윤의 실종 이후로 처음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에 들어서자 담마가 쪼르르 마중 나왔다.

“일찍 들어오실 줄 알았는데 일이 많았나 봐요?”

“일찍 퇴근할 예정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됐다.”

“저녁은요?”

“먹었으니까 네 볼일 봐.”

도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담마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아무래도 신나게 게임을 하다가 도화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나온 듯했다.

[또 쌀먹하는 중인가 보군.]

“쌀먹…….”

[나도 쉬어야지. 피곤하구먼.]

현천도 도화와 함께 무구부 차사들에게 내내 시달렸던 터라 피곤할 만했다. 허공을 비틀비틀 힘없이 날아가 방으로 들어가 버리니 넓은 거실엔 도화 혼자만 남게 되었다.

‘씻어야 하는데 귀찮다.’

속으론 귀찮다면서도 도화는 착실히 샤워까지 하고 나왔다. 화단의 흙을 파 댔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개운해진 몸으로 침대에 누운 도화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다사다난했던 하루였다. 눈을 감고 오늘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정리하던 도화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 * *

그날도 마을에 내려갔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날이었다. 다른 계절은 산에서 잘 버틸 수 있었지만, 겨울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추위는 동물의 털가죽을 두르고 땅굴 속에서 어찌어찌 버틴다지만, 굶주림은 어찌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산속의 겨울은 언제나 혹독했다. 어찌나 혹독한지 물이 꽁꽁 얼어서 물배도 채울 수 없었다. 눈이라도 많이 내리면 모를까. 겨울 가뭄까지 들어 얼어붙을 물도 없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아까 덩치 큰 장정이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머리를 맞은 것 같다. 어딜 무엇으로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에게 작신 두들겨 맞아서 온몸이 다진 고기가 된 게 아닐까 싶었다.

배가 고파 내려간 건데 매만 배 터지게 맞았다. 도화보다 배는 더 큰 놈들이 배를 뻥뻥 차 대서 정말 터지는 줄 알았다.

결국, 다시 산으로 돌아온 도화는 품에서 녹슨 호미를 꺼냈다. 먹을 것은 못 얻었으나 도망치면서 훔친 호미였다. 훔쳤다기엔 제 기능을 못 해서 버린 것이었지만, 그런 걸 알아차릴 만한 지식은 어린 도화에겐 없었다.

어리다. 도화는 스스로 어리다고 생각했다. 물에 비춰 본 모습이 마을에서 소동(小童)으로 불리는 애들과 비슷했으니 어린 게 맞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도화를 보고 괴물, 요괴, 귀신이라 불렀다. 이유를 물어보아도 대답 대신 날아온 것은 돌멩이라 아직도 답을 모른다.

어쨌든, 도화는 훔쳐 온 호미로 땅을 팠다. 다람쥐가 숨겨 놓은 도토리라도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다못해 나무뿌리라도 걸리면 좋을 텐데.

팍, 팍!

딱딱한 것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산을 울렸다. 얼어붙은 손으로 덜거덕거리는 호미 손잡이를 잡고 열심히 땅을 팠으나 강철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땅은 매정하게 도화의 호미질을 튕겨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휘두른 끝에.

“악!”

호미 손잡이가 부러지고 말았다. 땅에 튕겨 나온 호미는 그대로 도화의 이마를 매섭게 찢고 날아갔다.

“으…….”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도화는 무엇이 제 이마를 치고 지나갔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저 불붙듯이 아파서 반사적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얼어붙은 손에 따뜻한 온기가 달라붙었다. 미끈거렸지만, 따뜻했다. 그래서 도화는 조금이라도 손을 녹이고자 마구 비볐다. 아팠지만, 아픔보다 추위가 더 아팠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화는 제 손이 온통 붉게 물든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이마에서 느껴졌던 따뜻한 것이 제 피인 것을 알아차렸다.

