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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55화 (56/146)

55화

도화의 불호령에 묵범은 양치에 가글까지 하고 텐트로 들어왔다. 도화와 이야기를 나눌 준비였다. 그래도 그가 텐트로 들어오자 상큼한 레몬 냄새가 훅 풍겼다.

‘사탕을 얼마나 처먹은 거야.’

저번에도 레몬 사탕을 먹더니 오늘도다. 텐트로 들어온 묵범의 손에 들린 사탕 통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저 한 통을 다 해치운 듯했다.

단것을 너무 극단적으로 많이 먹는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백이면 백 성인병에 걸릴 식습관이었다. 하긴. 저렇게 먹어도 멀쩡하니 마음껏 먹는 건데 내가 저 자식 성인병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도화는 다시 드러누웠다. 그리고 옆자리를 툭툭 치며 너도 어서 누우라는 눈빛을 보냈다.

묵범이 순순히 눕자 도화는 어서 저놈이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어서 해치우고 자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든 좋게 좋게 넘겨야지.

도화의 그런 다짐은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산산조각 나 버렸다.

“제가 하늘에서 좀… 아니, 잘나가는 진선입니다.”

“……지금 그딴 개소리를 하려고 내 잠을 방해한 거냐?”

개소리도 보통 개소리가 아니다. 게다가 묵범은 도화의 반응은 무시하고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솔직히 전 홍도화 씨가 제 제안을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어딜 봐도 홍도화 씨는 저승차사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잘 아네. 그런데 그거랑 네가 잘나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저승차사를 싫어하지만, 제가 제안해서 승낙한 것 아닙니까?”

도화는 뭐라 대꾸해야 할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하얗게 탈색되었다. 이 자식… 뭐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저 자식한테 무슨 욕을 퍼부어야 닥치게 할 수 있을까.]

적당한 욕이 떠오르지 않은 도화는 현천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현천도 도화와 마찬가지였다.

[자고로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지만… 네가 저놈을 이길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그냥 무시하는 게 최선일 것 같다.]

[하, 이젠 내가 미쳐 버리겠네.]

도화는 자신이 묵범보다 약하다는 사실은 분하지 않았다. 산신 출신 진선이라는 걸 보면 묵범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을 것이다. 짐승이 산신이 되기란 여러 신의 특별한 관리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삼신의 점지로 생명이 태어나고 칠성신이 수명을 정한다. 그리고 가믄장 아기가 운명을 내린다. 사실 운명이란 게 거창한 건 없고 세상을 이끌, 또는 피해를 입힐 자만 특별히 손을 쓰는 정도이다. 물론, 가믄장 아기가 정한 운명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잘 닦인 길과 험준한 길을 내어 주는 게 전부라고 들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성공을 향한 탄탄대로가 펼쳐져도 본인이 험준한 길로 삐딱선을 타면 성공은 개뿔, 빌어먹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 반대로 연쇄살인마가 될 놈이 부단히 노력하여 연쇄살인마를 잡는 경찰이 될 수도 있는 게 가믄장 아기가 주는 운명이다.

물론, 신의 손길이 닿은 운명을 바꾸기란 굉장히 어렵다.

‘나처럼.’

도화는 묵범 덕분에 새삼 자신의 인생이 더럽게 꼬였다고 느꼈다. 가믄장 아기님도 무심하시지. 한낱 반도깨비, 무어 마음에 안 든다고 이런 배배 꼬인 운명을 준 걸까.

어쩌면 감히 자신의 흔적을 엿보는 게 괘씸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 그런 능력을 갖고 싶어서 가졌나. 어쩌다 보니 보이게 된 거지. 이런 능력 도로 거둬가도 좋으니 동생 찾게 해 주시고, 스승님을 죽인 범인도 찾게 해 주세요.’

도화는 자신이 묵범과 이야기하던 중이라는 것도 잊고 괜히 가믄장 아기에게 투덜댔다.

“이봐요. 홍도화 씨.”

묵범은 제게 짜증을 낼 줄 알았던 도화가 아무 말 없이 딴생각을 하는 것 같자 손가락으로 도화를 톡톡 찌르며 불렀다. 그러자 도화는 대답 대신 묵범과 자기 자리 사이에 꽂아 둔 현철을 뽑아 그에게 겨눴다. 날카로운 검 끝이 묵범의 턱 밑을 위협했다.

“내가 현천을 왜 꽂아 놨을 것 같아?”

“음… 사과 깎아 주려고?”

묵범이 능글맞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현천을 밀어냈다. 평범한 날붙이라면 묵범의 피부에 흠집도 내지 못했을 텐데. 현천상제의 무구였던 현천 앞에선 묵범도 무사하지 못했다.

“꽤… 아프군요.”

현천을 밀어낸 손끝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흐르는 양이 꽤 많아서 텐트 바닥에 고일 지경이다. 아프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파 보였다.

[잘했어. 현천.]

[흠. 피가 깨끗하구먼. 너무 깨끗해서 밍밍해.]

현천은 묵범의 피가 맛이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애매한 감상을 남겼다. 도화는 현천의 감상은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이번에 따끔하게 혼을 내 줬으니 앞으로는 조심하겠지. 이게 중요했다.

“저는 과격한 사람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묵범은 도화의 예상 밖에서 노는 놈이었다. 묵범이 칼에 찔려 피가 나는 손가락을 쪽쪽 빨며 수줍게 고백하듯 말했다. 손가락이 아니라 목 줄기를 찔렀을 수도 있던 상황인데 일말의 위험도 못 느꼈는지 저질 농담이나 날렸다.

“제발 그런 미친 농담 좀 그만해. 넌 모든 게 우습냐? 아니, 내가 우스워? 왜 나만 보면 별 거지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건데?”

