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너도?’
묵범은 도화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너도?’라는 질문이 신경이 쓰였다. 그 뜻은 본인 역시 그런 기억이 있다는 건데.
도방이 사람 찾는 일에 모든 돈을 쏟아붓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불래에 드나드는 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본 소문이고 저승차사들도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도방은 차사국에서도 유명인사였으니까.
하지만, 찾는 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여강래가 유일하다. 돈만 주면 뭐든 하는 여강래이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신의만큼은 절대 어기는 법이 없기에 그에게서 도화가 찾는 사람의 정보를 얻기란 불가능했다.
‘분위기가 꽤 말랑해진 것 같긴 한데…….’
방심은 금물이다. 저러다 갑자기 예민해지기 일쑤니까.
묵범은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도화의 이야기를 캐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잊지 못할 기억은 많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본 하늘이 그다지 맑진 않았다든가. 어머니는 날 낳자마자 다른 산으로 떠나 버린 일이라든가. 이건 제 기억의 시작점이기에 잊을 수 없는 것일 뿐, 그다지 특별한 기억은 아닙니다.”
도화는 일상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이야기하는 묵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랜턴 불빛 때문인가. 아니면 장난기가 지워진 눈 때문인가. 평소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얼굴이 되어 버렸다.
다시금, 첫 만남을 이런 분위기로 만났다면 꽤 괜찮은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기억은 뭔데.”
그래서 도화는 가만히 듣고만 있으려 했던 계획을 버리고 그의 이야기에 호응했다. 묵범은 도화가 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음을 파악하고는 눈을 휘어 웃었다.
‘젠장.’
도화는 간신히 묵범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 다시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웃는 것은 반칙이다. 조금만 더 길게 보았다면 심박이 올라갈 뻔했다.
“좀 오래 살다 보니 특별한 기억이 남들보다 많은 편이긴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것을 고르자면 수행을 위해 하계에 내려왔을 때 만난 인간 아이와 지낸 시간입니다.”
“인간 아이?”
“네. 굉장히 작고 약한 꼬마였는데, 한참 잘 어울려 놀았습니다.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뭐야.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옛 시절을 회상하는 묵범은 도화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간 꼬마와 어울렸던 게 그렇게 특별했나? 도와의 눈에 묵범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그 표정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것은 아니었다. 도화는 왜 그의 표정이 바뀌었는지 짐작이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간 꼬마라. 얼마 안 가 죽었겠군.]
현천이 혀를 쯧, 차며 도화만 들리게 속삭였다. 그도 도화와 똑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인간의 시간은 신선이나 귀물에 비하면 찰나와 같으니까.]
[그래서 가장 바쁘게 살잖나.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으니 말이야.]
[그럴지도.]
묵범은 인간 꼬마와의 이야기를 짧게 끝내고 다른 기억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도화는 인간 꼬마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도 인간 아이와 고작 5년간 함께 지냈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지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호윤. 너무나 작고 어여쁜 자신의 여동생.
피는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도화는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호윤과 함께해서 즐거웠다. 그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가 제게 왔던 것은, 어쩌면 굴곡밖에 없던 자신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불쌍히 여긴 가믄장 아기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도화는 묵범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호윤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호윤이 너무나 작고 어여뻐서 못난 인간의 눈에 띌까 봐 산 밑으로는 내려보내지 않았었다. 게다가 기운은 어찌나 맑은지. 악한 귀물들이 탐낼까 겁이 나 있는 힘, 없는 힘 끌어모아 최선을 다해 호윤을 지켰다.
‘나도 그땐 참 어렸는데.’
물론 지금도 귀물치곤 어리지만, 그때는 더 어렸다. 힘을 제대로 쓸 줄도 몰랐고 감출 줄도 몰랐다. 그래서 더욱 힘든 시기였지만, 옆에 호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힘든 기억보다 즐거웠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도화가 추억에 잠겨 있는 동안 묵범의 이야기는 슬슬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묵범의 이야기가 끝나 간다는 것을 느낀 도화는 대충 호응을 해 주려고 뒤늦게 귀를 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묵범은 최근 들어 제일 기억하기 싫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그 골목길에서 당신을 보자마자 침이 꼴깍 넘어갔던 것 아닙니까?”
“……뭐?”
“아까 제가 그랬잖습니까. 제 인생에서 두 번째로 만지고 싶은 사람이었다고요. 그때 제 손이 좀 버릇이 없긴 했지만,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뭐가 불가항력이라는 건지 묻지 않아도 대충 알 것 같다. 그것도 불쾌한 쪽으로.
“사실 그땐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뭐에 홀렸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그때 당신이 말했던 색정귀가 제 이성을 흐트러뜨렸을지도 모르겠군요.”
“네가 색정귀 그 자체가 아니고?”
“오… 제가 진짜 색정귀였다면 그때 그것만으로는 안 끝났을 텐데요?”
“…….”
기가 막힌 도화가 묵범을 노려보며 따지려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기서 또 화를 내며 대화를 이어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랬다간 밤새 이 새끼야, 저 새끼야, 육두문자를 남발할 게 뻔했다. 물론 화는 이쪽만 일방적으로 내고 묵범은 그런 도화의 반응을 즐기며 웃고 있겠지.
“그래. 너 색정귀도 아니고 저승차사다. 됐지?”
시야각으로 묵범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게 보였다. 도화는 아예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누웠다. 괜히 눈을 잘못 돌려서 시선이라도 얽혔다간 다시 쓸데없는 대화가 이어질 것 같아서였다.
