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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78화 (79/146)

78화

천우인의 등장 소식에 차사국이 술렁거렸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정보는 아니지만, 추혼부 수석 차사 묵범과 그의 파트너 홍도화가 외근 중에 천우인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졌다.

구미호, 이무기, 장산범, 손각시 등 인간들도 잘 아는 귀물은 많다. 하지만,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귀물은 그보다 수십 배는 많을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삼계를 통틀어 실제로 본 적은 거의 없는 귀물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 많진 않지만, 문헌이나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귀물.

지금 차사국을 들썩이게 만든 천우인이 그중 하나였다.

하늘에서 우박이 내리는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사람의 머리였더라. 천우인이 내리면 역병이 돌거나 전쟁이 난다는, 좋지 못한 소문의 주인공이다. 지금은 사라진 옛 문헌에는 천우인이 내린 하룻밤 사이에 한 나라가 멸망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역병 때문인지, 천재지변 때문인지, 아니면 천우인이 가진 살상력이 엄청나서인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그런 천우인이 나타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에 큰 재난이 올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차사국 내에 돌기 시작했다.

“진짜 천우인이냐?”

국장실 술 창고에서 묵범과 도화를 맞이한 강림 도령이 퀭한 얼굴로 물었다. 고작 반나절 만에 만났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아주 죽상이 되어 있었다.

“홍도화 씨가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정말 천우인이었어?”

이번에는 도화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도화는 순간이었지만, 자신이 본 그것의 생김새를 말했다.

“천우인이 훔쳐 간 상자도 수상합니다. 그림이 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림은 화단에 묻혀 있던 걸 보면 그 상자에는 보다 더 위험한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도화의 설명을 들은 강림 도령은 마른세수를 했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천우인까지 튀어나온 거냐…. 훔쳐 간 상자는 또 뭐고.”

“그래도 한 놈만 나온 거니 아직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도화의 어색한 위로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마리든 백 마리든, 어쨌든 천우인이 나타난 것은 좋지 않았다.

“경주에서 나왔다고 했나? 안 그래도 일손 모자라 죽겠는데. 쯧.”

“비번인 차사들 호출하시죠.”

묵범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추혼부 차사들은 비번 없이 풀 근무에 추가 근무까지 하는 상황이니 탐색 같은 작업에 차출될 일은 없었다.

“뭐야. 네 일 아니라고 쪼개냐?”

“그럼요. 제 일은 악귀 때려잡는 거 아닙니까?”

분하다는 듯이 이를 간 강림 도령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묵범의 말대로 비번인 차사들을 소집 명령을 내렸다. 천우인 탐색 팀을 꾸려 당장 경주로 내려가라는 내용이었다.

“부용삭을 이빨로 끊어 낼 정도로 치악력이 대단하니 준비 단단히 하고 내려가.”

강림 도령이 전화로 지시를 내리는 동안 묵범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오는 길에 당 보충을 하고 싶었으나 화단 흙 속에서 발견한 상자를 강림 도령에게 보고하는 게 먼저라 카페에 들르질 못했다.

“하나 줄까요?”

바스락, 사탕 껍질 까는 소리에 도화가 쳐다보자 하나 더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도화는 제게 내밀어진 사탕을 빤히 쳐다보며 고민했다.

‘설마… 경면주사 구슬이 사탕으로 변한 건 아니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상대가 묵범이기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물었다.

“오창석은?”

“아, 맞다.”

묵범이 깜빡했다며 주머니에서 붉은 구슬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냐?”

“오창석의 혼을 담은 경면주사입니다.”

덥석 구슬을 집으려던 강림 도령의 손이 우뚝 멈췄다.

“오창석…?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묵범과 구슬을 번갈아 쳐다보던 강림 도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술 창고 구석에 달린 방으로 들어갔다. 무얼 찾는지 우당탕 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림이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게 뭡니까?”

“무구부에서 전에 만들었던 보안 상자.”

생긴 것은 평범해 보였지만, 무구부에서 만들었다고 하니 좀 달라 보였다. 강림 도령은 오창석의 혼이 든 구슬을 조심스럽게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잠금장치도 없는 상자였지만, 그가 상자 표면을 톡톡 두드리니 상자의 기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면 믿기 힘든 현상이었다.

“흑립의 기능을 응용한 상자이지. 아예 보이지 않으면 상자 주인도 찾기 어려우니까 존재감만 지운 물건이야.”

그는 상자를 주류 진열대에 술 한 병을 꺼내고 빈자리에 상자를 넣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묵범과 도화는 방금까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던 상자의 존재감이 완벽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상자가 있던 자리에서 가져온 술을 한 모금 마신 강림 도령의 퀭했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쩌면 밤새 일을 해서가 아니라 단지 혈중 알콜 농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혼은 멀쩡하던가?”

“아니요. 위험합니다.”

도화의 즉답에 강림 도령은 예상했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사지 말단부터 부서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의식도 희미한 듯했고요.”

“희미하단 말은 있긴 있단 소리군.”

“죽기 직전 생각했던 게 그림이었는지 그림을 찾아 경주까지 왔더군요. 덕분에 그림은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아, 저게 그림이라고 했지? 어디 좀 볼까?”

그제야 천우인과 오창석 때문에 화제에서 잊혔던 그림이 탁자 위에 올랐다.

“어디 구경 좀 해 볼까?”

