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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70화 (71/146)

70화

[내일 국장님한테 같이 보고하러 갈 겁니다. 담마는 제가 데리고 올 테니 오늘은 푹 쉬어요.]

다시 침대에 누운 도화는 묵범이 본인 집으로 돌아가면서 한 말을 곱씹었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말이다. 오늘 있던 일은 당연히 윗선에 직접 보고할 만한 일이니까. 도화가 곱씹은 부분은 그 뒤의 말이었다.

[담마는 제가 데리고 올 테니.]

고맙다고 인사는 하고 보냈는데 계속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기시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적이 또 있었나? 고민해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도화는 답을 찾아냈다.

‘드라마….’

현천이 주말이면 심심하다며 종일 틀어 두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단골 대사였다. 일이 바쁜 여자 주인공을 대신해서 딸을 데리러 유치원에 갈 때마다 저런 대사를 했던 것 같다. 드라마에 관심이 없어서 거실에서 들리는 드라마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렸었는데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으.”

도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서가 아니라 방금 떠올린 드라마 내용 때문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는 남자 주인공의 자식이 아닌 건 확실했다. 남자가 여자를 일방적으로 좋아해서 열심히 구애하고 있는데 이런 가정적인 모습에 여자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중이었다.

도화가 몸을 떤 이유는 묵범이 나가며 제게 한 말을 듣고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고작 담마를 데려온다는 말에 여자 주인공처럼 감동을 받은 건 아니지만, 그냥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게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만 생각해.’

도화는 자꾸만 다른 쪽으로 튀려는 생각을 붙잡으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되짚어 보려고 했으나 오늘 내내 묵범과 같이 있었기에 무얼 생각하든 묵범이 방해를 했다.

‘잠이나 자자.’

그렇게 도화는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 * *

다음 날.

도화와 묵범은 이른 아침부터 국장실을 찾았다. 오늘 있을 보고와 회의 때문에 담마는 예고 없는 휴일을 맞이했다. 또래의 인간 아이라면 놀 궁리를 했을 텐데. 담마는 미뤄 두었던 숙제를 하겠다며 컴퓨터를 켰다.

게임에서 숙제도 내주는구나. 도화는 담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물어봐도 바로 이해할 만한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좀 일찍 나왔다고 차창 밖의 하늘이 어둑하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게 하루가 다르게 느껴졌다.

[아, 태양이 부럽구나.]

도화를 따라 차창 밖을 구경하던 현천이 탄식하듯 말했다. 묵범에게도 들렸는지 운전하던 그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저게 뭐가 부러운 건데?”

도화의 질문에 현천은 긴 한숨까지 내쉬며 대답했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잖아.]

듣고 있자니 그럴싸한 한탄이라 도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묵범은 그런 도화와 옆에서 ‘그치? 그치?’ 하고 추임새를 넣는 현천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렇게 현천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한강 다리 위에 도달했다.

‘추혼부 수석 차사 묵범. 차사국 출입을 청합니다.’

커다란 입을 연 거대한 천하대장군이 땅에서 솟구쳤다. 아직 어둑한 하늘이라 평소보다 더 기괴해 보였다. 묵범의 차가 빠르게 천하대장군의 입 속으로 돌진하자 도화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벌써 수십 번은 드나들었지만, 완벽히 무덤덤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묵범과 도화는 차사국에 도착하자마자 추혼부가 아닌 국장실로 향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추혼부에 가 봤자 출근한 차사는 없을 터. 추혼부뿐 아니라 차사국의 모든 부서도 그럴 게 뻔했다.

지금 시간은 오전 6시 5분. 막 잠에서 깰 시간에 벌써 출근을 하다니. 도화는 뭔가 억울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똑똑.

묵범이 국장실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대답도 들리지 않았는데 벌컥 문을 열었다.

‘이 새끼는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어쩔 때는 세상에서 가장 예의 바르고 진지한 사람인 것처럼 굴다가도 이런 식으로 갑자기 세상의 예의와 법이라고는 개나 줘 버린 것처럼 행동한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왜 묵범의 장단에 맞출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미쳤냐, 홍도화. 정신 차려.’

도화는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꽈악 꼬집으며 묵범의 뒤를 따라 국장실로 들어갔다.

[안에 아무도 없는 거 아냐?]

도화의 목에 걸린 현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문을 꽤 크게 두드렸는데도 안에서 반응도 없고, 강림 도령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근을 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허락도 없이 문을 연 건가? 하는 순간.

“여~ 왔나?”

술 창고 쪽에서 강림 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출근을? 이라고 하기엔 강림 도령의 모습은 지금까지 퍼질러 자다 막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잤습니까?”

묵범은 이 상황이 익숙하단 듯이 행동했다. 그는 국장실로 오면서 차사국 내에 있는 카페에서 사 온 먹을 것을 흔들며 말했다.

“세수라도 하고 오세요.”

“어, 그래.”

강림 도령은 뭉그적거리며 다시 술 창고로 들어갔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보아 아무래도 잠에서 깨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 * *

탁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멀끔한 얼굴을 한 강림 도령이 나타났다. 아예 샤워를 했는지 몸에서 향긋한 냄새를 풀풀 풍기며 강림 도령이 맞은편에 앉았다.

‘아예 여기서 사는 건가?’

씻고 자고, 먹는 것까지 해결할 정도면 집이나 다름없지 않나 싶다. 아니면 퇴근할 시간도 없이 일에 치여 살거나. 하지만, 도화의 머릿속에서 강림 도령은 그렇게까지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여 일을 하는 이미지는 아니었기에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그냥 잠이 들었겠거니 생각했다.

“어제 뭐 큰일 있었다며.”