“더 할 말 없으면 잠이나 자.”
“할 말은 많은데…….”
“닥치고 쳐 자.”
“흠.”
도화의 짜증에 묵범이 입을 다물었다. 도화는 이제 그만하자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묵범은 더 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묵범과 대화할 때는 ~하면 이란 조건을 붙이면 안 될 것 같다.
“잘 자요. 홍도화 씨.”
“…….”
“좋은 꿈 꾸고요.”
도화는 묵범의 잘 자라는 말을 듣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너도.’라는 짧은 대답만 해도 또 말꼬리를 붙들 것 같아서였다. 무슨 꿈을 꿀 거냐. 나는 이러저러한 꿈을 꿀 거다. 꿈을 잘 꾸는 방법을 알고 있냐, 등등의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게 뻔했다.
다행히 묵범은 좋은 꿈 꾸라는 말을 끝으로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묵범이 입을 다물자 텐트 안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현천이 잘 자리를 확보하려고 꼼지락대느라 난 약간의 소음을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가끔 뒤에서 묵범의 숨소리가 고막을 스쳤다. 저거 일부러 숨소리를 내는 건가? 아니면 자다가 그냥 숨 한 번 크게 내쉬는 건가. 도화는 바로 뒤에 있는 묵범의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숨소리가 커서. 숨소리가 작아서. 작게 뒤척여서. 크게 뒤척여서.
등 돌리고 눕긴 했는데, 저 자식도 등을 돌리고 누웠을까?
숨소리가 이 정도로 들릴 정도면 너무 가까이 붙어 자는 거 아냐?
텐트도 넓은데 멀리 떨어져 자라고 밀어낼까?
그냥 내가 움직이는 게 나을지도. 하지만, 내 소리에 깨면 어쩌지?
도화의 고민은 하면 할수록 점점 부풀었다. 그리고 뒤에서 들리는 아주 미세한 소음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풀벌레 소리라도 났다면 이렇진 않았을 텐데. 작은 풀 한 포기조차 새카맣게 타 버린 산인지라 잠이 들 때까지 이 어색함을 견뎌야 했다.
‘아, 미치겠네.’
도화는 눈을 꼭 감고 양을 세기 시작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얀 털의 양들이 메에에 울며 누워 있는 도화의 몸 위를 통통 뛰어넘었다. 백 마리. 천 마리. 오천 마리. 양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늘어나고 나서야 날카롭게 서 있던 신경이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 짧고 얕았던 도화의 호흡이 길고 깊어졌다. 얼마 안 있어서 도화의 전신이 추욱 늘어졌다. 깊은 잠에 빠졌다는 증거였다.
‘예민하다더니. 이런 상황에서 잘도 자네.’
묵범은 긴장이 사라진 도화의 등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화의 예민한 성정은 묵범에 한해서만 발동되는지, 불편한 야외 취침은 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자는 게 익숙한 듯했다.
도깨비와 인간, 두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했으니 산에서 노숙을 하며 지낸 시간이 길었겠지.
묵범은 도화의 넓은 등을 빤히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계속 보고 있다간 도화의 등을 손으로 만지고픈 충동을 자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도화의 얇은 티셔츠 밑으로 단단한 등 근육이 윤곽을 보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허리도 단단했지.’
뼈와 근육을 덮은 얇디얇은 지방층과 피부는 부드럽고 말랑했다. 손에 힘을 더 주어 누르자 그 밑에 자리 잡은 근육이 단단하게 손끝을 밀어내는 게 느껴졌었다. 마치 어딜 함부로 누르냐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묵범은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바로 앞에 그때 만졌던 몸이 있는데, 만질 수가 없다. 팔을 조금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데.
‘만질까…?’
그는 자신을 유혹하는 도화의 등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손이 도화를 향해 움직이지 않도록 양팔을 위로 올려 머리 뒤로 숨겼다. 여유롭게 자신의 손을 베고 잠을 청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여유롭긴커녕 자꾸만 의지를 배신하려는 손을 억누르는 중이었다.
물론, 만질 수 있다. 도화의 어깨와 등이 규칙적으로 고르게 움직이는 걸 보면 잠이 든 것 같으니 더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짝 만져 볼 순 있다.
하지만, 과연 살짝 만지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까?
만지면 눌러 보고 싶고. 눌러 보면 끌어안고 싶어지지 않을까?
겉은 말랑하고 속은 단단했던 도화의 몸.
하지만, 직접 겪어 본 홍도화는 몸과 달리 외모는 단단했고 속은 말랑했다. 원귀의 티끌을 안고 있는 새끼 여우를 품은 건 변덕이라 여겼는데. 오늘 산을 오르며 타 죽은 나무와 산짐승을 볼 때마다 미미하게 일그러지던 얼굴을 보고 생각을 고쳤다.
몸도 겉과 속이 다르더니, 마음도 그렇구나. 뭐 이렇게 흥미로운 게 다 있지?
‘젠장. 괜히 텐트 준비를 했나. 그냥 호텔이나 잡을걸.’
그는 도화와 친목 도모를 하기 위해 노숙을 결정한 어제의 자신을 질책했다. 호텔? 모텔이든 여관이든 간에 각방에서 잤다면 이런 위험한 충동은 느끼진 않았을 텐데.
그래도 도화와 아주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긴 하니 다행이다.
묵범은 어렵사리 반걸음 가까워진 거리를 순식간에 벌리고 싶지 않아서 인내의 밤을 지새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