“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물도 없는데 어떻게 씻지?’였다. 불을 피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디서 귀동냥으로 들은 건 있어서 돌멩이를 양손에 쥐고 탁탁 부딪쳤다. 하지만, 요령도 없이 부딪치기만 하니 불꽃이 튈 리 없었다. 오히려 추위에 빨갛게 곱아 감각이 둔해진 손이 사고를 쳤다.

“!!!”

이번에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제 손을 돌로 내리찍어 버린 것이다. 화도 나지 않았다.

뭉툭한 돌에 날붙이가 달린 것도 아닌데 손의 상처가 꽤 컸다. 쩍 갈라진 살에서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도화는 들고 있던 돌을 떨어트리고 멍하니 손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따뜻해.”

불을 피워 얼음도 녹이고 몸도 녹이려 했는데 불 대신 피만 흘렸다. 얼음을 녹이진 못했지만, 피가 나는 부분은 따뜻했다. 이 온기가 전신을 녹이면 좋으련만. 그러기 위해선 온몸에서 피를 흘려야 한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그냥… 죽을까?’

어린 녀석이 할 만한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이 정도 고난과 핍박을 겪었다면 할 만한 생각이다.

하루에 한 번, 매일 나쁜 일이 생겨도 사는 낙이 없다 할 판에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런 일이 이어지니 밝게 웃으며 뛰어놀아야 할 아이의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죽고 싶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인간은 조금만 굶어도 죽는다는데 도화는 벌써 한 달 가까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저를 죽이려고 추적하는 정체 모를 자들을 피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기만 했다. 큰 상처를 입은 적도 있으나 충분한 휴식을 취하니 자연히 치유되었다.

그래서 도화는 막연히 죽고 싶단 생각을 하면서도 무슨 방법으로 죽을지는 정할 수가 없었다. 무얼 해도 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어제 박 씨가 저짝 산에 토끼 잡으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며?]

[허이고. 쉬 누면 주장군(柱將軍)까지 꽁꽁 얼어 똑 떨어질 판에 퍽이나 토끼가 나 잡아 가소~ 하고 뛰어 댕기겠네. 호랑이라면 모를까. 쯧쯧.]

[얼어 죽은 게 아니라 호상(虎喪) 입은 거 아니여?]

마을에 내려갔을 때 누가 얼어 죽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나도 그렇게 죽으려나. 도화는 피가 멈추지 않는 손을 쳐다보다 손등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발견했다.

‘눈?’

하늘을 올려다보니 작은 눈발이 순식간에 굵어졌다. 그리고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올려다보는 사이 도화의 머리와 어깨에 눈송이가 하얗게 쌓여 갔다.

“안 아파?”

멍하니 눈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는 도화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누구?’

놀라 크게 뜬 눈으로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안 아프냐고. 그거.”

여자아이였다. 도화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 펑펑 내린 눈 때문에 온통 하얗게 변한 산속에 홀로 나타난 여자아이가 도화를 쳐다보며 묻고 있었다. 아프지 않느냐고.

아이의 새카만 눈은 도화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 아…프지 않아.”

아까는 아팠는데 지금은 아프지 않다. 추위에 감각이 마비된 것인지 욱신거리지도 않았다.

“아파 보이는데.”

“안, 아파.”

“엄청 아파 보여.”

아이는 도화의 대답에 계속 반박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작은 앙증맞은 크기의 발자국이 생겨났다 금세 사라졌다. 그 정도로 눈은 쏟아지고 있었다.

“세수는 안 하고 살아?”

“세수……?”

아이가 갑자기 세수 타령을 했다. 도화는 마을 아이들에게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한 뒤로 하루에도 몇 번씩 씻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물이 있을 때나 가능했다. 지금처럼 겨울 가뭄이 심하면 세수마저도 못 하는 날이 태반이었다.

‘내 몸에서 냄새나나?’

도화는 바닥에 쌓인 눈을 한 움큼 집어서 얼굴에 마구 비볐다. 녹진 않았어도 이 정도 양의 눈이면 세수는 가능했다. 차가운 눈이 도화의 여린 피부를 거칠게 긁고 지나갔다. 조금은 녹았지만, 나머지는 찬 바람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도화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눈을 퍼다 세수했다.

