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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63화 (64/146)

63화

“어쨌든, 강민진의 팔자가 그렇다고. 오창석 사진을 볼 거니까 방해하지 마.”

“알겠습니다.”

묵범의 대답이 억눌린 느낌이다. 한 장 넘겨서 오창석의 사진을 보려던 도화는 슬쩍 곁눈질로 묵범을 쳐다봤다. 그러자 위로 올라간 입꼬리에 힘을 주어 내리려고 노력하는 묵범의 입매가 보였다.

‘젠장. 내가 생각해도 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게 훤히 보이는데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겠어.’

도화는 고개를 숙여 오창석의 사진에 집중하는 척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름 잘 대처했다고 생각했는데 묵범의 눈에는 얼마나 하찮게 보였을까.

도화는 부끄러워서 홧홧해지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오창석의 사진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선하다.

오창석의 첫인상은 나쁜 느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증명사진이라 적당한 보정이 들어갔다 해도 눈은 맑아 보였고 눈썹이 눈보다 길었다. 훌륭한 코끝과 붉은 입술만 봐도 오창석 또한 재물운이 괜찮은 편이다.

어딜 봐도 누굴 등쳐 먹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관상만 보아서는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법.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과 정반대의 사람일 수도 있었다.

“강민진의 돈을 착취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지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물론 그런 사람이 참 드물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 한 명 있지 않습니까?”

묵범이 제 가슴을 탕탕 치며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도화가 미친놈 보듯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씨익 웃기까지 했다.

[얼굴값을 이런 식으로 하는 놈을 볼 줄이야.]

현천도 살면서 이런 놈은 처음이라며 혀를 찼다. 도화는 묵범의 말은 묵살하고 휴대폰으로 오창석의 사진을 찍었다.

“뭐 하는 겁니까?”

“집에 가서 좀 더 관찰해 보게.”

“흠. 사진을요? 보면 뭐가 보입니까?”

“뭐라도 보이겠지. 너보다는 영안이 더 열렸으니까.”

대충 둘러댄 대답에 묵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가 무언가 숨기고 있음을 눈치챈 모양이지만, 묵인해 주려는 건지, 정말 흥미가 사라져서인진 몰라도 더는 묻지 않았다.

‘부작용만 없으면 화장실에라도 가서 보면 좋은데.’

잠시 정수기로 시선을 던졌던 도화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한동안 가믄장 아기의 흔적을 읽지 않았지만, 정수기의 뜨거운 물로 해결될 부작용이 아님을 잊지 않았다.

집에 가서 따뜻한 옷을 입고 보일러와 온풍기까지 틀고 봐야겠다.

“원귀가 꽤 많은데… 이걸 다 잡을 수 있겠어? 며칠 걸리겠는걸.”

박태선과 강민진 뒤로도 일곱 명의 피해자가 더 있는 것을 확인한 도화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이들의 원한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깊든 얕든 어쨌든 원귀는 원귀. 필수 불가결하게 대치 상황은 벌어질 것이고 아무리 빨리 잡는다 한들 하루 만에 아홉을 다 잡을 순 없었다. 이동하는 데에도 꽤 긴 시간을 잡아먹을 테고.

“뒤에 일곱은 다른 차사들이 잡으러 갔습니다. 우리는 박태식과 강민진만 잡으면 됩니다.”

아… 그래서 오늘 죄다 안 보였던 거구나. 그제야 도화는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일하는 사람들인데 신입을 왕따시킬 시간이 있을 리가.

“박태선부터 잡으러 갑시다.”

묵범이 차 키를 챙겨 일어섰다. 왕따의 찝찝함을 털어 낸 도화는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묵범을 뒤따랐다.

* * *

“어디, 오늘은 얼마나 했나?”

술 창고에서 거하게 술을 들이켠 강림 도령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집무실로 나왔다. 그가 말을 건 사람은 본인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담마였다.

“조금만 더 하면 끝나요.”

“벌써?”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막 정오가 지났다. 강림 도령은 책상 오른쪽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철을 보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아침에는 저게 왼쪽에 쌓여 있었다.

‘탐난단 말이야.’

강림 도령은 입맛을 다시며 담마를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때는 조막만 해서 비실대던 반쪽짜리 여우가 지금은 꽤 아름다운 소녀가 되었다. 귀물의 성장 속도가 제멋대로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쑥 커져서 나타났을 때는 내심 깜짝 놀랐었다.

“더 있어요?”

“음… 오늘치는 그게 끝이란다.”

“내일도 또 시키려고요?”

담마의 말끝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강림 도령은 그런 담마의 반응에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하 웃으며 책상 위에 약과 접시를 내려놓았다.

“약과 좋아한다며?”

“어떻게 아셨어요?”

윤기 나는 진갈색의 둥근 약과는 딱 봐도 엄청 진득하고 달콤해 보였다. 담마는 저도 모르게 입 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담마는 어서 약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싶어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하지만, 찍어 먹을 포크가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서류를 만져 댄 손으로 집어 먹을 순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강림 도령이 약과 접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

“줬다 뺏긴. 여기서 혼자 먹으려고? 안에 들어가서 우유 한잔하며 진지하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볼까?”

미래?

약과 접시에 정신이 팔렸던 담마는 뜬금없는 강림 도령의 말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제 미래를 왜 국장님이랑 이야기해야 하죠?”

“그야 내가 널 아주 훌륭한 인재로 여기고 있으니까.”

“인재는 무슨. 일하기 싫으니까 저 부려 먹으려고 하는 거겠죠.”

“오. 잘 아네. 하지만, 공짜로 일 시키는 건 아니잖아.”

