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묵범은 도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내가 돈에 미친 놈인 줄 알아? 뾰족하게 받아쳤지만, 사실 도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와그작.
도화의 입에서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지금 도화는 묵범이 사다 준 커피를 다 마시고도 얼음까지 탈탈 털어 깨물어 먹는 중이었다. 보통, 근처에 정수기가 있으면 다 마신 커피컵 안에 얼음이 있어도 정수기 물을 마실 텐데. 도화는 악착같이 얼음을 다 씹어 먹고는 그 컵에 물까지 담아 마셨다. 헹궈 마셨다고 하는 게 어울린 표현이었다.
“그래서 금섬을 잡으러 어디로 가야 하는데.”
“금섬을 잡기 전에 원귀를 잡아야 합니다.”
“원귀를?”
금섬만 잡으면 될 것처럼 말하더니 일이 더 늘어났다. 도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 마신 커피 컵을 분리수거 함에 넣으며 속으로 투덜댔다. 그러면 그렇지. 저 자식이 물어오는 일거리는 모두 귀찮고 짜증 나는 것밖에 없다.
다시 책상에 돌아온 도화에게 묵범이 서류철 하나를 내밀었다.
“원귀가 된 피해자들 명단과 정보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 명단은 뭐 하러 봐. 원귀면 그냥 잡으면 될 것을.”
도화는 투덜대면서도 착실하게 서류를 확인했다. 금두꺼비가 막대한 재운을 가져다준다는 소문만 들었지, 실제 금두꺼비에게 선택받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도화, 너. 어떻게 해야 금섬에게 선택받을지 궁금해서 그러지?]
[조용히 해.]
현천의 말에 도화는 그를 째려보면서도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금섬의 변덕에 견디지 못하고 죽어 원귀가 되었다지만, 그건 다 의지박약한 인간이라 그런 것이라고,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자신은 고작 두꺼비의 변덕 따위, 이겨 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도화의 자신감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이 사람… 인간치고 대단한 기백을 지닌 자였는데. 원귀가 되었다고?”
원귀가 된 피해자 명단 중 제일 첫 장을 차지한 사람은 건설 사업으로 국내에서 최고라 불리는 ㅇㅇ건설 창업주 박태선이었다. 말이 창업주이지 정말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사망할 당시 나이는 고작 50세였다. 인간들 스스로 백세 시대라 부른 지 오랜데, 병사도 사고사도 아닌 자살로 반백살에 죽다니.
“사업이 한 차례 크게 휘청거렸었는데 그때 죽었습니다.”
묵범이 사망 원인이 적힌 부분을 빨간 펜으로 주욱 그으며 말했다. 왠지 학생이 된 것 같아서 그다지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와 다르게 심약한 사람이었나 보군.’
박태선에 대해 다 읽은 도화는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깔끔한 단발머리에 굉장히 당돌해 보이는 외모의 아름다운 여자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강민진? 이름 어디서 들어 본 거 같은데.’
순간, 도화는 너무 자연스럽게 두 번째 피해자의 관상을 살폈다. 거의 직업병 수준이었다.
‘상은 굉장히 좋아 보이는데… 흠.’
정면을 보고 어깨까지만 나오게 찍은 사진 한 장이 전부라 세세하게 보진 못해도 여자의 관상은 무척 좋아 보였다. 얼굴의 중앙 상부가 발달하여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인품도 고상해 보였다.
수주도 두툼하니 크고 입 쪽으로 향한 것이 재운이 좋고 수명 또한 길 상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여자는 타고난 재운이 상당한 편인데 금섬이 붙었다니.
‘좀 부럽-.’
[오… 이 여자. 예전에 TV에서 자주 봤던 여잔데. 흠, 언제 죽었지?]
현천이 두 번째 피해자에 흥미를 보였다. TV와 친하지 않은 도화와 달리 현천은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종종 보곤 했다.
[영화도 찍고 개인 사업도 승승장구하다가 서서히 안 보이더니. 금섬의 짓이었구먼.]
도화는 현천에 대해 생각을 정정했다.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종종 보는 게 아니라 아주 빠져 산다고.
“이 사람도 금섬의 변심으로 죽은 거야?”
“그렇습니다.”
“아무리 내가 TV를 잘 안 봤어도 이 정도 사람들이 죽은 걸 모를 리가…….”
이상했다. 뱍태선은 그렇다 치고, 저 정도로 아름다운 배우라면 남의 불행한 소문 퍼트리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입이 조용히 다물고 있을 린 없었다.
“아직 사망 기사가 나지 않았거든요.”
“아직?”
“예. 시신이 발견되기 전입니다.”
시신이?
묵범의 대답을 들은 도화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다 다음 장으로 서류를 넘겼다. 두 장으로 끝난 박태선과 달리 강민진의 정보는 몇 장 더 많았다.
도화가 서류를 넘기자 묵범은 기다렸다는 듯이 빨간 펜으로 서류의 중간 전체를 동그라미 쳤다. 남이 읽는 데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묵범이 체크한 부분에는 도화의 궁금증을 풀어 줄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강민진의 개인 사업은 순탄하게 진행. 곧 전국으로 확장할 예정이었으나 그 시기에 동업을 제의한 지인 오창석이 등장.
(오창석: 강민진의 고등학교 동창. 졸업 후에도 sns를 통해 종종 연락하던 사이)
강민진은 본인의 사업 때문에 동업은 거절했으나 투자라도 해 달라는 오창석의 부탁에 하는 수 없이 투자자로 사업에 참여하게 됨.
그 이후로도 강민진의 개인 사업은 대성을 이룸. 하지만, 오창석의 사업은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자금 문제가 생김. 오창석은 강민진에게 추가 투자를 원하고 강민진은 그런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본인 사업 비용까지 끌어다 투자한 것으로 드러남.
