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모습을 숨기기 위해 다시 도화의 목걸이에 매달린 현천은 의아하단 듯이 말했다.
[아무리 봐도 원귀는 아닌 것 같은데?]
현천의 말대로 오창석의 혼은 원귀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희뿌연 것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혼이 저리 변한 건 처음 본다. 오창석도 다른 불의사망자처럼 혼이 윤회도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지고 있는 건가?
도화는 오창석의 혼을 저리 만든 범인이 근처에 있나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지금껏 잡히지 않은 정체불명의 범인이 도화의 눈에 쉽게 걸릴 리 없었다.
오창석은 창백한 손으로 화단의 흙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원귀나 악귀가 사람과 사물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건 짙게 농축된 한, 음기 덕분이다. 하지만, 원귀도 악귀도 아닌 오창석의 손에 흙이 파헤쳐지고 있다. 그만큼 간절함이 강하다는 증거였다.
도화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주변을 경계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화단을 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림이 든 상자는 묵범이 가지고 있으니, 그림이 아닌 다른 이유. 그게 뭘까.
오창석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는 도화의 귀에 파삭. 아주 얇은 막이 깨지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듯 스쳤다. 너무 미약한 소리라 제대로 들은 건지 긴가민가하는 순간, 또다시 파삭,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바짝 마른 나뭇잎이 가지에서 떨어져 바닥에 닿는 소리 같았다. 그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소리였다.
도화는 본능적으로 오창석을 엄호했다. 갑작스러운 도화의 행동에 현천은 놀라는 대신 도화의 반대쪽으로 날아가 오창석을 가로막았다.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무엇 때문에 나는 건지 고민할 새도 없이 본능은 그것이 오창석의 혼에서 나는 소리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묵범의 이름을 외쳤다.
“묵범!!!!”
지금 태평하게 통화나 하고 있을 때냐?! 도화는 터지려는 울화를 꾹꾹 눌러 담아 묵범을 불렀다. 오창석이 혼이 멀쩡했다면 고민하지 않고 부용삭으로 묶었을 텐데.
파삭- 소리의 정체는 오창석의 손가락에서 나는 소리였다. 온 힘을 끌어모아 땅을 파느라 모습을 유지할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윤회도 못 할 정도로 혼이 망가진다는 게 저런 걸 말하는 것이구나. 도화는 살면서 가장 조용하고 깨끗한 두려움을 처음으로 목도했다. 저건 죽음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다.
[이제… 난 끝인가?]
화단의 흙을 파내던 오창석이 바스러져 사라진 제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끝.’
오창석의 중얼거림을 들은 도화는 차가운 벼락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충격을 받았다. 오창석이 뭘 알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다.
끝. 말 그대로 마지막.
나중, 다음, 추후라는 말은 허용되지 않는 삶의 종국.
“홍도화 씨? 무슨 일입니…….”
뒤늦게 달려온 묵범의 시선이 도화에게서 오창석에게 옮겨갔다. 그는 바스러지고 있는 혼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바로 팔찌를 빼내 들었다.
“안전하게 할 수 있어?”
“노력해 보죠.”
경면주사 구슬을 누르는 묵범의 손끝이 평소보다 조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도화의 외침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묵범이 한걸음에 달려와 본 것은 희미하다 못해 흩어지는 하얀 연기 같은 혼 하나와 멀쩡한 도화의 모습이었다.
우선 도화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그는 도화가 상황 설명을 하기 전에 위태로워 보이는 혼을 구제하기 위해 움직였다. 속이 빈 경면주사 구슬을 만지던 그는 손짓으로 도화를 물러나게 했다. 도화가 있던 자리로 이동한 묵범이 조심스럽게 흑립을 벗었다.
[끝…. 끝…….]
오창석은 묵범이 갑자기 나타난 줄도 모르고 부서지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양 손가락은 모두 사라지고 손바닥마저 바스러지고 있었다.
묵범은 팔찌에서 구슬 하나를 골라 빼냈다. 한 번도 원귀나 악귀를 담은 적이 없는 깨끗한 경면주사 알맹이였다.
