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도화-60화 (61/146)

60화

일주일 만에 비가 왔다. 산불이 오죽 심했으면 각 종교마다 비를 내려 주십사 기도회를 할 정도로 기다리던 비였다.

그리 많은 양의 비는 아니었다. 땅이 촉촉이 젖을 정도로 내리고 금세 그친 비였지만, 신기하게도 그악스럽게 타오르던 불이 거짓말처럼 작은 불씨 하나 남기지 않고 꺼졌다.

“정말 신이 있는 건지도 몰라.”

“그러게 말이야. 소방관들이 그렇게 애써도 안 꺼지던 불이 어떻게 잠깐 내린 비에 싹 꺼지냐.”

도화는 옆을 지나는 남자들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 비웃었다.

신? 있긴 있다. 있기만 하나? 많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들이 기도하는 대로 들어주는 신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어젯밤, 산에서 1박을 했으니 오늘은 쉬라는 묵범의 연락이 있었다. 그냥 집에서 책이나 읽고 지내려던 도화는 집 근처 탐방도 할 겸 출근 시간에 맞춰 밖에 나왔다. 담마는 어제 늦게까지 게임을 하더니 늦잠을 자고 있었다.

[나온 김에 양주 좀 사자. 와인인가? 그것도. 달달한 것이 아주 맛있다던데. 엉?]

현관을 나서자마자 현천은 내내 술타령을 했다. 도화는 현천의 술타령을 한 귀로 흘리며 가볍게 조깅하듯 주변을 돌아다녔다. 전에 살던 지역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매장이 많아 눈이 심심하진 않았다.

한 시간 정도 돌아다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간 도화는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문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며칠 전 다녀온 처참한 산이 떠올라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애초에 비부터 먼저 뿌렸으면 피해가 이렇게까지 번지진 않았을 텐데.’

도화는 혀를 차며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꽤 넓은 내부에 비해 테이블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들 출근하는 평일 오전 시간에 와서 그런가, 손님 또한 도화를 포함해서 세 명이 전부였다.

드드드-.

테이블에 올려 둔 진동벨이 번쩍번쩍 빛을 내며 떨었다. 도화는 진동벨이 더 요란 떨기 전에 얼른 집어 픽업대로 향했다.

“여기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점원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온 도화는 얼음이 가득 든 유리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커피보다 얼음이 더 많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잘못 봤나 싶어서 컵을 들어 확인하니, 얼음 반 커피 반인 게 눈에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얼음을 빼 달라고 할걸. 아니, 그냥 집에서 스틱 커피나 마실 걸 그랬다고 후회해 봤자 이미 카페에 나와버렸다.

[커피가 아니라 커피 헹군 물이 되어 버렸는데?]

현천이 껄껄 웃으며 도화의 커피를 지적했다. 얼음이 더 녹기 전에 한 번에 다 마신 도화는 의자에 기대앉아 창밖을 쳐다보았다.

‘사람 참 많네.’

출근하느라 앞만 보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만히 구경하던 도화는 묘하게 시선에 거슬리는 사람이 보여서 눈을 깜빡였다. 눈코입 다 제 자리에 있고 팔, 다리도 두 개씩인데도 이질적인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졌다.

[인간들은 참 둔하단 말이야. 귀물이 바로 옆을 지나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걸 보면.]

[저걸 눈치채면 평범한 인간이 아니지.]

[하긴.]

감쪽같이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한 귀물들은 피로에 찌든 진짜 인간과 달리 피로를 연기하는 느낌이었다. 얼굴은 무표정에 눈 밑은 시커먼데, 가벼운 발걸음은 못 속인다고 해야 하나.

도화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보지 못할 것들을 구경하며 얼음 하나를 와그작 깨물어 먹었다. 잘게 씹힌 차가운 얼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쉴 때가 아닌데…….”

창밖을 구경하던 도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껏 스승님을 죽인 자와 호연이의 정보 찾기를 쉬지 않고 해 왔는데. 저승차사 일을 하게 되면서 소홀해졌다. 그래도 불래에 돈을 입금하는 일은 잊지 않고 있다.

[통장에 돈이 넘쳐서 여강래한테 돈을 퍼다 줘도 티가 안 나니 그러는 거 아냐?]

[그런가?]

생각해 보니 현천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예전에는 밤낮, 주말, 공휴일 가릴 것 없이 일을 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불래에 입금하고 나면 드디어 잠시 쉴 수 있구나, 한숨을 돌렸다. 그 잠깐 쉬는 시간이 도화에겐 두 사람의 정보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데 근 두 달간은 불래에 입금을 해도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확실히 전에는 입금하고 나면 앞자리가 바뀌어서 심장이 두근댔는데, 지금은 앞자리는커녕 뭐가 빠져나갔다는 표시도 나지 않았다. 문자로 출금 내역이 날아오긴 하지만, 그것 역시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황금 같은 휴일에 이렇게 외출을 한 것이다.

통장 정리를 하러.

[너도 참… 어린데 너무 고지식하다니까.]

쯧쯧, 혀를 차던 현천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싼 양주나 한 병 사 가자고 졸랐다. 물론 도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라리 불래에 돈을 더 입금하면 했지, 현천의 간식에 돈을 쓸 생각은 없었다.

안 먹어도 상관없는 날붙이가 어디서 술 마시는 버릇은 들였는지 모를 일이다.

달그락.

유리컵 안에서 녹던 얼음이 서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도화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형태를 잃어 가는 얼음 조각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뭐 하냐. 다 마셨으면 술이나 사러 가자.]