어깨를 으쓱한 강림 도령은 약과 접시를 들고 술 창고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담마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술 창고로 향했다. 여기서 권력이 제일 높은 사람이 강림 도령이니 싫어도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뭐, 그리 싫은 것도 아니고.’

술 창고로 들어간 담마는 강림 도령의 손에서 약과 접시를 빼앗아 테이블로 갔다. 강림 도령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자신이 마실 술과 담마가 마실 우유, 그리고 포크를 가져왔다.

“인간들은 우유를 마시면 키가 큰다고 하더군.”

그는 친절하게 컵에 흰 우유를 가득 담아 담마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담마는 묘한 눈으로 우유와 강림 도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사람. 일부러 이러는 건가?

“전 인간이 아닌데요.”

담마의 말에 강림 도령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왜? 뭐가 문젠데? 하는 표정이었다.

“인간이 아니어도 효과는 있지 않겠어? 사실 송아지가 먹을 걸 뺏어 먹는 거라 죄책감이 들긴 하지만. 맛은 좋단 말이야.”

강림 도령은 죄책감이 든다면서 담마의 컵에 따르고 남은 우유를 단번에 탈탈 털어 마셨다. 전부터 느꼈지만, 참으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었다.

“우유로 죄책감이 들 정도면 고기는 굽는 냄새도 못 맡겠네요.”

“흠. 나는 죄책감과 식도락이 따로 도는 사람이라 뭐든 잘 먹는단다.”

그는 포크로 쿡 찍은 약과를 담마에게 내밀며 웃었다. 포크를 받아 든 담마는 약과를 야금야금 갉아 먹으며 강림 도령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담마는 술 창고에 들어올 때마다 제게 주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강림 도령은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술 창고로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목적이 있을 때만 부르지.

“제 미래는 삼촌과 논의할 테니까 국장님은 상관하지 마시고 용건이 뭔지나 말씀하세요.”

“허허. 어린 것이 제 삼촌을 닮아 아주 맹랑하고만. 그래. 네 미래에 내가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지.”

“당연하죠.”

담마는 코를 찡긋거리며 약과를 씹었다. 생긴 건 번지르르하게 생겨서 당연한 소리를 거창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괜찮은 선택지를 제안할 순 있어.”

“괜찮은 선택지?”

강림 도령은 담마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에 술을 따랐다. 단기간에 부쩍 큰 담마는 강림 도령과 나이대가 비슷해 보였으나 우유와 술처럼 좁힐 수 없는 드넓은 간격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쯤은 담마도 안다. 동갑처럼 보여도 이쪽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반쪽 여우이고, 강림 도령은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았는지 모를 저승의 실세다.

담마가 이렇게 강림 도령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도 모두 그가 용인하고 있어서란 것도 안다. 만약 강림 도령이 담마에게 예의 차릴 것을 원한다면 이렇게 겸상도 못 할 터였다.

“무슨 선택지가 있는데요?”

담마는 불퉁하게 내민 입술을 집어넣고 진지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사실, 처음부터 담마가 강림 도령에게 불손하진 않았다. 삼촌인 홍도화의 까마득한 직장 상사이고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호골로 보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 조심, 또 조심했었다.

호골로 보내지 않을 테니 홍도화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으라기에 삼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인간 속에서 사고 치지 않고 무탈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며 매일 국장실로 출석하라는 제안을 가장한 명령에도 응했다.

‘무탈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자기 할 일을 대신하라고 하는 것일 줄은 몰랐지만.’

보기엔 껄렁껄렁해 보여도 저승차사를 총괄하는 국장까지 된 사람이니 다 의미가 있는 일이라 여기고 묵묵히 일만 했다. 이거 돈 받고 해야 할 일 아닌가? 싶을 때면 홍도화의 얼굴을 떠올리며 삼촌을 위해서라고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지금도 강림 도령의 제안을 거절하면 자신과 삼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계산했다. 어떤 제안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 말이다.

“내 비서가 되는 건 어때?”

“…비서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 바로 반문했다. 비서라면 회장이나 사장 옆에서 일정 관리를 하는 그런 직업 아닌가? 거절하면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에 대해 계산하던 담마의 머릿속은 빠르게 강림 도령의 일정이 어땠는가로 전환되었다.

‘일정이란 게… 있나?’

홍도화와 함께 차사국으로 출석 도장을 찍기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강림 도령이 차사국 밖으로 나간 건 한손에 꼽았다. 그것도 일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사건 때문에 생긴 외출이었다.

그것 외에는 오로지 술, 술, 술.

출근해서 술, 점심 식사와 반주, 출출하다며 안주와 술, 목이 말라서 술.

날이 화창해서, 구름이 껴서, 비가 와서, 바람이 불어서…….

별의별 핑계를 대며 술만 마셨다. 최종 결재 사인만 강림 도령이 할 뿐, 국장이 해야 하는 서류 작업은 모두 담마가 했다.

“제안하신 비서직이 제가 아는 그 비서가 맞나요?”

“물론. 음… 직무는 좀 다르겠지만. 내가 딱히 어딜 막 돌아다니는 일정은 별로 없거든.”

“설마. 지금껏 했던 것처럼 계속 서류만 보라는 건 아니겠죠?”

담마가 질색하며 물었다. 본인 일은 완전히 내팽개치고 술만 마시겠다는 심산인가. 국장이 이따위인데 차사국이 제대로 굴러가는 게 신기하다.

어쨌든, 담마는 지루한 서류 작업을 계속하고 싶진 않았다. 담마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던 강림 도령은 약과를 하나 더 담마에게 내밀며 말했다.

“네 어미가 있는 호골로 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여서 하는 제안이야.”

“…….”

강림 도령의 거듭된 제안에 담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담마는 자신이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님을 깨달았다.

선택지? 제안? 웃기시네.

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협박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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