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읏…….”
도화는 묵범의 팔이 닿은 가슴이 순간적으로 불에 덴 양 뜨겁게 느껴졌다. 이불을 산처럼 덮어도 전혀 나아지지 않던 추위가 한층 꺾인 느낌이다.
‘뭐지?’
뜨거움은 온기가 되어 전신으로 퍼졌다. 추위가 한풀 꺾이자 멍했던 뇌도 조금씩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사고가 가능해지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자신이 묵범에게 안겨 욕조에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이 자식이— !”
여전히 힘은 제대로 들어가지 않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거센 거친 손짓으로 묵범을 밀어냈다. 팔을 뒤로 뻗어 등에 밀착한 묵범의 배를 꾹꾹 밀었다. 물론, 밀려날 묵범이 아니었다. 애초에 욕조 등받이를 기대고 앉은 상태인지라 밀려날 틈도 없었다.
“몸이 꽤 따뜻해졌군요.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요.”
‘따뜻해졌다고?’
묵범의 말을 들은 도화는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덜덜 떨리던 증상이 절반 이상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따뜻한 물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정화부와 치유부의 샘플 덕분도 아니다. 샘플은 말 그대로 샘플일 뿐,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물품이 아니니 이렇게 빠른 효과가 나타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묵범이 제게 흘려보내고 있는 뜨거운 기운밖에 남지 않는다.
‘전직 산신인 진인이라 기운이라 그런가?’
도화는 그대로 묵범에게 안긴 채 생각에 잠겼다. 평소라면 묵범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을 텐데. 지금은 특별한 상황인데다 누구 한 명 옷을 벗은 상태도 아니니 참을 만했다. 둘 다 흑립만 간신히 벗은 상태였다.
가슴에 둘린 묵범의 단단한 팔이 불편해서 몸을 살짝 꼼지락댔다. 욕조가 이렇게나 큰데 다 큰 남자 둘이 밀착해 있는 모습은 누가 보면 이상한 상상을 하기 딱 좋은 모습일 것이다. 도화의 움직임에 물이 찰랑거리며 욕조 밖으로 살짝 흘러내렸다.
‘담마가 오기 전까진 괜찮아지겠지.’
반드시 그래야 한다.
[어이. 이봐들. 괜찮냐?]
밖에서 현천이 욕실 문을 쿵쿵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도화의 몸이 크게 튕겼다. 담마도 담마지만, 현천에게는 절대 들키기 싫다.
“괘, 괜찮아!”
[오. 목소리를 들으니 멀쩡해진 것 같군.]
“몸 좀 더 녹이고 나갈 테니까 들어오지 마.”
[그려. 난 누워야겠다.]
현천의 대답이 천천히 멀어지자 긴장으로 꼿꼿하게 섰던 도화의 허리에 힘이 풀렸다. 묵범은 자연스럽게 도화의 상체를 제 가슴에 기대게 끌어당겼다. 이쯤 되니 묵범의 손길에 허튼수작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수작질을 밀어내기에는 등에 닿는 단단한 가슴이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잠깐 눈 붙여요. 손 안 댈 테니까.”
“네가? 퍽이나. 잘도 그러겠다.”
“이것 참. 제 신뢰도가 이렇게까지 바닥일 줄이야.”
묵범이 멋쩍게 웃었다. 웃으며 새어 나온 숨결이 도화의 귀와 목덜미를 간지럽히듯 스쳤다. 움찔, 어깨가 움츠러들려는 것을 최대한 참아 낸 도화는 이내 긴 한숨을 쉬었다.
“쉬어요.”
“……어.”
도화는 몸에서 완전히 힘을 빼고 묵범에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뒤에는 넓은 가슴이, 앞은 단단한 팔이 몸을 지탱하고 있으니 욕조에서 잠시 잠이 들어도 물에 빠질 염려는 없을 것이다.
