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원귀 박태선을 발견한 곳은 수락산이었다. 가볍게 등산을 즐기기 위해 오전부터 삼삼오오 무리 지어 모여든 사람들로 수락한 입구는 북적거렸다. 7할은 산으로, 3할은 입구에 있는 맛집으로 들어갔다. 산은 타지 않고 배를 채우러 온 이들이었다. 이미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이들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산으로 향했다. 아마도 기분 좋게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한 듯했다.
그리고 박태선은 그런 그들의 뒤를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피땀 흘려 키운 제 회사가 덧없이 사라질까 걱정되어 피해 다녔습니다.]
흙바닥에 무릎까지 꿇고 고개를 숙인 박태선은 어딜 봐도 원혼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악귀보다는 사리 분별을 잘하지만, 그래도 혼이 탁해졌으니 멀쩡히 대화를 하다가도 화를 내거나 저주를 퍼붓는 경우가 흔한데.
“이제 일어나시죠. 벌써 30분째입니다.”
박태선은 30분이 되도록 돌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달려드는 시늉이라도 해야 부용삭으로 포박할 텐데. 어딜 봐도 박태선은 원귀가 아닌 방금 막 죽은 선량한 영혼 같았다.
[저…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겁니까?]
머뭇거리며 처벌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방금 막 죽어 저승차사를 만난 사람 같았다. 도화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묵범의 귀에 속삭였다.
“진짜 원혼 맞아?”
“맞습니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저래 보여도 인간 셋을 죽였습니다.”
셋이나…?
도화는 묵범의 말이 믿기지 않아서 다시 박태선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대역죄인처럼 무릎을 꿇다 못해 아예 엎드려 있었다.
[정말 셋이나 죽였다고?]
현천도 도화와 마찬가지로 묵범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묵범은 쯧, 혀를 차며 박태선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사람이란 참 신기하게도 원귀나 악귀가 되면 없던 연기력이 솟구친단 말입니다.”
“연기력? 갑자기 연기력 이야기가 왜 나와?”
묵범은 어리둥절해하는 도화에게 설명 대신 손목에 감아 둔 부용삭을 풀어 박태선에게 날렸다. 부용삭은 소리 없이 박태선에게 날아가 온몸을 꽁꽁 묶었다. 상체는 물론 무릎 꿇은 다리까지 그대로 묶인 박태선은 어어? 하다가 옆으로 넘어갔다.
[차, 차사님? 이게 무엇입니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묵범과 도화를 부른 그는 부용삭을 풀려고 몸을 버둥거렸다. 묵범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며 도화에게 말했다.
“홍도화 씨. 잘 보세요.”
쓰러진 박태선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묵범은 대뜸 박태선의 턱을 움켜잡았다.
[으, 윽…!]
박태선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턱을 잡은 묵범 때문이었다. 어찌나 우악스럽게 잡아 비틀고 있던지,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괜히 멀쩡한 망자, 원귀로 몰아서 괴롭히지 말고 감직부나 불러.”
망자를 누락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원혼 명단에 올리다니. 하마터면 멀쩡한 망자를 소멸시킬 뻔했다. 정보부는 시말서를 써야 할지도. 망자 분류를 이렇게 엉망으로 하면 어쩌자는 건지.
“이리 와 봐요.”
“?”
정보부의 정보력을 의심하던 도화는 묵범이 손짓까지 하며 부르자 하는 수 없이 발을 옮겼다.
“뭔데 귀찮게 와서 보라고-.”
“이게 바로 원귀의 연기라는 겁니다.”
묵범은 도화가 박태선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손을 옮겨 턱이 아닌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뒤로 꺾었다. 덕분에 도화는 박태선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어……?”
흰자위가 불그스름하다. 좀 더 붉어지면 새빨개질 것 같다.
[뭐야. 진짜 원귀였네?]