결국, 참다못한 도화가 이를 갈며 묵범에게 물었다. 인간 사회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고 도깨비 사회에선 혼혈이란 이유로 대역죄인 취급을 받으며 거지꼴로 살던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으면 숨 쉬듯이 희롱을 해 댈까.

도화의 울분 섞인 짜증에 묵범은 미소를 지웠다. 이제 장난치지 않겠다, 미안하다는 의미의 변화는 아니었다.

“홍도화 씨가 우습다니. 그럴 리가요. 그랬다면 차사국으로 스카웃 제의를 하지 않았겠죠.”

“우스워서가 아니면 뭐 때문인지 말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네놈 속을 네가 모르면 어쩌자는 건지. 이것도 장난인가? 도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묵범을 노려보았다. 묵범은 멋쩍은 듯이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하필 현철에게 찔린 손가락으로 긁었는지 턱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태어나 두 번째로 겪는 충동이었습니다.”

“뭐가.”

“만지고 싶다.”

“뭘.”

“엉덩이요.”

“…….”

너무 당당하게 ‘엉덩이’를 말하는 묵범이었다.

“내… 엉덩이를?”

“네. 음… 좀 더 정확하게는 엉덩이와 허리요.”

도화는 붉어지려는 얼굴을 최대한 식히려고 노력했다. 텐트 문을 열고 크게 심호흡했다. 후, 하-, 후, 하-. 인내심을 기르는 훈련이라 생각하자. 빠드득 이를 갈고, 손등뼈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며 인내했다. 도화가 이런 노력을 하는 줄도 모르고 묵범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도화의 상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요즘은 상체 위주로 운동하나 봅니다? 대흉근이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은데, 한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되겠냐?”

“아… 아쉽네요.”

도화의 칼거절에 묵범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아련하게 도화의 가슴을 쳐다봤다.

‘귀신 같은 놈. 내가 상체 집중 운동 중인 걸 어떻게 알아챈 거지?’

전보다 더 커졌다는 말에 순간,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만져 볼 뻔했다. 정말 커졌나? 슬쩍 눈알만 굴려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발달한 가슴 근육이 얇은 티셔츠 안에서 불룩 솟은 게 보였다. 덩치가 크니 가슴 근육도 큰 건 당연하다. 하지만, 도화의 눈에는 평소의 크기였다.

묵범은 도화가 제 가슴 크기를 가늠하는 것을 가만히 구경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계획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도화가 질색할 대화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도화는 질색할지언정 묵범은 즐거웠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가 신기했다.

‘귀엽단 말이야.’

자신과 거의 비슷한 키와 덩치인 남자인데 이상하게 자꾸만 귀여워 보인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튀어 올라서 그런가? 그리고 입 안이 바짝 마를 정도로 갈증도 일었다. 아까 묵범이 요란스럽게 사탕을 먹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누워서 물을 마실 순 없으니 사탕이라도 입 안에서 굴리며 침을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묵범이 오늘 도화와 이야기하려고 했던 주제는 도깨비불에 관한 것이었다. 대놓고 물어보면 홍도화의 까칠한 성격상 원하는 대답 대신 욕이나 한 바가지 먹을 게 뻔해서 먼저 자신의 옛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홍도화의 이야기도 들어 보려던 참이었는데.

살짝만 건드려도 격렬한 반응을 보이니 재미있어서 계획에 없던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앞으로 같이 지낼 시간은 많으니까, 나중에 좀 더 가까워지면 다시 이런 자리를 만들어 봐야겠군.’

생각해 보니 아직은 서로의 과거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돈독하진 않으니, 후일을 기대하는 게 나을 듯싶다. 물론 묵범은 자신의 옛이야기를 도화에게 낱낱이 공개할 의사가 있었다. 문제는 절대 그럴 리 없는, 티끌만 한 사연도 입 밖에 내지 않을 홍도화다.

‘여기서 더 이상 가슴 이야기를 했다간 쫓겨날지도.’

묵범은 아직 연하게 피가 배어 나오는 손가락을 휴지로 대충 둘둘 말고 자리에 누웠다. 도화는 가슴을 내려다보다 슬쩍 본인의 허리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아마 묵범이 허리와 엉덩이를 만지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해서 그런 듯했다.

“할 이야기는 많이 준비해 왔는데, 정작 이렇게 눕고 나니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신선도 치매에 걸리냐?”

“아직 치매에 걸린 신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평범히 기억하고 희미해지고 잊고 있습니다.”

묵범의 말에 도화는 진선이 평범히 기억하고 희미해지고 잊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몇백 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려나. 영영 잃어버린 호윤의 얼굴과 죽은 듯이 쓰러진 스승의 모습이 그에게는 아직도 너무 생생했다.

차사국에 들어간 뒤로 바삐 일하는 바람에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뿐이지 절대 잊은 적은 없다. 어찌 잊을까.

묵범도 생각에 잠긴 것인지 텐트 안에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이대로 이야기가 끝날 것 같았기에 도화는 자리에 누워 텐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랜턴이 은은하게 안을 비추었다.

적막을 깬 것은 묵범이었다. 몸을 도화 쪽으로 돌려 눕느라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묵범의 시선이 제게 꽂혔다는 게 느껴졌으나 도화는 일부러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마주치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묵범은 도화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아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기억도 있습니다.”

“너도?”

도화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묵범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무시하려고 천장만 쳐다봤는데. 예상외의 이야기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하고 말았다.

은은한 랜턴 불빛이 묵범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처럼 일렁이며 그의 검은 눈동자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물러나길 반복했다. 정말 드물게 진지한 표정인 묵범을 보며, 도화는 이 자식이 처음부터 이랬다면 꽤 괜찮은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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