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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79화 (80/146)

79화

“혼혈이라 그런가?”

강림 도령은 도화가 그림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에 신기해하며 이유를 찾으려 했다. 도화는 강림 도령의 관심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퉁명스럽게 답했다.

“도깨비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게. 도깨비가 아니면 나머지 반의 능력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제 피의 절반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저도 모르니까요.”

“흐음.”

본인도 모른다는데 더는 물어볼 수 없었던 강림 도령은 벌린 입에 술만 털어 넣었다. 갑자기 도화의 출신 성분을 캐묻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아드득, 묵범이 사탕을 으깨는 소리만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림 안에 업신이 있긴 한 겁니까?”

사탕을 다 먹은 묵범이 그림을 툭툭 치며 화제를 돌렸다. 본인도 도화의 반쪽 피의 근원이 궁금하긴 했으나 이런 일로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없어.”

“……없다고요?”

강림 도령의 대답이 믿기지 않는지 도화는 그림을 직접 손으로 만져 보았다. 안에 무언가 있다면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다.

“진짜 없어. 믿기 힘들면 네 검으로 찔러 보든가.”

검으로 찔러 보란 말에 도화는 목에 걸어 둔 현천을 내려다보았다. 강림 도령 앞에서 현천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꺼낸 적은 없으나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도화는 어찌 알았냐는 질문 대신 바로 현천을 움켜잡았다.

“찔러 봐.”

강림 도령의 명령에 도화는 지체 않고 바로 두꺼비의 머리를 찔렀다. 푹! 소리가 나며 현천의 검 끝이 그림을 뚫고 탁자를 관통했다. 그 모습을 본 강림 도령의 두 눈이 반짝였다.

“과연 현천상제의 무구로군. 아무리 업신이 떠났다지만, 그래도 신의 흔적이 남은 그림을 아무렇지 않게 뚫어 버리다니. 대단해.”

도화는 강림 도령의 감탄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그림에 집중했다. 시커먼 기운을 뿜어내던 그림이니 분명 안에 업신이든 금섬이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강림 도령의 말대로 아무것도 없는 게 맞았다.

두꺼비 머리가 찢기자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사기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 그런 위험한 기운을 풍겼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평범한 그림으로 변했다. 물론 그림은 여전히 유려했으나 안에 사악한 것이 들어 있다는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다.

몇 번 더 그림을 이곳저곳 찔러 보던 도화는 아무 반응이 없자 현천을 다시 목걸이로 돌려보냈다.

“수상한 상자는 뺏기고, 그림 속 업신은 사라졌고. 천우인도 못 잡고, 그나마 데려온 오창석의 영혼은 상태가 엉망이라니. 이것 참,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군요.”

묵범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내용은 좋지 않은데 얼굴은 참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그에 비해 강림 도령은 일주일 내내 집에도 가지 못하고 야근한 사람처럼 변했다.

도화가 생각하기에도 이번에 벌어진 일은 무엇 하나 시원하게 해결된 것이 없었다. 그래도 오창석의 영혼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구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의식이 명료하진 않지만, 그래도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하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했으니 호전될 가능성은 있다고 봤다.

“그래도 어디 한 군데 다치지 않고 귀환해서 다행이야. 그림은 무구부에 넘기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강림 도령은 그림을 돌돌 말아 옆구리에 꼈다. 깃들어 있던 업신은 사라졌지만, 잔재는 남았을 테니 연구할 가치는 충분했다.

강림 도령을 따라서 일어난 도화는 오늘 벌어진 일 중, 그나마 얻은 성과인 오창석에 대해 물었다.

“오창석의 혼은 어찌할 겁니까?”

“아, 오창석.”

국장실로 나가려던 강림 도령이 도화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통 특정 물건에 대해 물어보면 그 물건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지기 마련인데 강림 도령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창석의 혼을 가져온 묵범과 도화에게조차 오창석의 혼이 든 상자 위치를 숨기려는 의도가 선명했다.

[신기하구먼. 분명 눈앞에서 혼이 경면주사를 치웠다는 것까진 기억나는데 어디에 보관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현천이 놀랍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화도 마찬가지였다. 탁자 위에 올려진 경면주사 구슬까지는 기억이 또렷한데 그 뒤는 희미하다. 어딘가에 구슬을 넣고 그걸 눈앞에서 치웠는데…. 그 부분만 지우개로 벅벅 지운 것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묵범도 도화와 같은 상황인지 살짝 인상을 쓰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오창석의 혼은 천계로 가져가 볼 생각이야.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라니 수복 가능성은 있지 않겠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지만, 역천의 단서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큰 수확이 될 거야.”

강림 도령은 ‘역천’이란 단어만 아주 작게 속삭였다.

“아, 맞다. 홍 차사. 자네한테 빌렸던 귀령면 말이야. 무구부에 가면 돌려줄 거야. 범 수석이랑 같이 가면 되겠군. 부용삭. 새로 받아야지?”

“그러면 무구부에 들렀다가 바로 퇴근하겠습니다.”

묵범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퇴근이란 말에 강림 도령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뭐? 퇴그은? 지금 내 앞에서 퇴근이라고 했냐? 어엉?”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빡세게 일했는데 당연히 퇴근해야지요. 게다가 오늘은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고요.”

“생명의 위협? 네가? 허이구. 퍽이나 생명이 위험했겠다.”

강림 도령의 빈정거림에 도화는 조용히 자신의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말라 버린 천우인의 피 때문에 운동화 끈이 검붉게 변해 있었다.

“묵범의 말이 맞습니다.”

“위험은 너 때문에 예산이 간당간당한 무구부와 복상부겠… 으응? 홍 차사. 지금 뭐라고 했나?”