도화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현천이 신기하단 듯이 박태선의 얼굴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자 묵범에게 잡힌 머리카락을 빼내려고 머리를 흔들던 박태선이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자칫 잘못했다간 날카로운 날에 얼굴이 베일 것 같아서였다.
그러고 보니 박태선은 도화와 묵범을 보자마자 냅다 엎드려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차사의 부름을 무시하고 도망쳐서 죄송하다며 30분이 넘도록 사과를 하면서도 정작 얼굴을 들어 눈을 마주하진 않았다.
“이래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던 거군.”
“아마 두어 명 더 죽였다간 악귀로 변했을 겁니다.”
묵범의 말을 들은 도화는 박태선에게 죽임당한 세 사람이 누구였는지 떠올렸다. ㅇㅇ건설의 청소부, 경비원, 안내데스크 직원. 모두 박태선, 본인 회사에서 일을 하던 노동자들이었다.
“피땀 흘려 세운 회사가 걱정이 되었다면 회계 장부부터 잘 정리했어야지. 경영난과 관계없는 말단 직원을 셋이나 죽일 이유는 없잖아.”
“그러니까 원귀라는 겁니다.”
“원귀여도 사리 분간은 할 줄 알아.”
도화는 생령인 상태로 자신의 아비에게 붙어 있었던 담마를 떠올렸다. 원귀였지만, 다른 이에겐 피해 주지 않고 자신의 어머니를 망가트린 아비만 공격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 인간은 인성부터 글러 먹은 작자였어요.”
“…….”
도화는 묵범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같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박태선의 눈을 확인했다. 멀리서 보면 실핏줄이 터져서 붉게 물든 건가 싶겠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냥 흰자위가 붉게 변한 게 확실했다.
“힘이 강한 악귀는 붉은 눈까지 숨길 수 있지만, 원귀는 그리 못 합니다. 그래서 아까처럼 아주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으며 영화배우 뺨치는 연기 실력을 보여 주는 겁니다. 차사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도망치려고.”
박태선의 머리를 놓은 묵범은 부용삭을 잡아당겨 더욱 세게 옥죄었다.
[으으… 안 돼. 이렇게 갈 순 없어!]
“가기 싫으면 여기서 그냥 사라지든가요.”
[뭐, 뭐…?]
“그게 아니면 지은 죗값을 다 받고 다음 생으로 넘어가면 되고.”
[다음 생……?]
박태선의 검붉은 눈동자가 희번덕 빛났다. 다음 생이란 말에 희망을 가지는 눈치였다. 피식 웃은 묵범은 도포의 소맷자락을 스윽 올려 손목을 드러냈다. 그러자 경면주사 팔찌가 오전 햇살을 받고 반짝 빛이 났다.
‘다음 생?’
‘다음 생’이란 말에 반응한 것은 박태선만이 아니었다. 도화의 한쪽 눈썹도 위로 휙 들렸다. 저딴 원귀에게 다음 생이 주어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잠깐.”
“음?”
도화는 경면주사 구슬에 박태선을 봉인하려던 묵범을 저지했다. 그리고 품에서 길쭉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노란 괴황지에 붉은색 선이 난해하게 그어진 종이는 한눈에 봐도 부적이었다.
“그건 뭐지?”
“사람을 셋이나 죽이고, 더 죽일 생각인 놈이 저승차사까지 속이려 든 게 대단해서 상을 주려고.”
[상…? 무, 무슨 상입니까? 혹시 다음 생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게 해 준다거나 그런…?]
박태선의 질문에 도화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이마에 부적을 붙였다. 박태선은 도화의 무반응을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이마에 붙은 부적은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모서리부터 빠르게 타다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제가 말입니다. 정말 대업을 이룰 사람인데 어쩌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렸는지…! 차사님들도 잘 아시죠?]
“알다마다.”
묵범이 호응해 주자 박태선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에게 호소했다. 붉은 눈에 맺힌 눈물은 정말 자신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기는 듯했다.
“자, 들어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태선은 끊임없이 감사 인사를 하며 묵범의 경면주사 구슬로 빨려 들어갔다.
