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결국, 묵범은 마스크를 다시 흑립 안에 넣어야 했다. 오늘 내로 험준한 산을 두 곳이나 정상까지 올라야 하는데 아무리 인간보다 빠른 속도로 오른다 한들 전직 산신인 네발짐승의 발보다는 느리기 때문이었다.
이번 산은 피해 규모가 더 커서 그런지 화재 진압에 투입된 인력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좀 더 세심히 피해 다니느라 무작정 질주를 할 수 없었다. 흑립은 모습과 기척은 지워도 물리적 접촉까진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인간과 충돌하지 않더라도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움직여야 했다. 묵범의 거대한 덩치가 타 버린 나무를 부서트리며 달리는데, 그걸 저들이 본다면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나무가 부서지는 것처럼 보일 터.
분명 귀신이니 악마니 하는 말이 나올 게 뻔했다. 하계의 인간 사회에 귀신 목격담이라든가 귀신에게 홀린 이야기 같은 건 워낙 흔하지만, 저승차사라면 사소한 잡음도 나지 않게 처리하는 게 본분이다.
손가락을 튕겨 기억을 지우면 된다지만, 이것도 남발하면 징계를 받을 수 있으니 자중해야 했다.
“그냥 손가락 튕기면 되는데.”
물론, 묵범은 자중할 생각 따윈 없었다. 등에 탄 도화가 잔소리를 해서 억지로 자중하는 중이었다.
“너만 징계받으면 몰라도 나까지 묶이는 건 사양이야.”
도화는 묵범이 차사의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묵범 때문에 저까지 쌍으로 묶여서 징계를 받을 확률이 높기에 그의 질주를 막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인간들을 피해 오르다 보니 어제보다 시간이 더 걸려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여긴 완전히 초토화네.”
도화는 아예 시커먼 민둥산이 되어 버린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개 같은 놈이, 산을 죽여서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불을 지른 걸까.
“흔적을 찾아보도록 하죠.”
사람으로 돌아온 묵범은 마스크를 쓰며 돌아다녔다. 도화도 그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며 세심하게 재로 뒤덮인 땅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런 폐허에서 범인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겠지만, 그래도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해야 했다.
[그런데 뭘 찾아야 하냐?]
현천도 찾아보겠다며 검으로 땅을 들쑤시고 다녔다. 하지만, 그도 딱히 특별한 것을 찾지 못하는지 몇 번이고 도화에게 돌아와서 물었다. 도화 역시 무얼 찾아야 할지 모르니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우선 지금 용의선상에 오른 건 하늘개니까 개털이라도 찾으면 되지 않을까?]
[개털이 이 불길 속에서 멀쩡하려나.]
[하늘개라잖아. 자기가 일으킨 불에 타 버릴 털이라면 홍선을 쓰면 안 되는 거 아냐?]
[흠. 일리 있는 말이군.]
도화와 현철은 이글거리는 불을 피해서 탐색했다. 재가 된 면적이 넓고 산세가 험해서 하늘이 어둑해지고 나서야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수자원 낭비니 그만 뿌리라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군요.”
묵범이 하늘 위로 지나가는 소방 헬리콥터를 보며 말했다. 소방 헬리콥터가 쏟아 낸 물은 불에 닿기도 전에 증발되어 사라졌다. 땅에 닿아 속으로 스며들어도 불씨가 있는 곳까진 닿지 못했다. 묵범의 말대로 물 낭비였다.
“산의 기운이 많이 죽었습니다.”
묵범이 혀를 차며 말했다. 도화와 현천도 느끼는 중이었다. 몇백 년 전까지만 해도 산과 강을 타고 흐르는 기운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요즘은 워낙 난개발로 모든 땅이 몸살을 앓는 터라 대부분의 산과 강의 기운은 처참하게 끊어졌다.
그래도 높고 험준한 산은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영험한 기운을 품고 있어 옛 명성을 이어 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불이 난 네 곳의 산이 그런 산이었다.
