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온통 깜깜한 까막 나라의 임금님은 불개에게 명령을 내렸어요.
“불개야, 불개야. 해와 달을 훔쳐 오거라. 더 이상 어둠을 참지 못하겠구나.”
불개는 임금님의 명령대로 태양과 달을 훔치러 갔어요. 태양을 물어 까막 나라로 오던 불개는 너무 뜨거워서 그만 뱉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달을 물었는데 너무 차가웠어요.
결국, 해도 달도 다 뱉고 까막 나라로 돌아간 불개는 임금님께 크게 혼이 났답니다.
“그러니까 까막 나라의 임금이란 놈이 해와 달을 훔쳐 오라고 하늘개한테 시킨 것이로군. 하늘개가 불개인 건가?”
도화는 동화책을 한 장씩 넘기며 중얼거렸다. 책에 따라 하늘개라고도 부르고 불개라 부르기도 했다. 작자 미상인 전래동화의 특성상 구전되어 내려오며 다양한 내용으로 각색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말도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공통된 부분은 있었다. 하늘개가 북실북실하다는 것. 그리고 해와 달을 가져오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는 이유가 하늘개가 해와 달을 물었다 뱉어서라나.
하지만, 영수가. 그것도 천지왕이 직접 만들었다는 하늘개가 왜 하계에 내려와 산마다 불을 지르고 다니는지 그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직접 하늘개를 만나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뭘 그렇게 신경 써. 내일 출근할 놈이.]
그렇다. 현천의 말대로 자신은 내일 출근해야 하니 하늘개가 어디 있는지 안다 한들 만나러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산이 저리 무참히 불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도화가 스승을 만나기 전, 인간과 도깨비의 온갖 핍박을 받는 그에게 유일하게 친절히 대해 준 이들은 산짐승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화가 동사하거나 아사하지 않았던 것은 산짐승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고 먹을 것이 있는 곳을 안내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의 산짐승들은 모두 죽어 윤회의 길에 들었겠지만, 그들의 후손은 전국 각지의 산에 살고 있을 터. 그들의 삶의 터전이 저리 송두리째 불타 버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기 힘들었다.
[진짜 하늘개가 저지른 불이라면 선계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처리할 거였다면 진작에 했을 것 같은데.]
뉴스 속보가 뜰 때마다 인명피해는 없다고 나오지만, 사람 목숨만 피해로 치는 것은 지극히 인간 위주의 생각이었다. 도화에겐 인간보다 산에서 잘만 살고 있던 동식물의 피해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인간에게 괴롭힘당했던 기억이 커서 그런 듯했다.
‘하다못해 불 끄는 일이라도 도울 순 없나.’
강풍을 멈추게 할 능력은 없으니 물이라도 뿌리러 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당장 내일 아침 출근을 해야 하는 도화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고?]
현천이 도화의 다리와 발목 근처를 맴돌며 물었다. 한쪽 발목에는 시커먼 손자국이, 반대쪽 종아리에는 먹물에 적신 실로 장난을 친 것처럼 검은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수귀의 손과 머리카락에 붙잡혔던 흔적이었다.
[그냥 좀 저릿한 정도? 내일쯤이면 다 사라질 텐데 새삼 걱정은.]
[반나절이면 다 나아야 하는데 꼴이 계속 그 지경이니 묻는 거잖아.]
도화는 수귀에게 잡혔던 흔적을 다시 살펴보았다. 현천의 말대로 악귀에게 잡힌 상처는 반나절이면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던 몸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하루가 훌쩍 지났는데도 흔적이 너무 선명했다.
[평범한 잡귀는 아니라서 그런 것이겠지. 달구까지 끌어들였잖아.]
[그렇긴 해. 최소 백 년은 묵은 악귀인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흔적이 느리게 사라지는 건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린 둘은 서재를 나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다. 분명 오전에 서재에 들어왔는데 점심도 건너뛰고 저녁을 먹게 생겼다.
“이제 나오셨어요?”
담마도 이제야 게임이 끝났는지 기지개를 켜며 방에서 나오다 마주쳤다. 배를 슥슥 문지르는 것을 보니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도화는 말없이 주방으로 가 앞치마를 둘렀다. 그걸 본 담마도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며 식사 준비를 도왔다. 같이 산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인데 마치 몇 년은 같이 산 것처럼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런데 너… 많이 자란 것 같다?”