강림 도령은 묵범이 사 온 음료를 뒤적이며 입을 열었다. 킁킁, 냄새를 맡으며 묵범의 몫일 혈당 폭발 음료를 골라냈다.

“그쪽은 아예 명부에 적힐 뻔했다던데. 괜찮나?”

걸쭉한 미숫가루를 찾아낸 강림 도령이 도화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정도까진 아니었습니다.”

“아니긴. 어제 저 녀석 안색이 말이 아니던걸?”

볼이 홀쭉해지도록 크게 한 모금 마신 그는 묵범을 곁눈질했다. 묵범은 반박 대신 초코칩이 가득 박힌 쿠키를 와작와작 씹었다.

‘묵범이?’

도화만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앉아 탁자만 쳐다봤다.

미숫가루가 성에 차지 않는지 강림 도령은 술 몇 병을 들고 왔다. 뚜껑을 열자마자 독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딱 봐도 전날 늦게까지 퍼마신 것 같은데 아침부터 또 술을 마시는 강림 도령이 이제는 경이로울 지경이다.

“이른 아침부터 온 걸 보면 뭔가 중요하고 급한 보고일 것 같은데. 어서 시작해 봐.”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보고는 약 한 시간 정도 지나고 나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끝이 난 것은 단순 현황 보고일 뿐. 정리와 추측, 대응 방법에 대한 논의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확실한 것은 금섬의 행동이 과하다는 것…인가?”

강림 도령은 빈 술병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금섬이 가난한 사람에게 붙어 재복을 주는 것은 당연하니 오창석에게 붙은 것은 이상할 게 없다. 실제로 오창석은 식품 사업을 꽤나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이를 발판으로 새로운 영역까지 확장하던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점은 거기서부터였다.

“금섬이 오창석에게 붙어 있던 기간이 너무 짧습니다.”

묵범은 미리 정보부에서 알아 둔 자료를 토대로 수상한 부분을 꺼냈다. 도화는 가방에서 강민진 자료 파일을 꺼내 강림 도령에게 건넸다.

“보통 금섬은 한 사람에게 붙으면 최소 2대까지는 함께합니다. 하지만, 오창석에게 붙은 금섬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5년 정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더군요.”

“5년이면 짧아도 너무 짧군.”

“강민진에게 옮겨 간 후는 더 이상합니다. 금섬이 붙었음에도 강민진의 사업은 어려워졌으니까요.”

“강민진은 금섬이 붙기 전에 이미 자수성가한 사람이라지?”

강림 도령은 도화가 준 강민진의 자료를 훑어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이에 묵범이 아닌 도화가 대답했다.

“강민진의 집안은 강민진 자체가 금섬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

자료를 훑어보던 강림 도령이 흥미로운 눈빛을 하고 도화를 쳐다봤다. 보던 자료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맞아. 자네는 관상을 볼 줄 안다고 했었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인간들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는 것 같은데. 가믄장 아기의 흔적을 본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맞나?”

도화는 대답 대신 묵범을 쳐다봤다. 저번에 묵범이 물어봤을 때 영안이 어쩌고저쩌고하며 가믄장 아기에 대한 건 최대한 숨겼는데. 이렇게 다이렉트로 질문 당할 줄이야.

난처함이 깃든 도화의 시선에 묵범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뭐… 알고는 있었습니다. 본인이 대답하기 싫어하는데 굳이 짚어 줄 필요는 없던 것 뿐이에요. 그러니 찔려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

결국, 도화는 탄식하듯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가믄장 아기님의 흔적을 엿보는 수준이지만요. 어제 그 일이 있었던 것은 망자의 관상을 봤기 때문입니다.”

“아하. 명부에 오를 뻔했던 게 죽은 강민진의 관상을 봐서 그런가 보군.”

“그건 아닙니다.”

“강민진이 아니면. 그 자리에 있었다던 오창석의 시신? 듣자 하니 강민진의 관상도 본 것 같은데. 하루에 두 명 이상 관상을 보면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뭐, 그런 부작용이라도 있나?”

“어제 보니 목숨이 간당간당이 아니라 아예 황천길을 건널 기세던데요. 그런데 강민진의 관상을 봤을 땐 멀쩡하지 않았습니까?”

묵범까지 합세해서 도화의 부작용에 대해 물었다. 하긴. 궁금할 만했다. 도화처럼 신을, 그것도 운명을 관장하는 거대 신의 흔적을 엿보는 사람이 누가 또 있겠는가.

도화는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금껏 숨길 수 있다면 최대한 숨기려 했던 자신의 능력이자 약점이었다.

[어차피 다 들통나지 않았어? 여기서 더 숨겨 봤자 오히려 의심만 살 것 같은데.]

현천이 도화의 고민을 덜어 줄 것처럼 말했다. 어차피 들통난 건 그렇다 치는데, 의심이라니.

[의심? 날 왜?]

[왜겠냐. 신의 흔적을 엿본다는 건 오래 산 나도 처음 보는 건데 저들이 아~ 그렇구나~ 하고 끝내겠냐? 게다가 반은 도깨비라지만, 반은 뭐가 섞였는지 모르는 놈이 그런 능력을 가졌는데 당연히 네 정체가 뭔지 의심할 것 같은데?]

현천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럴듯했다.

[너. 여기서 차사 일을 그만둘 건 아니잖아. 아니, 그만둘 수 있어?]

[……아니.]

아직 스승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던 저승차사의 정체는 캐 보지도 못했고 호윤이 누구로 환생했는지도 알아내지 못했으니 그만둘 수 없다.

[그냥 이야기해 버려.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하면 되잖아?]

[비밀을 지켜 달라라…….]

현천의 말을 곱씹던 도화는 큰 결심을 한 듯, 두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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