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아침 일찍 설악산에서 하산한 도화는 묵범의 차를 타고 덕유산으로 향했다. 설악산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도화는 당장 묵범의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택시를 잡을까?’
아직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이니 택시를 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도화는 입을 꾹 다물고 휴대폰으로 설악산에서 덕유산까지 최단 거리를 검색해 보았다.
최단 거리 예상 소요 시간은 약 4시간 30분.
396km에 택시비는 534, 790원.
‘오십만 원이 넘는다고…?’
도화는 자신이 잘못 읽었나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길 찾기 정보를 읽었다. 하지만, 오십만 원이 넘는 택시비는 여전했다.
‘다른 탈것을 찾아보자.’
대중교통 탭을 누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다음 날 출발’이란 안내였다. 게다가 아무리 짧게 잡아도 7시간. 거기에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그리고 도보까지 마구 뒤섞인 길 안내에 머리가 핑글 돌았다.
결국, 도화는 검색하던 창을 닫고 휴대폰을 뒤집어 버렸다.
[그래도 지가 잘못한 건 아는지 나불대진 않네.]
가만히 있던 현천이 도화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눈이 달리진 않았지만, 눈치를 보는 듯한 목소리였다.
[양심이 있으면 입도 뻥끗하면 안 되지. 했다간 바늘로 꿰매 버릴 거야.]
도화가 이를 갈며 말했다. 서로에게만 들리는 대화였지만, 운전대를 잡은 묵범의 손이 움찔 떨렸다. 도화의 이 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묵범의 차가 서울양양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이젠 택시도 잡지 못한다는 사실에 도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십만 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돈을 한 번에 쓴다고 해서 통장이 구멍 나거나 한 달 내내 간장을 반찬 삼아야 하는 그런 불상사도 일어나진 않는다.
그저 도화의 몸에 각인된 아끼는 버릇 때문에 택시를 탈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돈이 있지만, 언제 어떤 일로 그 돈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걱정도 한몫했다. 쉽게 번 돈은 무게가 가벼운 법이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소비를 억눌러야 했다.
“흐, 흠. 홍도ㅎ-.”
“닥쳐.”
“…….”
도화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기도 전에 칼같이 잘린 묵범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는 척했다. 손과 발은 운전을 했지만, 곁눈질로 도화를 살폈다. 온 신경이 도화를 향해 쏠린 상태였다.
그런 묵범의 상태를 도화가 모를 리 없다. 도화 역시 온 신경이 묵범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화는 묵범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려 창밖에 빠르게 지나가는 산과 나무를 구경했다. 새카맣게 타 버린 나무만 보다가 싱그럽게 살아 있는 나무를 보니 기분이 착잡했다. 지금 가는 덕유산도 새카맣게 탔을 텐데. 주불이 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오전 뉴스를 보았으니, 설악산과 계방산보다 상태가 더 심각할 것이다.
그리고 묵범과의 사이도 하룻밤 사이에 심각해졌다.
‘내가 미친놈이지. 저런 변태 새끼를 뭘 믿고 잠든 건지.’
전날, 도화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텐트 밑에 얇은 자리를 깔았지만,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 보는 불편함에 자꾸만 산에서 고생하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옛 기억은 대부분 추억이라 할 수 없는 나쁜 기억들이었지만, 그 덕에 뒤에서 자고 있는 묵범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흐릿하게 지울 수 있었다.
그렇게 도화는 양을 7천 마리 가까이 세고 나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이런 야외, 그것도 산속에서 자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 깊게 잠이 들지 못한 것인지 자는 내내 악몽을 꾸었다. 도화의 악몽은 대개 스승의 마지막을 보여 주는 꿈이었는데, 간밤에는 무슨 일인지 생전 처음 꾸는 악몽이었다.
처음에는 하얀 양이 누워 있는 도화의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별 내용 없는 꿈이겠거니 했다. 잠을 깊게 들지 않아서 그런가 이게 꿈이라는 자각은 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양을 너무 많이 세었나. 꿈에서도 도화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메에에-.
양 우는 소리가 늘어났다. 눈을 더 보니 한 마리였던 양이 두 마리가 되어 있었다. 두 마리쯤이야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눈을 감으니 메에에- 소리가 더 늘어났다.
세 마리. 네 마리. 점점 늘어나는 양은 이제 메에에 소리가 고막을 터트릴 정도가 되었다. 아무래도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도망치려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쿵! 소리와 함께 무거운 것이 도화의 등 위에 올라탔다.
‘우는 것으로 모자라 이젠 등에 올라탄 건가? 양이? 그런데 꿈이 뭐 이렇게 진짜 같지?’
고막이 괴로운 소음과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무게감이 도화를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럽게 했다. 메, 메-, 에-! 소리가 나며 더욱 무거워졌다. 마치 몸 위에 양이 한 마리씩 올라타는 느낌이다.
죽겠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몸부림쳐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치 엄청난 가위에 눌린 느낌이었다. 살면서 가위라고는 단 한 번도 눌려 본 적이 없는 도화는 당황해서 이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어떤 계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스승의 악몽을 꾸는 날이면 현천이 와서 몸 한 군데를 쿡 찔러 주는 것으로 풀어 줬는데. 이건 스승의 악몽이 아니라서 현천이 반응을 안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가위를 눌릴 정도면 엄청 끙끙대고 있을 텐데. 현천이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했다. 혹시… 불에 타 죽은 산짐승의 원혼들이 산 자에게 달라붙어 해를 끼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다다랐을 때.