이후 강민진의 개인 사업까지 하향길로 치달음. 사업에 문제가 생겨서가 아닌 오창석의 사업 투자 건 때문인 것으로 드러남.
현재 강민진은 사업을 부모에게 양도하고 물러난 뒤로 행적이 묘연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인적이 드문 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망자가 되었음.
워낙 착한 성품이라 원만히 차사의 안내를 받아 저승으로 인도될 줄 알았으나 차사가 오기 전 도주. 현재는 오창석을 향한 원한이 깊어져 원귀가 된 상태.
원귀가 된 이유는 강민진이 사망한 곳이 희대의 연쇄 살인마 고윤구의 사망 장소와 근접하여 그의 원한이 스며든 것으로 추정
집중해서 정독한 도화는 한 번 더 읽고 고개를 들었다.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없다. 하지만, 의구심이 드는 부분은 있었다. 그래서 바로 묵범에게 물었다.
“금섬이 언제부터 강민진한테 붙은 건지는 안 나와 있어.”
“그것은 아직 확실치 않아서 적지 않았습니다.”
“확실치 않다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묵범은 자신의 의자를 끌어다 도화의 책상으로 가져와 앉았다. 그리고 도화가 읽던 서류에 짤막하게 메모를 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강민진은 금섬의 개입 없이도 잘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금섬의 특성상 빈곤한 사람에게 붙을 테니, 처음부터 강민진에게 붙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강민진은 딱 봐도 평생 떵떵거리며 장수할 팔자인데 이상하다 했어. 혹시 오창석 사진은 없어?”
“…….”
도화의 질문에 묵범이 묘한 눈빛으로 도화를 쳐다보았다. 왜 저런 눈깔로 쳐다보지? 의아해하던 도화는 그제야 자신이 사진만으로 강민진의 사주를 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길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사진만으로 사람의 운명을 읽는다는 것은 차사국의 차사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니까요.”
“그래……?”
“오창석 사진은 뒷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만 보면 운명이 다 보이는 겁니까? 방금 것은 인간들이 보는 사주팔자와 다를바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음…….”
이걸 말해도 되나?
도화는 강민진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고민했다. 인간이 만든 사주팔자 보는 방법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단순히 통계를 낸 그대로 적용해 사주를 내는 인간이 있는 반면 어떤 이는 귀나 신의 힘을 빌려 상대의 몸에 깃든 신의 흔적을 읽는다. 여기서 귀란 귀물鬼物을 말하고 신은 신명神明을 말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귀물의 힘을 빌려고 극소수의 인간만이 신명의 힘을 빌린다. 하지만, 신명이라 해도 신격이 낮은 이름 없는 신이거나 조상신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딱히 인간에 국한된 건 아니다. 아무리 날고 기는 귀물이라 한들 어찌 높은 신격의 신명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을까. 만약 듣는다 해도 신이 선택을 한 것이지 절대 이쪽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사진만 보고도 가믄장 아기라는, 높은 신격 중에서도 손꼽는 신의 흔적이 보이는 이유는 도화 본인도 모른다. 도화가 신을 선택할 순 없으니 가믄장 아기가 도화를 선택했다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가믄장 아기는 도화에게 자신의 흔적을 읽는 능력을 주기만 했을 뿐, 말을 걸거나 꿈에 나타나는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화는 자신의 이 능력이 가믄장 아기도 모르는 실수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내가 가믄장 아기의 흔적을 본다는 소문은 퍼지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높은 신격들이 하계 일에 무관심해서 천만다행이다. 만약 이 능력에 대해 가믄장 아기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자신의 이 능력은 회수당할 뻔했다. 회수만 당할까? 가믄장 아기에게 고하지 않고 돈벌이에 써먹었다는 죄명으로 큰 벌을 받을 것이다.
도화는 맑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묵범에 대해 생각했다. 차사국 추혼부 수석이지만, 본디 하늘에 속한 자다. 그것도 천지왕의 관심을 받는 전직 산신 출신의 진인. 영수 태생으로 진인까지 도달했을 정도면 보통 유명한 인물이 아닐 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저 자식이 입을 털면 가믄장 아기의 귀에 들어갈 확률은 충분히 높다.
꿀꺽.
도화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비록 몰래 신의 흔적을 훔쳐보는 능력이지만, 이것은 도화의 장사 밑천이었다. 만에 하나 벌은 피한다 해도 운명을 훔쳐보는 걸 못 한다면 앞으로의 생활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월급을 과도할 정도로 주는 차사국에 들어왔어도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할 린 없다. 적당히 번 다음에 직접 스승님의 원수와 새로 태어났을 호윤을 찾으러 다녀야 했으니까.
그래서 도화는 가믄장 아기 이야기는 쏙 빼고 대충 둘러댔다. 들키더라도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시시껄렁한 점쟁이도 아니고 반백 년을 넘게 산 반도깨비인데 그 정도 영안이 없을까.”
“반백 년에 영안이 열릴 정도면 저는 옷깃만 스쳐도 전생까지 다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나름 잘 둘러댔다고 생각했는데. 묵범이 도화의 허점을 날카롭게 찌르며 반문했다. 평소에는 나사 두어 개 풀린 사람처럼 지내더니, 왜 이럴 때만 예리해지는지 모르겠다.
“난들 아나? 보이는 걸 어쩌라고. 내가 너보다 영안이 뛰어난가 보지.”
“흠.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치자는 걸 보니 아무래도 묵범은 도화의 변명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다. 아니라고, 내 말이 맞다고 따지기에는 괜히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보일 것 같아서 도화는 그냥 이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