“묵범의 말이 맞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위협…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강림 도령이 의심의 짙게 깔린 눈빛으로 묵범과 도화를 번갈아 쳐다봤다. 겁에 질린 척, 가증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묵범을 보면 거짓말이 분명한데, 세상 진지한 얼굴로 묵범을 옹호하는 도화를 보자니 진짜 위험했던 게 맞는 것 같았다.

“임무 중엔 절대 방심하지 마. 추혼부에 너 없으면 전력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자각 좀 하고. 알았냐?”

도화의 지원 사격에 힘입은 묵범은 강림 도령의 걱정을 받아 냈다. 묵범이 추혼부에서 빠지면 전력 보충을 어디서 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에 우러나온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 * *

국장실에서 나와 무구부로 향하던 묵범은 카페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간단하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도화는 묵범의 음료가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묵범의 주문은 안 봐도 뻔했다. 한 번 들어선 외우지 못할 긴 이름의 어쩌고저쩌고 혈당 폭발 음료일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행복한 표정으로 카페를 나온 묵범의 양손엔 온갖 커스텀을 하고 휘핑을 산처럼 쌓은 커피가 들려 있었다. 화룡점정으로 하얀 휘핑크림 위에 초코 시럽까지 잔뜩 뿌려져 있는 것을 보니 커피의 탈을 쓴 설탕물이 틀림없었다.

쭈우우욱-.

한 모금 쭉, 빨자 순식간에 휘핑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양손에 든 음료를 번갈아 가며 순식간에 해치웠다.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순간적으로 저게 그렇게 맛있나?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우. 단내가 여기까지 풍기네.]

목에 걸려 있던 현천이 스르륵 빠져나오더니 도화의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도화는 옆에서 폴폴 풍기는 초코 시럽 향을 차단하기 위해 커피 컵을 입에 물었다. 이럴 줄 알고 샷 추가를 다섯 번이나 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썼지만, 묵범에게서 나는 단내를 차단하기엔 최고의 선택이었다.

무구부에 도착하기 전에 두 잔이나 해치운 묵범은 사탕으로 입가심을 했다. 도화는 귀령면을 돌려받으면 바로 집으로 달려가 쉴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무구부에 도착하자마자 무구부 내부로 끌려 들어가며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진짜 호, 호, 홍 차사님이 맞습니까?!”

“홍 차사님이 오셨어!”

“우와악! 범 수석님도 오셨다!”

“……?”

도화는 갑작스러운 환대에 어안이 벙벙했다. 묵범은 이 상황이 익숙하단 듯이 무구실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커피요. 달게.”

“그럼요. 그럼요! 홍 차사님도 여기 앉으시죠!”

“아, 예…. 예에…….”

도화는 무구부 차사들의 과할 정도로 들떠 있는 분위기가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긴 죄다 광인들만 모아 둔 거냐. 왜 이렇게 미쳐 있어?]

광인. 현천의 말대로 광인들의 모임 같다. 무구를 연구하는 곳이라 그런가 다들 하얀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저기 꼬질꼬질한 게 일을 열심히 한 티가 났다.

‘일을 열심히 하는데 즐거워한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무구부는 진짜 미친놈 소굴이구나. 도화는 어서 여길 빠져나가고 싶었다. 지금껏 온갖 험한 일을 쉬지 않고 하면서 단 한 번도 일을 그만두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이 즐겁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이 쉽든 어렵든, 돈을 많이 받든 적게 받든. 일은 일이니까. 절대 즐거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 무구부 차사들은 대체…?

“홍 차사님! 홍 차사님 덕분에 휴대용 기척 은폐 무구를 만들었습니다.”

“예? 네?”

한 차사가 퀭한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도화에게 꽃 모양 머리핀 하나를 내밀었다. 무구부 차사의 박력에 밀려 얼떨결에 머리핀을 받은 도화는 이걸 뭐 어찌하라는 건지 몰라서 손가락 끝만 꼼지락댔다. 덩치 큰 남자가 알록달록한 꽃이 달린 머리핀을 손바닥에 올린 모습은 누가 봐도 웃음이 나올 모양새였지만, 도화를 빙 둘러싼 무구부 차사들은 진지 그 자체였다.

“흑립처럼 모습까진 숨기지 못하지만, 기척만큼은 완벽하게 숨길 수 있습니다. 비록 일회용이지만, 기척 은폐 기능만큼은 귀령면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합니다.”

목에 차사증을 건 여자가 자랑스럽게 말하며 다가왔다. 차사증을 보니 ‘무구부 수석 하 차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제 도포 깃에 주르르 꽂힌 머리핀들을 도화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자, 평소에는 이렇게 끼고 다니다가.”

[누가 평소에 저걸 저기다 저렇게 끼고 다닌다냐.]

현천이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도화와 묵범에게만 들리게 한 말이라 무구부가 뒤집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 꽃 모양을 꾹 누르면 기척 은폐가 한 시간 적용된답니다.”

“그렇…군요.”

“호호. 이건 꽃이 좀 크죠? 2시간짜리라 그래요.”

“꽃이 클수록 시간이 오래 가나 봅니다.”

도화는 어서 이 대화를 끝내고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형식적인 대꾸를 한 것이었는데. 무구부 수석은 귀령면의 주인이 자신들의 개발품을 컨펌해 준다고 이해했다.

“다섯 시간 정도로 늘려 볼까요? 꽃이 좀 커지겠지만, 성능만 확실하다면 상관없겠지요?”

“그, 그렇겠죠.”

“좋아! 당장 개발품의서부터 작성한다!”

하 차사의 외침에 무구부 차사들이 환호했다. 이쯤 되니 도화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옆에 앉은 묵범은 이 상황에서도 싱글싱글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미친놈은 미친놈과 통하는 게 있나 보군. 그런데 언제 집에 가냐?]

아무래도 퇴근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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