“일부러 하늘과 이어진 산만 불을 내는 것 같군요.”
휴대폰으로 기사를 찾아보던 묵범이 이마를 찌푸리며 도화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이 보던 신문 기사를 도화에게 보여 주었다.
“함백산, 태백산에도 불이 났다고…?”
기사를 본 도화가 자신의 휴대폰으로 직접 검색했다. 그러자 방금 난 산불이라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진과 꺼지지 않는 불에 지쳐 가는 소방대원들의 사진이 담긴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모두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기사들이었다.
“저기로 가야 하는 거 아냐?”
도화의 질문에 묵범은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지리산도 가지 못했는데 가야 할 산이 두 군데나 늘었다.
[이거 내일도 집에 못 가겠는걸? 담마는 잘 있으려나?]
현천이 쯧쯧 혀를 차며 담마를 걱정했다. 산에서 노숙하는 거야 예전에 하도 많이 했던 짓이니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집에서 혼자 있을 담마는 걱정되었다. 아무리 야무지다 해도 애는 애다.
불이 난 산이 더 늘었다는 기사를 보자마자 도화도 현천과 같은 걱정이 제일 먼저 들었다.
“오늘 내로 귀환이 어려우면 말해. 담마에게 미리 연락해야 하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뭐?”
바닥만 빤히 쳐다보던 묵범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까 쳐다보던 바닥을 더욱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리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차사국으로 귀환합시다.”
“……?”
처음에는 묵범이 아무 소득 없이 산을 돌아다니는 게 지겨워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맨손으로 땅을 푹푹 파자, 도화도 그가 무언가 발견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뭐지?]
궁금을 참지 못한 현천이 슬쩍 묵범 근처로 다가가 구경했다. 쌓인 재와 타 버린 흙 속에서 묵범이 집어 든 것은 불그스름한 털이었다. 몇 가닥도 아닌 쥐어뜯긴 것처럼 뭉텅이로 빠진 털.
“털?”
딱 봐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짐승의 털이다. 하지만, 저 털이 발견된 곳이 문제였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든 것이 타 버린 곳에서 짐승의 털이 저렇게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마.”
“하늘개의 털입니다.”
드디어 단서를 찾았다는 사실에 도화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묵범은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무덤덤했다.
“그러면 범인이 하늘개라는 건가?”
“그건 좀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요.”
“?”
범인의 흔적을 찾으려고 온 게 아니었나?
도화는 하늘개의 털을 가방에 집어넣는 묵범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뭔가 좀 문제 있어 보이는 분위기라 그에게 말을 걸기보다는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이대로 하산해서 차사국으로 갈지, 아니면 흔적을 더 찾을지는 묵범이 정할 일이었다.
[이봐들. 여기도 있는데?]
홀로 근처의 땅을 들쑤시고 있던 현천이 묵범과 도화를 불렀다. 현천을 돌아보니 방금 묵범이 가방에 넣은 것과 같은 색의 털을 손잡이에 걸친 현천이 보였다. 파헤친 바닥에는 역시나 누군가에게 뜯긴 것처럼 엉망으로 뽑힌 털이 흙에 섞여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하늘개가 범인은 아닌 것 같군.”
그제야 도화는 묵범의 ‘좀 더 조사해 봐야 안다.’라는 말뜻을 이해했다. 이건 짐승이 좀 움직였다고 빠진 털이 아니다. 싸우다 뽑힌 털이었다. 묵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몇 군데 더 땅을 파헤친 곳에서 하늘개의 털을 발견했다.
“이 정도로 털이 빠졌다면 꽤 크게 다쳤을 겁니다.”
“죽었을 가능성은?”
“죽진 않았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도화의 질문에 묵범은 하늘개의 털을 가득 담은 가방을 흔들어 보이며 답했다.
“털에 피는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거든요.”
“그게 무슨 뜻이지?”