“방금 그거. 뭡니까?”
“뭐긴. 부적이지.”
“직접 쓴 부적입니까? 부적에 담긴 기운이 인간이 대충 흉내 낸 것 같진 않아 보이던데.”
“내가 쓰지 누가 써.”
퉁명스럽게 대답한 도화는 흑립을 고쳐 쓰고 몸을 돌렸다. 어서 다음 원귀를 잡으러 가자는 의미였다. 묵범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도화의 뒤를 따라가며 다시 물었다.
“좋은 의미의 부적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당연하지. 그딴 원귀한테 좋은 부적을 줬을 것 같아?”
“무슨 부적이었습니까?”
묵범의 질문에 앞서 걷던 도화가 멈춰 섰다. 그리고 품에서 아까 박태선에게 붙였던 것과 같은 부적을 꺼내 묵범에게 건네며 설명했다.
“역동토부(逆動土符).”
“역?”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부적 보면 알 거야. 차 문이나 열어.”
도화는 일부러 흑립을 벗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없는데 차 문이 벌컥 열리고 닫히는 괴이한 장면을 인간에게 들키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였다. 그 모습을 본 묵범도 흑립을 벗었다. 순식간에 가을 산에 한복을 입고 온 괴이한 두 청년이 되어 버렸지만, 산에 귀신 들린 차가 주차되어 있다는 소문이 나는 것 보다는 나았다.
“역동토부라. 그냥 동토부는 알지만, 역은 처음 보는군요.”
묵범은 차에 시동을 걸 생각은 하지 않고 도화가 준 부적을 뒤집고 돌리고 냄새까지 킁킁 맡으며 살폈다.
“이거… 경면주사 물감이 아니군요.”
“어. 내 피야.”
“피를?”
“평범한 부적은 경면주사면 충분하지만, 방금 쓴 것 같은 부적엔 살아 있는 것에서 갓 빼낸 피가 제격이야.”
도화의 설명을 들은 묵범은 다시 부적을 관찰했다. 반도깨비의 피로 쓴 부적이라. 게다가 역동토부. 보통 동토를 막아 주는 부적을 쓰기 마련이니 역동토부는 동토를 발생시키는 부적이란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전자의 죄과를 무겁게 만드는 악업이기도 했다.
묵범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도화에게 물었다.
“죄과를 어찌 감당하려고 이런 부적을 쓰는 겁니까?”
“내가 이런 걸 함부로 쓰는 사람으로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
“방금 같은 원귀나 악귀한테만 쓰니까 걱정 마. 그리고 네가 뭔데 내 죄과를 신경 써?”
“그야 당신이 제 옆에 오래오래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런 겁니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는지 도화의 입에서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왜 네 옆에 오래오래 있어야 하는지, 따질 기운도 없었다. 묵범은 원래 이런 놈이니까.
[이봐. 도화. 아무래도 저 자식…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냐?]
[…….]
사실 이쯤 되니 도화도 묵범이 제게 하는 말이나 행동이 보통 수상쩍은 게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긴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한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거든요. 이유도 없이 막 손이 간다고 해야 하나? 하하. 결국 허락도 없이 당신 허리를 만지긴 했지만요. 그건 정말이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했다. 지금 이 멘트는 플러팅이라는 것을.
“그딴 플러팅은 너 좋다는 여자들한테나 가서 해.”
“플러팅이라뇨. 저는 진심을 담아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은 질색입니다.”
“그러면?”
도화의 질문에 묵범은 부적을 다시 도화에게 내밀며 씨익 웃었다. 아주 자신감이 가득 차다 못해 철철 넘치는 미소였다.
“플러팅을 해도 제가 관심을 두는 사람에게 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관심?”
“음… 관심보다는 좋아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요.”
“좋…….”
‘좋’까지만 말한 도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끝까지 말했다간, 묵범의 입에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쨔잔!’ 하는 외침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