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왜요?”
묵범이 바로 반문했다. 어제 자신과 도화가 그 고생을 했는데 손을 떼라니. 억울했다.
“금섬… 아니, 금섬 흉내를 내는 업신은 좀 더 조사해야 하니 우선은 오창석의 영혼부터 회수해.”
“아, 맞다. 오창석.”
도화가 잊고 있었단 듯이 오창석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관상까지 봐 놓고는 정작 그의 영혼의 행방을 전혀 궁금해하지 않고 있었다.
“오창석에게서 뭔가 본 게 있나?”
고작 무얼 봤는지 질문을 받은 것뿐인데 다시 그때 그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아서 몸이 부르르 떨린다. 도화의 떨리는 몸을 확인한 묵범이 물어보지 말라고 인상을 썼지만, 도화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별거 없었습니다.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영혼이 떠난 육신이라 모든 게 다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흠. 그래?”
“유년 시절이 가정 학대와 학교 폭력으로 점철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버티려고 했으나 금섬… 아니, 업신을 만나 결국은 원귀가 된 강민진에게 죽은 게 전부입니다.”
도화의 대답을 들은 강림 도령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것처럼 손톱으로 탁자를 긁었다.
“명부를 확인해 보니 원래 오창석은 최소 10년은 더 살아야 하는 인간이었더군.”
어제 통화했던 정보부 차사도 ‘오늘 거기서 죽을 사람은 원래 없는데 갑자기 명단이 추가되었다.’고 했었다. 차사국의 전산 시스템에 오류가 생겼겠거니 했는데. 최소 10년은 더 살아야 한다는 말은 전산 오류가 아니라는 의미다.
“설마… 불의(不意)사망이란 말입니까?”
묵범이 꽤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도화는 불의사망이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이 오긴 했으나 정확한 의미는 몰라서 가만히 두 눈만 껌뻑였다. 강림 도령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차사들이 사용하는 단어인 듯했다.
“아, 홍도화 씨는 불의사망이 뭔지 잘 모르겠군요.”
“대충 어떤 의미인진 알 것 같아. 예기치 않은 사망… 이런 거 같은데.”
“맞습니다. 명부에 적힌 예정된 죽음이 아닌 갑작스러운 사망을 말하는 겁니다. 아주 드문 일… 아니,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망이라서 오창석의 사망은 전산 오류인 줄 알았습니다.”
전산 오류라는 말에 탁자를 긁던 강림 도령의 손이 술병으로 옮겨 갔다. 남은 술을 병째 들이켠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아직 윗선에 보고를 올릴 만큼 조사가 진행된 게 아니라 말해 줄 수 있는 건 매우 한정적이지만, 가장 위험한 현장에서 뛰는 추혼부이니 이 정도는 알아 둬야 하겠지.”
“…무슨 일이 있습니까?”
“?”
후우—.
강림 도령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렀다. 독한 술 냄새가 함께 탁자 위를 어지럽혔다.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어도 술만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 보이던 사람이 술을 마셔도 그다지 좋아 보이질 않았다.
[뭔진 모르지만 심각해 보이는데?]
가만히 경청하던 현천이 슬쩍 말을 걸었다. 그가 보기에도 강림 도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나 보다.
“범 수석의 말대로 불의사망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망이지.”
한숨 끝에 나온 이야기는 불의사망에 대한 것이었다.
“불의사망이란 것도 약 600년 전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단어야.”
‘600년 전?’
인간 기준으론 옛날이야기겠지만, 귀물인 도화에겐 그리 오래 지난 일은 아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취급당하는 도화의 나이가 500세 전후니 말이다.
어쨌든,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가 시작되자 도화는 귀를 열고 경청할 준비를 했다. 혹시 제 스승의 사망과 연관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들어 보긴 했습니다. 추혼부 차사의 사망 사건이 첫 불의사망이었죠.”
“차사가…?”
경청하려던 다짐은 1분도 지나지 않아 깨졌다. 불의사망이란 단어가 있으니 그걸 당한 사람은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차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차사국 추혼부 차사. 월아. 차사국에 몇 안 되는 이름을 가진 차사였지.”
‘월아’라는 이름을 말하는 강림 도령의 얼굴에 그리움과 안타까움, 분노와 허탈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찰나였지만, 그가 그 차사를 꽤… 아니, 무척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이 있는 차사가 무얼 의미하는지 정도는 도화도 안다.
대부분의 차사들은 김, 이, 박, 최 등 성씨로 불린다. 이들은 차사의 자질이 보이는 망자 출신으로 과거의 기억은 생전에 쓰던 이름의 성만 기억하기에 이름 대신 성으로 불린다.
이름이 있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묵범과 홍도화처럼 외부에서 차사국으로 유입된 경우다. 강림 도령도 이 경우에 속한다.
다른 한 가지는 신에게 직접 이름을 받는 것이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신의 어여쁨을 받는 차사들이 그 경우인데,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월아라는 차사는 외부에서 스카웃 된 차사입니까?”
도화의 질문에 강림 도령은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신이 특별히 어여쁘게 여겨 직접 이름을 하사한 차사였어.”
“능력이 매우 뛰어났었나 보군요.”
“뛰어났기도 했고.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여자였지.”
강림 도령은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피식 웃기까지 했다. 어린 청년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미소였다.
“차사에게도 명부가 있다는 건 자네도 알겠지. 명부라기보다는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라고 하는 게 맞겠군. 어쨌든 월아는 전환점에 한참을 못 미쳐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게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벌어진 불의사망이야.”