번쩍! 눈이 떠졌다.
그와 동시에 지독한 가위에 눌린 이유를 깨달았다. 고막이 괴로울 정도로 시끄러웠던 소음의 정체도.
분명 각자 제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묵범에게 온몸이 결박된 상태였다. 문어 귀신이 묵범의 몸에 빙의가 된 것인가. 아니면 전직 산신이 아니라 수귀였다든가.
도화의 전신을 칭칭 감은 묵범의 팔과 다리는 문어의 다리 같았고 수귀의 머리카락 같았다.
그리고 고막을 괴롭혔던 소음의 정체는 현천의 코 고는 소리였다. 묵범의 만행을 막아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다가 묵범에게 눌려 도화의 얼굴에 착 달라붙은 상태로 잠이 들었다-고 현천이 해명했다. 날을 세워 도화를 찌르지 못한 이유는, 잘못 세웠다간 도화의 얼굴에 상처가 날 것 같아서라나.
[코 좀 작작 골아.]
지난밤, 둘에게 고문당한 도화는 묵범과 말을 섞기 싫어서 괜히 현천에게 짜증을 냈다.
[코 고는 게 아니라니까? 힘이 현신을 해야 하는데 못 하고 비좁은 검 안에 갇혀 있어서 그런 거라고. 어제 그건 진동이었어. 절대! 코 고는 게 아니라!]
[자는데 소리 나면 코 고는 거지. 아니면 이라도 간 거야?]
[아, 아니라니까!?]
현천이 허공에서 방방 뛰며 아니라고 소리쳤다. 사람 모습이었다면 억울해서 숨넘어갈 것 같은 격한 반응이었다. 현천의 그런 반응을 보고 있자니 엉망이었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게 느껴졌다.
‘아, 이래서 저 자식이 날 자꾸 건드리는 건가?’
도화는 아주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두 눈이 커졌다. 지금껏 현천과 함께하며 그에게 타박을 한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이유 없는 타박은 없었다. 그래서 현천이 이렇게까지 방방 뛰며 억울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기분이 나쁠 때 남을 건드려서 기분이 풀린다면 기분이 괜찮을 때 괴롭히면 좋아지는 건가?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지니 묵범이 더욱 괘씸해졌다. 저 새끼. 그래서 항상 웃고 다니는 것이구나. 저 자식이 웃고 다니는 이유가 있었어. 성격이 좋은 게 아니라 성격 좋게 보이려고 남을 괴롭히던 거였어.
한번 길을 낸 의식의 흐름은 다른 길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일방통행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런 성격으로는 절대 진선은커녕 신선도 되지 못할 테지만, 지금 도화는 거기까지 헤아릴 정신이 아니었다.
으득.
도화의 턱에서 거칠게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묵범과 현천은 서로 ‘저건 나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는지 흠칫했다.
그렇게 묵범의 차는 덕유산에 도착할 때까지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 * *
“다 왔습니다.”
중간에 앞서 가던 차량이 사고가 나서 한 시간을 더 소비해야 했다. 총 5시간 40분을 입 한 번 벌리지 못하고 운전만 해야 했던 묵범은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살겠다는 듯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조수석에서 내린 도화는 아직 산에 오르지도 않았는데도 공기 중에 섞인 탄내를 감지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당연하겠지만, 등산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커다란 살수차와 소방대원, 그리고 경찰만 보인다. 하늘에서는 쉴 새 없이 소방 헬리콥터가 날아다녔다. 오늘은 바람이 강하지 않다고 하더니 이때 집중해서 물을 뿌릴 계획인 듯했다.
“진짜 이상합니다. 물을 아무리 뿌려도 진화가 되질 않아요.”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취재하러 나왔는지 기자와 카메라맨이 대화를 나누며 도화와 묵범 옆을 지나갔다. 기자와 카메라맨 말고도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도화와 묵범의 존재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차에서 내릴 때 흑립을 쓴 덕분이었다.
묵범이 흑립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마스크를 꺼냈다. 어제 도화가 줬던, 이미 그 기능을 다 한 마스크였다. 주섬주섬 다시 마스크를 쓰는 걸 보는 도화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한눈에 봐도 시커먼 것이 당장 버려야 할 마스크다. 저걸 다시 쓰다니. 비위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준 것이라 못 버리는 것인지….’
긴 한숨을 내쉰 도화는 가방에서 새 마스크를 꺼내 묵범에게 던졌다. 가벼운 마스크지만, 도화의 손 힘에 힘입어 묵범의 가슴에 찰싹 달라붙었다. 새 마스크를 받은 묵범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변하는 것을 본 도화는 그가 허튼소리를 하기 전에 미리 차단했다.
“더러운 마스크 쓰고 있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의미 부여할 거 없어.”
“잘 쓰겠습니다.”
전 같으면 도화의 말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치댔을 묵범이지만, 간밤에 본인이 저지른 잘못을 인지하고 있는지 헛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두 눈이 초롱거리는 것은 여전했다.
“오늘은 정상까지 걸어서 올라갈 겁니다.”
“왜지?”
어제 들렸던 계방산과 설악산은 호랑이로 변해 정상까지 다이렉트로 달렸는데. 오늘은 무슨 이유로 걸어서 올라가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도화의 궁금증은 이어진 묵범의 대답에 분노로 변했다.
“호랑이로 변하면 당신이 준 마스크를 못 쓰지 않습니까? 마스크를 쓰려면 사람으로 변해야 하니, 두 발로 걸어서 올라갈 겁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