“털만 뽑혔다 이 말입니다. 하늘개를 공격한 자의 의도가 단순히 하늘개를 겁주려는 것인지, 죽이려 든 것인지는 모르지만요.”
“그러면… 여기 어딘가에 하늘개가 있을 수도 있겠군.”
“그럴지도요. 공격한 자를 피해서 멀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설명을 마친 묵범은 검은 호랑이로 변해 도화에게 등을 내보였다. 하산할 테니 어서 타라는 뜻이었다. 도화는 고민하지 않고 묵범의 등에 올라탔다. 부드럽고 따뜻한 짐승의 털이 도화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해가 떨어진 가을 저녁 산이라 그런가 많이 쌀쌀해서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문득, 간밤에 자신을 문어 다리처럼 옭아맨 묵범의 행태가 떠올랐다. 만약 그가 사람 모습이 아닌 짐승 모습으로 그랬다면 크게 화가 나진 않았을 것 같다. 사람 모습이나 짐승 모습이나 둘 다 묵범이건만. 동물을 좋아해서 그런가, 짐승 모습은 무얼 해도 거부감이 훨씬 덜했다.
‘평소에도 쭉 이 모습이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무리겠지.’
저 모습으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테니까.
도화는 아쉬운 마음을 묵범의 털을 움켜쥐는 것으로 달래며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을 구경했다.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홍선의 불이 스칠 때마다 선계의 철밥통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씩 해 주고 싶어졌다.
* * *
차사국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산불 속보를 알리는 라디오 소리만 떠들어 댔다. 아까 새로 불이 났다는 산 외에 다른 산에도 불이 났다는 속보였다. 낮은 고도의 산에 난 불은 빠르게 진압됐다는 것을 보면 홍선으로 낸 불이 아닌 인간의 모방 방화인 듯했다.
“털이 그 정도로 뜯겼는데 계속 불을 지르러 돌아다닐 린 없을 것 같고…….”
도화의 중얼거림에 묵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선을 빼앗긴 것이겠지요.”
“누굴까. 홍선을 빼앗은 놈이.”
“그건 강림 도령이 알아 올 겁니다.”
“강림 도령이?”
도화는 강림 도령이 어제, 오늘 묵범과 자신이 했던 것처럼 불탄 산을 들쑤시고 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강림 도령이 그런 일도 하나? 귀찮은 것은 질색하는 강림 도령의 성격상 산에 오르는 것부터 안 하려고 할 것 같은데.
“서류 작업만 하는 거 아니었어?”
“보통은 그렇지요. 하지만, 이렇게 피해가 큰 일은 직접 움직이기도 합니다.”
“움직여야 할 것은 선계의 철밥통 같은데. 대체 불은 언제 끄는 건데?”
도화는 창을 살짝 내리고 숨을 들이켰다. 덕유산을 떠나 경부고속도로를 달린 지 꽤 된 것 같은데 여전히 탄내가 진동을 했다.
“강림 도령의 일이 끝나면 움직이겠지요.”
운전을 하던 묵범이 살짝 고개를 숙여 앞 유리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산들이 저리 불타고 있건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매정하게도 가을을 뽐내며 높고 청명하기만 했다.
“그런데 지리산은 안 가도 되는 건가?”
“네. 제일 처음 불이 난 산에서 하늘개의 흔적을 찾았으니 안 가도 됩니다.”
“덕유산이 처음 불 난 산이었어? 그러면 덕유산부터 먼저 왔어야 하는 거 아냐?”
계방산과 설악산부터 가길래 그쪽이 더 중요한가 싶었는데. 어째서 코스를 그딴 식으로 짰냐고 따지자, 돌아온 대답은 도화의 어이를 가출하게 만들었다.
“덕유산부터 왔으면 1박을 못 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산에서 텐트 치고 자고 싶어서 동선을 그따위로 짰다…?”
“빙고~.”
빙고는 무슨 빌어먹을 빙고냐!
도화의 주먹이 분노를 담아 묵범에게 휘둘러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