중간에 굉장히 중요한 사건을 ‘어쨌든’이라는 말로 퉁 쳐 버리는 것으로 설명을 끝낸 강림 도령은 복잡한 감정이 드리웠던 표정을 지우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오창석은 아홉 번째 불의사망자다.”
“아홉 번째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월아의 뒤를 이은 두 번째 불의사망자일 줄 알았는데. 아홉 번째라는 말은 월아 뒤로 일곱 명이나 불의사망을 당했다는 의미다.
“최대한 전산 오류로 위장하고 수습하던 중이었는데 말이야. 오창석을 너희가 발견해 버리는 바람에 쉬쉬하던 게 들통나 버렸지 뭐냐.”
“……전산 오류로 위장했다고요?”
진지함 가득했던 묵범의 표정이 깨졌다. 불의사망이 터졌다면 그걸 조사해야지, 문제를 덮기 위해 전산 오류로 위장한 것은 마치 닭이 천적의 위험에서 몸을 숨기고자 머리만 감추는 것과 다를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도화는 묵범과 생각이 달랐다.
“전산 오류로 위장해야 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도화의 질문에 강림 도령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졌다. 묵범이 슬쩍 강림 도령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단번에 술잔을 비운 그는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어차피 이곳엔 셋밖에 없는 걸 알면서도 누가 들을세라 조용히 속닥거렸다.
“역천(逆天)하려는 자가 있는 것 같다.”
역천?
도화와 묵범 둘 다, 역천이란 단어를 어디서 들어 보긴 했는데 그 뜻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서로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역천이 뭐더라? 눈알을 굴리며 기억을 짜내던 둘 중 묵범이 먼저 역천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역ㅊ—!!!”
“쉿!”
“억!”
강림 도령이 다리를 쭉 뻗어 묵범의 무릎을 거세게 찼다. 묵범은 고통 어린 짧은 신음을 흘리다 입을 다물었다. 강림 도령이 주변을 경계하며 작게 말한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역천의 의미를 떠올린 도화도 얼굴을 굳혔다.
역천(逆天). 말 그대로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어기는 것을 말한다. 하늘의 법을 자잘하게 지키지 않는 것도 이에 속하지만, 그중에서도 세상에 큰 해를 끼치는 짓을 역천이라 한다.
[천도(天道)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자가 있다니.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인가 보군.]
여기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산 현천이 혀를 내둘렀다. 도화는 역천이라는 대형 폭탄을 던진 강림 도령이 뒤이어 말하길 기다렸다.
“역천하려는 게 한 명인지 무리인지, 신선인지 귀물인지, 원귀인지 악귀인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어. 그러니 절대 우리 외에 다른 곳에서 역천의 ㅇ도 꺼내면 안 돼. 알았나?”
“알겠습니다.”
“당연한 말을요. 그런데 무슨 정황이라도 잡은 겁니까?”
“정황? 처음에는 나도 그냥 귀물들의 일탈이구나 싶었던 것들이 한데 모아 놓고 보니 수상하더라고. 잠시만 기다려 봐.”
“?”
자리에서 일어난 강림 도령은 국장실로 가더니 두툼한 서류철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전 세계 주류 백과…? 이게 뭡니까?”
서류철 표지에 붙은 네임택을 본 묵범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제목만 위장한 건가 하고 몇 장 넘겨 보았다. 하지만, 한참을 넘겨도 제목에 충실한 내용뿐이었다. 온통 술, 술, 술. 간간이 마셔 보고 싶다, 이건 꼭 마셔야지, 가격이 너무 비싸다 등을 점착 메모지에 적어 붙여 놓기까지 했다.
묵범이 한심하단 표정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내보이자 강림 도령은 쯧, 혀를 차며 서류철 표지를 노크하듯 두드리며 말했다.
“설마 내가 업무 시간에 일은 안 하고 취미 생활을 할 것처럼 보이나?”
“지금도 이렇게 일터에서 술을 마시는데 충분히 하고도 남지 않겠습니까?”
도화 역시 아주, 매우, 충분히, 하고도 남아 보였지만, 차마 묵범처럼 대답하진 못했다. 아직 수습 기간이니 몸을 사려야 했다.
“자, 이제 제대로 보일 테니 잘 봐봐.”
강림 도령의 손이 지나간 서류철은 전 세계 주류 백과에서 ‘불의사망자 목록’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물을 이렇게 세밀하게 왜곡하는 술법은 처음 본다.
도화가 강림 도령의 능력에 감탄하는 사이 묵범은 목록부터 살폈다. 표지에 적힌 제목대로 내용물은 불의사망자에 대한 자료였다.
“불의사망자는 총 아홉인데 왜 목록엔 여덟 명밖에 없습니까?”
“그건 월아 차사에 대한 것은 위에서 함구하란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오히려 첫 피해자이니 더욱 자세히 조사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부분은 도화도 묵범과 같은 생각이다. 최초의 불의사망자인데 아예 이름을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했다.
“음, 그건 말이지.”
난감해하던 강림 도령은 묵범과 도화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민했다. 윗선에서 월아 차사의 명예를 위해 만장일치로 덮은 사건이다. 물론 그때 활동하던 차사들 대부분이 지금도 왕성히 활동 중이라 요란스럽게 떠벌리지만 않을 뿐, 대강의 내용은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묵범과 도화는 차사 일을 하고 있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외부 인력이다. 둘에게 차사국의 지울 수 없는 상처인 사건을 말해도 될지 고민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