추위는 이제 거의 다 사라졌다. 괜찮아졌으니 이제 꺼지라고 해도 되건만.
‘따뜻해서 그런 거야.’
물이 너무 따뜻해서, 그래서 졸린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한 도화는 그대로 깊은 잠에 들었다. 쌔액, 쌔액- 도화의 숨소리만 넓은 욕실 안을 울렸다.
“정말이지. 예민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땐 너무 무방비하단 말이야.”
묵범은 도화가 좀 더 편히 잘 수 있게 조심히 움직여 자리를 다시 잡았다. 도화는 제 몸이 묵범의 손에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편안한 표정으로 축 늘어졌다.
물속에서 해초처럼 흔들리는 도포 자락이 눈에 거슬린다. 벗길까? 묵범은 갑작스레 찾아든 충동에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이라면 벗겨도 깨어나지 않을 테니 기회다.
“흠. 어차피 나가면 젖은 옷은 갈아입어야 하잖아?”
묵범은 도화의 상의를 벗길 이유를 찾아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벗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상의만. 상의만이다. 도포도 두 벌이나 입어서 답답할 것이다.
도화의 어깨에 걸쳐진 도포를 걷어 내는 묵범의 손가락이 신이 나 보였다.
* * *
번쩍.
도화의 눈이 삽시간에 떠졌다. 보통 잠에서 깰 때면 의식이 서서히 또렷해지며 일어난단 생각이 드는데 지금은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 불현듯 떠오른 것처럼 눈이 떠졌다.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진 것처럼 철렁했다.
“헉……!”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도화는 제일 먼저 주변을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방이구나.
‘그런데 언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온 거지?’
다시 심장이 철렁했다. 분명 강민진을 잡으러 용산 폐가에 갔다가 예기치 않게 오창석의 시신을 발견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이었으나 근처에 영혼은 없었다.
‘강민진과 금섬과의 인연이 오창석 때문인 것 같아서 관상을 봤었지.’
도화는 뚝뚝 끊겨 엉망이 되어 버린 기억을 원래대로 이으려고 노력했다.
“으으… 머리야.”
두통에 머리가 지잉 울린다. 속도 울렁거리는 것이 태어나 숙취는 겪어 본 적이 없으나 이런 게 숙취가 아닐까 싶었다.
‘망자의 관상을 봐서 부작용이 컸나?’
평소 관상을 보고 겪었던 부작용과는 완전히 다른 한기였다. 단순히 추위의 강도로는 설명이 안 되는 한기.
‘한기라기보다는 음기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험하게 살다 죽은 망자의 음기가 몸 안에 그대로 흘러들어왔다면 과한 부작용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무방비한 상태로 흡수했으니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망자의 음기에 정신을 잃긴 했으나 묵범의 차를 타고 이동한 것은 기억난다. 묵범 덕분에 잠깐 정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차사국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온 건 정말 다행인 일인데…….”
왜 입고 있는 옷이 이 모양 이 꼴인지 모르겠다. 도화는 갈색 곰돌이 얼굴 패턴이 그려진 잠옷 바지를 보고 잔뜩 인상을 썼다. 바지만 그런 게 아니라 상의도 똑같은 곰돌이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물론, 그는 이런 잠옷을 산 기억이 없다.
“욕조에서 잠이 든 것까진 기억 나.”
문제는 그 뒤로 아무 기억이 없다가 눈을 떴다는 것이다. 몸도 개운하고 머리카락도 포슬포슬한 게 분명 씻김 당했다. 심지어 몸에서 좋은 향기까지 났다. 그렇다면. 설마……?
도화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슬쩍 바지 허리를 잡아당겼다. 확인하고 싶지 않단 생각과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치열하게 싸웠다.
질끈 감은 눈을 슬쩍 떠서 바지 속을 확인한 도화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새끼가……?”
오늘 아침 입은 것과 다른 색의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잠옷만 갈아입힌 것이라면 모를까. 속옷까지 갈아입혔다면 다 봤단 소리다.