그리고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주 천천히, 오창석이 놀라지 않게 구슬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손이라고 해 봤자 이제 손바닥의 절반이 넘게 사라진 상태였지만, 작은 구슬 한 알이 올라갈 정도의 면적은 남아 있었다.
“아직 완전히 끝은 아니니까, 잠시 이 안에서 쉬면 됩니다.”
[끝이… 아니라고……?]
그 말을 끝으로 오창석의 영혼이 붉은 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창석을 빨아들인 구슬을 안전히 손에 넣은 묵범은 순간, 등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져 황급히 몸을 돌렸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기척이라 어떤 의도로 달려드는 건지 파악할 새도 없었다. 피하자니 팔이나 다리 하나는 내어 줘야 할 것 같고, 반격은 아예 할 틈조차 없는 속도였다. 할 수 있는 것은 방어뿐.
그는 급히 기운을 끌어올려 충격을 견딜 준비를 했다. 목숨을 위태롭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온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충격을 대비하던 묵범은 퍼억!! 소리와 함께 달려들던 기운이 순식간에 멀어진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섬뜩한 기운 대신 묵범의 귀에 짜증 섞인 도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 새끼는?”
“?”
도화는 날아온 것을 발로 날려 버린 듯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아까 퍼억! 소리가 발에 차인 소리인 건가? 그런데 뭐가 날아온 거지? 묵범이 의아한 눈으로 섬뜩한 기운이 사라진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맑게 갠 가을 하늘이 다였다.
“뭐였습니까?”
“천우인(天雨人). 내가 발로 차 버렸어.”
“천우인이요? 정말입니까?”
깜짝 놀란 묵범이 다리를 내리는 도화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살폈다.
“왜 이렇게 유난이야.”
“천우인이잖습니까. 어디 물린 곳이라도. 아, 다리!”
묵범은 그대로 주저앉아서 도화의 다리와 신발을 살폈다. 다행히 다리는 멀쩡했다. 대신 검은 운동화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운동화 끈이 흰색이었는데.’
지금은 축축하게 젖은 붉은색이다. 피였다. 천우인의 피.
그는 한 번 더 도화의 바지를 들어 올리면서까지 물린 곳이 없나 확인했다.
도화는 됐다며 묵범의 손에서 다리를 빼냈다. 그리고 오창석이 손이 부서지도록 파던 화단으로 향했다.
“이쯤이었는데. 현천. 이리 와 봐.”
[엉? 뭔데? 무슨 일이야?]
도화는 제 부름이 날아든 현천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화단의 흙을 파기 시작했다.
[우왁! 야! 이 녀석아! 예의는 물에 말아 처먹었냐! 으웩! 퉤퉤퉤!!!]
현천의 검신은 마른 흙 속으로 손잡이까지 사라졌다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입도 없으면서 흙이 입에 들어갔다느니, 흙 때문에 숨을 쉴 수 없다는 둥 요란법석을 떨었다.
도화는 그런 현천의 외침을 무시하고 묵묵히 화단을 파헤쳤다.
묵범은 도화가 멀쩡히 움직이자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오창석의 혼이 든 구슬을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도화의 맞은편에 쭈그려 앉아 같이 흙을 팠다. 무얼 찾는진 묻지 않았다. 설마 심심해서 흙장난을 할 린 없을 테니까.
[으악. 그만! 그만해! 아이고. 아이… 어?]
현천의 곡소리가 뚝 그쳤다. 그와 동시에 흙을 파던 도화의 손도 멈췄다.
“뭡니까?”
“뭔가 검 끝에 걸렸어.”
도화는 현천을 옆에 내팽개치고 손으로 나머지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검 끝에 닿은 느낌으로 보아 금속으로 된 물건 같았다.
흙 속에서 꺼낸 상자는 폭이 좁고 길쭉했다. 그리고 집 안에서 본 것과 같은 봉법부가 발려 있었다. 현천에게 찍혀 찢어진 부적 사이로 드러난 표면은 색은 검었지만, 검 끝에 닿았던 느낌대로 금속이었다.