도화는 현천의 재촉을 무시하고 얼음이 든 컵을 잡았다. 그리고 남은 얼음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거의 다 녹은 얼음 때문에 밍밍한 커피 맛이 나는 물이 더 많았다.

[목이 마르면 저기 가서 마시면 될 것이지. 이제 돈도 많아진 놈이 아깝다고 그걸 먹냐….]

현천이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도화는 다 마신 컵을 정리대에 올리고 카페를 나왔다. 목이 말라서 마신 것도, 아까워서도 아니다. 아니, 좀 아깝긴 했다. 그러나 그가 녹아 없어지는 얼음을 바라본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는 자꾸만 녹아 사라지는 얼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 버텨 왔고, 앞으로도 잘 버텨야 해.’

그냥 얼음일 뿐인데. 도화는 건들지도 않았는데 혼자 녹아 형체를 잃어버리는 얼음이 마치 저를 보는 것 같아서 보기 싫었다.

‘아니…. 나도 좀 녹은 걸지도 몰라.’

처음에는 스승을 죽인 범인과 잃어버린 호윤을 찾기 위해 직접 두 발로 뛰었다. 인간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도깨비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팔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수중에 푼돈도 없는 혈혈단신 반도깨비가 사람을 찾는 방법은 발품 팔며 눈으로 보고 입으로 묻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돈을 벌기로 했다. 불래라는 여각이 있는데 거기 주인이 괴짜라 제 마음에 드는 의뢰라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수락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렇게 무작정 불래라는 여각을 찾았다. 귀물에게 들었으니 당연히 귀물을 상대로 하는 여각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게 찾아낸 불래는 도화의 예상과 전혀 다른 곳이었다. 단순히 술과 식사, 그리고 잠잘 곳을 파는 여각일 줄 알았는데. 허름한 입구와 달리 내부는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휘황찬란했다.

신기하게도 불래의 주인 여강진은 화려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건달 같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본인이 마음에 드는 의뢰라면 다 수락한다는 소문대로 그는 도화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난 잘하고 있어. 노력하고 있어. 아직은 소득이 없지만, 이제 곧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될 거야.

도화는 스스로 다독이며 버텼다. 조금이라도 느슨해질 틈 따윈 주지 않고 제 몸에 채찍질하며 달렸다. 지금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다.

차사국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그나저나. 도화 너, 요즘에 꽤 여유로워 보인다?]

[……알아.]

도화의 속내를 모르는 현천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현천은 내내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위태로웠던 도화가 이제 좀 느슨해진 것 같아서 반가운 마음에 한 말이었는데, 도화는 정반대로 받아들였다.

[초심을 잃었어.]

[……어엉? 초심을 잃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통장이 좀 넉넉해졌다고 초심을 잃었어. 그러면 안 되는데.]

[엥?]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화들짝 놀란 현천이 바지 속에서 덜그럭거렸다. 도화는 가만히 있으라고 주먹으로 주머니를 퍽 치고는 근처 마트로 들어가 소주 한 병을 샀다.

[아아니? 나는 양주를 달랬는데!]

[그냥 내가 마실까?]

[흠, 흠. 그거라도 마셔야겠다.]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한 현천은 한 병만 더 사자고 졸랐지만, 도화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집으로 향했다. 멀끔하게 생긴 청년이 아침부터 소주를, 그것도 안주 없이 소주만 한 병 사는 것을 보고 계산하던 점원이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한 병 더 사 주는 건 문제 없지만, 할 일 없이 아침부터 술이나 퍼마시는 백수로 오해받고 싶진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현천을 소주병에 꽂아 두고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담마는 아직도 자고 있는 중이고 현천도 술을 다 마시면 잔다고 했지만, 혹시 모를 방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해.”

컴퓨터 전원을 켠 도화는 모니터가 켜지자마자 바로 블로그에 들어갔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블로그 공지를 확인했다. 한동안 관상 의뢰는 받지 않는다는 공지 글에 새롭게 달린 리플이 수십 개나 늘어나 있었다.

“너무 많은데?”

그동안 도화는 일부러 블로그에 접속하지 않았었다. 의뢰를 받지 않는다고 써 놓아도 분명 자기까지만 해 달라는 리플이 수두룩하게 달릴 것이고, 개중에는 무시하지 못할 금액을 제시한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메일도 오는 족족 읽지 않고 삭제해 버렸다. 내용을 확인해 보고 싶은 제목의 메일도 많았으나 참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가볍게 할 만한 의뢰만 골라 받으면 되는 건데.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니 관상부터 받아 보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도화는 바로 공지부터 고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관상 의뢰만 받습니다. 사정상 주말에 한 분씩만 받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지 내용을 바꾼 도화는, 이번에는 요금표를 새로 책정했다. 전에는 건당 오만 원, 웃돈을 얹어도 끽해야 십만 원이 다였던 관상이다. 하지만, 사주 카페나 점집에서 봐주는 관상과는 차원이 다른 방법으로 봐주는데 고작 저 돈을 받는 것은 가믄장 아기의 격을 떨어트리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가격이 대폭 인상되었습니다. 관상 한 건당 50만 원. 그 이하는 받지 않습니다.

항의 댓글이나 메일이 쇄도할 테지만, 저 돈에 할 사람도 수두룩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도화는 절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말에 한 명만 받는 것부터 금액을 올린 것까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어져서 나온 결과였다.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

도화는 출근을 완전히 초심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로 삼으며 메일함을 열었다. 벌써부터 문의 메일이 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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