강림 도령은 부적을 뜯고 상자를 연다는 선택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처럼 냅다 손칼로 길쭉한 금속 상자의 가운데를 내리쳤다. 그러자 금속 표면이 칼에 베인 두부처럼 약간의 마찰도 없이 뚝 잘렸다.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일에 당황한 도화와 달리 묵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의자에 느긋이 앉아 사탕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그…림은 괜찮은 겁니까?”

안에 그림이 있다고 했는데 모서리도 아니고 가운데를 자를 줄이야. 강림 도령의 힘에 놀란 도화는 그의 앞뒤 재지 않고 냅다 후려친 행동력에 또 놀랐다.

“그럼. 타락한 업신도 어쨌든 신이긴 하니 이 정도는 버티지. 안 그러면 업신이 아니라 한낱 귀물 아니겠어?”

강림 도령의 말대로 상자는 잘렸지만, 돌돌 말린 그림은 멀쩡했다. 오히려 그림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강림 도령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우려가 되는 상황이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그림인지 봐야겠다.”

강림 도령은 그림을 빼내 탁자에 펼쳤다. 상자가 워낙 길쭉해서 그림도 클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림은 고작 B4용지 크기였다. 상자가 길쭉했던 이유는 돌돌 말아 넣은 그림의 위, 아래로 부적을 쑤셔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니 강민진의 사업은 부적을 사느라 망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좁은 상자에 갇힌 탓에 진하게 농축된 사기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 기세는 몇 초 지나지 않아 힘없이 꺾였다.

원귀와 악귀, 사기(邪氣)를 품은 귀물은 차사국에서 버티기 힘들다. 차사국에 있는 저승시왕의 기운이 그런 것들이 발조차 붙이지 못하게 했고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지은 차사국이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도 무구부에서 새로이 정화 아이템을 만들면 제일 먼저 적용해 보는 곳에 차사국이고 정화부가 주기적으로 건물 전체를 정화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래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기운을 손으로 툭툭 쳐낸 강림 도령은 진지하게 그림을 살폈다. 사기가 한풀 꺾이자 도화도 슬쩍 가까이 다가가 구경했다.

작은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은 수묵담채화였다. 연못과 연잎, 그리고 작은 두꺼비 한 마리. 색이 칠해진 것은 두꺼비뿐이었다. 재복을 부르는 금섬을 그렸을 테니 금빛, 아니 노란빛이라도 띠어야 할 텐데. 그림 속 두꺼비는 탁한 주홍빛을 띠고 있었다.

“흠. 누가 그렸는지 몰라도 참으로 못났군.”

한참 동안 그림을 살피던 강림 도령이 못났다는 평을 내렸다. 하지만, 도화는 강림 도령의 평가에 동조하지 못했다. 참으로 못났다는 평가를 받기에는 먹의 농도며 세밀한 표현력이며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그는 이런 그림을 못났다고 평하는 강림 도령을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묵범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강림 도령을 거들었다.

“진짜 역하군요.”

“……?”

뭐지? 내가 모르는 게 저 두 사람에겐 보이나?

도화는 눈을 비볐다. 혹시 내 눈만 이상한 거 아냐?

[허어. 이것 참. 머리가 울릴 정도군.]

이젠 현천까지 가세했다. 못났고, 역하고, 머리가 울릴 정도의 엉망인 그림이라. 도화는 퇴근길에 안과에 들르기로 다짐했다. 아무래도 제 시력에 크나큰 문제가 있나 보다. 아니면 뇌파 검사라도 받아야 하나. 우선 안경부터 맞추고—.

“홍도화 씨는 이 그림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습니까?”

“어… 난 괜찮은데? 오히려 엄청 잘 그린 그림 아니야?”

머쓱해하며 감상을 말하자 강림 도령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도화가 진심으로 말한 것인지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머리가 아프진 않습니까?”

“전혀.”

“어지럽다거나.”

“전혀.”

“속이 울렁거린다거나.”

“멀쩡하다니까? 도대체 저 그림이 어떤데 그래?”

“어떻긴. 보는 사람의 정신을 흔들고 있지.”

강림 도령이 대신 대답했다. 그는 멀쩡한 도화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흔든다고요?”

“그래. 그림을 보는 사람의 정신을 홀리게 하는 기운이 서려 있어. 우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기운이 흘러나오게 해 두다니. 봉법부 때문에 사기가 농축되어 있지 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군.”

강림 도령은 더는 보기 역하다며 그림을 뒤집어 버렸다. 사기는 여전히 굼실대고 있지만, 그림 속 두꺼비와 마주하지 않아서인지 강림 도령과 묵범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우리야 그냥 기분이 더러운 것 빼고는 괜찮다지만, 이 그림에 평범한 인간이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아무리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미쳐 버릴 거다.”

“아, 그래서…….”

도화는 강민진의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목격했던 광경과 가족사진이 걸려 있던 내부를 떠올렸다. 자신의 예상대로 강민진의 가족은 원래 화목했던 게 맞았다. 저 요망한 것이 강민진에게 오지 않았다면 화목하고 부유하게,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저런 그림을 그릴 만한 자가 있습니까?”

묵범이 강림 도령에게 물었다.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분명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유명한 사람일 텐데. 그런 자가 있는지 떠올리려 해도 당장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강림 도령에게 물은 것인데, 대답은 ‘아니.’였다.

“그런 놈이 있으면 당장 잡아 왔겠지. 하계를 위험에 빠트릴 놈을 내가 내버려 뒀을 것 같냐?”

“하긴. 그렇긴 하네요.”

안 그래도 일손이 모자란 차사국에 일하는 것은 질색하는 강림 도령이다. 대량 살상의 위험분자를 순순히 하계에 풀어 둘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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