“이게 그림이야.”
“무슨 말입니까?”
“오창석이 여길 파면서 ‘그림을 찾아 없애야 해.’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었어. 이게 그림이 맞아.”
“그러면 2층에서 발견한 그 상자는요?”
“열어 봐야 알겠지.”
“…….”
잠시, 침묵하던 묵범이 벌떡 일어섰다. 놀란 도화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묵범은 벗었던 흑립을 다시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차에 가 봐야겠습니다.”
“왜?”
“그 상자. 차에 두고 왔거든요. 속에 뭐가 들어 있든 간에 위험한 것은 확실한 것 같으니 좀 더 단단히 묶어 둬야-.”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 도난 방지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둘은 주차장을 향해 뛰어갔다.
* * *
“… 이미 털렸군.”
상자를 두었던 뒷좌석에는 묵범의 부용삭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유리창은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걸 본 도화는 상자를 훔쳐 간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천우인이야.”
“아까 발로 찼다는 그 천우인 말입니까?”
“어. 크기가 딱 그거네. 내가 날려 버린 방향도 이쪽이고.”
“천우인이라. 진짜 천우인이 맞습니까? 잘못 본 건 아니고요?”
묵범이 매끈한 턱을 손으로 쓸며 물었다.
“천우인이 아니면 누가 저걸 갉아 놨겠냐.”
도화는 천우인을 찼던 발로 땅을 툭툭 차며 짜증을 냈다. 묵직하게 뭉그러지던 감각이 그대로 달라붙은 것 같았다.
“하긴. 그렇긴 하네요.”
묵범은 뒷좌석에 뚝뚝 끊어져 있는 부용삭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끊어진 부용삭의 단면은 날카로운 것으로 단번에 끊어 낸 것처럼 아주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한 마리 더 안 나오려나.”
“…왜?”
“국장님한테 선물하려고 합니다. 요즘 과중한 업무에 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깜짝 선물을 하면 피로가 회복되지 않을까요?”
“… 미친놈.”
도화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건 미친놈이다. 그는 천우인이 또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묵범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천우인. 이름대로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사람 머리 귀물이다. 천우인의 얼굴은 죽은 자의 것을 베껴 온 것인데 멀쩡한 얼굴을 한 천우인은 찾기 어렵다. 그 이유는 죽는 그 순간의 얼굴을 베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도화는 천우인의 피로 붉게 물든 운동화를 내려다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도화가 발로 찬 천우인의 얼굴은 낙사로 죽은 인간의 얼굴을 베낀 것인지 머리의 절반이 으깨진 모습이었다.
만약 천우인이 노리는 게 묵범이 아니었다면 발로 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 천우인에게 물리기라도 한다면 살은 기본이고 뼈도 내어 줘야 했을 테니까.
저승차사의 부용삭도 저렇게 끊어 낼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천우인의 이빨엔 독이 있어서 물리면 서서히 몸에 힘이 빠진다. 단순히 기력을 빼앗는 독이라 당장 죽진 않지만, 한창 싸우는 중에 힘이 빠지면 그 결과는 어찌 될지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묵범은 한참을 그렇게 천우인을 찾다가 아쉬운 얼굴로 차에 올라탔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이 되었다. 짙어지는 노을에 물든 하늘은 이쪽의 심각한 상황과 상관없단 듯이 평화로워 보였다.
“차사국으로 갑니다. 가는 데 시간 좀 걸리니까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요.”
도화는 묵범의 듣기 좋은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뒷좌석의 깨진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거슬리긴 했지만,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덜컹거리는 조악한 단칸방에서도 지낸 경험 때문인지 그다지 거슬리진 않았다.
‘그 상자 안엔 뭐가 들어 있던 걸까.’
오창석의 혼과 그림을 챙겼다. 하지만, 도화의 온 신경은 사라진 상자에 쏠렸다. 수중에 없으니 가장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