과연 묵범이 보기만 했을까. 틈만 나면 집적대고 싶어서 안달 난 놈이?
침대를 박차고 방을 나온 도화는 제일 먼저 담마의 방으로 향했다. 혹시 담마가 옷을 갈아입혔을지도 모른단 일말의, 실낱같은 가능성 때문이었다. 물론 담마가 갈아입혔다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없어.’
담마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15분. 한창 강림 도령에게 교육을 받고 있을 시간이다. 담마의 방에서 나온 도화는 현천의 방으로 갔다.
[드르렁— ]
불 꺼진 방은 현천의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커다란 침대에 길쭉한 검 한 자루가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은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다.
“현ㅊ-.”
“홍도화 씨. 벌써 일어났습니까?”
현천을 깨워 묵범의 행방을 물으려던 도화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은 더 잘 것 같아서 저녁거리 준비하러 갔다 왔습니다.”
“너…….”
현천이 깰까 봐 조심히 문을 닫은 도화는 싱글싱글 웃는 묵범에게 달려들었다.
“어이쿠. 갑자기 안기면 위험합니다.”
“이 변!!! 태… 새끼가!!”
크게 외치려던 도화는 현천이 자고 있음을 떠올리고 급격히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매섭게 치뜬 눈과 힘이 잔뜩 들어간 턱은 도화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알려 주었다.
“네 짓이야?”
“무얼 말입니까?”
“옷…!”
“옷? 아~ 옷 갈아입힌 거요?”
도화의 질문에 묵범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금방 일어날 줄 알았는데 흔들어도 일어나질 않더군요.”
“누가. 내가?”
“그럼 당신이지 누구겠습니까?”
“…….”
내가 그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고?
도화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묵범을 쳐다봤다. 의심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었다.
“절 무슨 쓰레기 상변태처럼 취급하는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야?”
“그럼요. 눈 감고 갈아입혔습니다.”
“…….”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도화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믿을만한 놈이 말을 해야 믿지. 첫 만남부터 몰래 남의 몸을 만져 댄 변태가 저런 말을 하니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정말입니다. 천지왕께서 내리신 묵범 진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묵범은 가슴과 어깨까지 쭉 펴고 아주 당당히 말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태도였다.
‘진짠가?’
도화의 의심이 살짝 사그라들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진짜 같기도 했다.
“흠.”
묵범을 지나쳐 소파로 가 앉은 도화는 막 일어났을 때의 몸 상태를 떠올렸다.
‘어디 이상한 곳은 없긴 했어.’
도화의 시선이 묵범의 커다란 손에 멈췄다. 확실히 저 손으로 몸을 만졌으면 어디 한 군데 미세하게라도 티가 났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제는 슬쩍 고마운 감정이 빼꼼히 밀고 올라왔다.
위급한 상황에서 구해 주고, 집까지 데려온 데다가 씻기고 옷도 갈아입히기까지 했다. 잠옷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잘 어울리네요.”
묵범은 흐뭇한 표정으로 도화가 입은 잠옷을 감상했다. 도화가 입은 곰돌이 잠옷은 몇 년 전, 자신의 생일에 선물이랍시고 강림 도령이 준 잠옷이었다.
눈을 감고 갈아입혔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화를 씻기고 옷까지 입히려던 묵범은 도화의 옷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출근용으로 새로 구입한 옷 외에는 어딜 봐도 집에서 입을 만한 옷은 보이지 않았다. 묵범의 눈에는 모두 헌 옷 수거함에 넣어야 할 옷들 천지였다.
때마침, 그때 뜯어만 보고 입진 않은 잠옷이 떠올랐다. 체격도 비슷하고 자신은 입지 않은 옷이니 입히면 되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옷장 구석에서 찾아와 입혔다. 팔다리가 길긴 했지만, 그것 빼고는 도화를 위해 만들어진 잠옷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