바닥에 말라붙었던 피가 눈에 엉겨 떨어졌다. 아까 피가 난 줄 모르고 얼굴을 마구 문지른 흔적이었다.

“피가 더 나잖아. 쯧쯧.”

아이가 혀를 차며 바닥에 앉은 도화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계속 얼굴을 문지르는 도화의 손목을 낚아챘다. 작고 하얀 손에 잡힌 도화의 손은 눈과 피가 엉겨 흘러내린 붉고 묽은 물로 엉망이었다. 아이의 손에도 묻어난 것은 당연했다.

“어휴. 차가워. 너 혹시 인간이 아니라 얼어 죽은 귀신 같은 건 아니지?”

아이의 물음에 도화는 아니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눈에 젖은 머리카락과 속눈썹이 그새를 못 참고 얼어 버석거렸다. 아이는 아이스럽지 않게 계속 혀를 찼다. 그게 아니면 도화의 행동이 정말 한심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너는 따뜻하네.”

“당연한 거 아냐?”

도화는 아이에게 잡힌 손목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이마와 손에서 흐르던 피보다 훨씬 뜨거운 체온이었다.

방금 전까지, 죽으려던 고민을 단번에 날려 버릴 만큼 뜨거웠다. 그 정도로 도화의 몸이 차가웠단 의미이기도 했다.

“자, 가만히 있어 봐.”

아이가 제 옷자락을 끌어당겨 도화의 얼굴을 닦았다. 아이의 옷자락이 더러워지는 만큼 도화의 얼굴이 깨끗해졌다.

“많이 아팠겠네.”

이마를 닦던 아이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호미에 찍힌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한 듯했다. 도화가 손으로 이마를 더듬거리자 아이는 만지지 말라고 도화의 손을 찰싹 때렸다.

“윽….”

하필 때린 곳이 돌에 찍힌 곳이라 통증이 일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았나. 도화가 어깨를 움츠러트리며 아이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엔 경멸, 혐오, 두려움만 가득했는데 아이에게서는 그런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한심스러움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왜 그렇게 보냐고 발끈했겠지만, 도화는 오히려 고마웠다. 입 밖으로 바보, 천치, 멍텅구리 맹추라고 놀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도화 역시 성정이 그리 좋진 않지만, 아이라면 화를 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잠깐만 이렇게 있어 봐.”

“?”

아이는 이마를 가리던 머리카락이 상처를 가리지 않게 잡고 있게 도화의 손을 이끌었다. 도화가 순순히 따르자, 아이는 품에서 작은 천 주머니를 꺼냈다. 본디 하얬을 주머니였지만, 풀물이 들어 얼룩덜룩 지저분하게 변한 주머니였다.

주머니에서 말라비틀어진 정체불명의 풀떼기를 몇 가닥 꺼내 입에 넣었다. 그리고 꼭꼭 씹어 뱉은 풀을 이마와 손등의 상처에 붙여 주었다.

무슨 풀인지는 모르지만, 상처에 붙인 것을 보면 약초인 듯했다.

“고마워.”

“고마우면 나중에 사탕이나 사.”

“사탕……?”

그게 뭐지?

사탕이란 단어를 처음 들어 보는 도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는 그런 도화를 보고 또 혀를 찼다.

“진짜 바보네. 바보야. 너 이름, 뭐야?”

바보라고 불렸지만, 아까 자신했던 것처럼 화는 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을 물어봐 주어서 좋았다.

“홍도화.”

“홍도화? 흠. 이름 예쁘네.”

“너… 너는?”

도화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꾹 누르며 물었다. 처음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묻는 것은. 이름을 물어보기도 전에 날아온 돌에 맞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호윤.”

“호윤……?”

성이 없는 건지. 외자인 건지 애매한 이름이다. 하지만, 도화는 아이가 호윤이라고 소개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성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아이와 자신이 통성명을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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