“아, 그런가요?”
수저를 챙기던 담마가 도화 앞에 마주 서서 제 키를 가늠해 보았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도화의 허리에도 못 미치던 키가 어느새 가슴까지 자랐다. 이제는 초등학생이 아니라 중학생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도화는 내심 초등학교 입학을 미룬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인간의 평균에서 급격히 벗어난 개체는 인간이 아닐 확률이 높다. 눈 밝고 입 가벼운 귀물이 어디 한둘이던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인간답지 않은 과한 성장을 했다는 소문이 화린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얼마나 더 클 것 같아?”
도화는 담마를 학교로 보내는 게 맞는지 고민이 되어 물었다. 좀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담마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좀 더 클 것 같아요. 음… 학교를 다녀야 한다면 고등학교부터 가야 할지도요?”
“학교 갈 생각은 있고?”
도화의 질문에 담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학교에 꼭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함께 지내는 사람이 인간이라면 모를까. 한 명은 반도깨비이고 하나는 검이다. 그리고 옆집에는 저승차사가 살고 있다. 직장도 망자를 상대하는 차사국인 데다 담마 본인도 차사국장인 강림 도령한테 교육받고 있으니, 인간이 우글우글한 학교에 다녀야 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아직까진 없어요.”
“그래? 그러면 나중에 가고 싶어지면 말해.”
여강진이라면 고등학교 입학도 손쉽게 해결해 주겠지. 여강진이 못 한다면 묵범도 있고, 강림 도령도 있다. 도화는 담마의 밥그릇에 흰 쌀밥을 고봉으로 담아 건넸다. 여자아이가 먹기에 심히 많은 양이었지만, 담마는 군소리 없이 받아 들었다.
그에 비해 도화의 밥은 담마의 절반도 안 되는 양이었다. 담마도 그런 도화의 밥그릇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대체 저 덩치에 저만큼만 먹고 어떻게 버티나 싶었는데 멀쩡히 차사 일까지 해내는 것을 보고 나니 괜한 걱정이었음을 인정했다.
“먹고 더 먹어. 그래야 더 크지. 넌 너무 작아.”
담마는 제 앞으로 옮겨진 고기반찬들을 보고 알았다고 끄덕였다. 중학생치고 이 정도 키는 꽤 큰 편인데. 아무래도 도화는 본인의 키를 기준으로 담마의 키를 재고 있는 듯했다. 팔척 귀신 정도 크면 저 작다는 소리를 안 들으려나.
그렇게 담마는 고기를, 도화는 버섯볶음을 열심히 씹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
젓가락질을 하던 도화의 손이 멈칫했다. 경박한 박자로 울리는 초인종 소리. 누군지 안 봐도 뻔했다.
“범 아저씬가 보네요.”
“이 새끼는 꼭…….”
밥 먹을 때 쳐들어온단 말이야. 도화는 뒤엣말을 씹던 밥과 함께 꿀꺽 삼켰다. 담마는 도화가 열어 주란 말도 안 했는데 쪼르르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홍도화 씨 계십니까?”
묵범은 현관에 도화의 신발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일부러 큰 목소리로 도화를 찾았다. 도화는 방금 삼킨 밥이 명치에 콱 걸린 것 같아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 식사는 여기서 접어야 할 것 같아. 밤에 출출해지면 야식이라도 먹든가 해야지.
푼 밥의 반도 못 먹고 자리에서 일어선 도화는 불청객의 멱살을 잡고 서재로 끌고 들어갔다.
“참… 사이가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홀로 식탁에 남겨진 담마는 쾅! 하고 큰 소리를 내며 닫힌 도화의 서재 문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술병에 몸을 담그고 있던 현천이 껄껄대며 웃었다.
[저거 싫은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정말요?”
[진짜 싫었으면 칼부림 났지.]
“아…….”
담마는 도화가 칼부림을 벌이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묵범 앞에서는 성격이 거칠어지긴 해도, 묵범만 없다면 항상 침착하고 조용하며 생각이 깊기만 한 도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너는 네 할 일이나 해. 쌀먹 한다며?]
“그렇죠. 꽤 벌었어요.”
[얼마나? 나 술 사 줄 돈은 되나?]
“뭐 드시고 싶은데요? 그런데 저 미성년자라 어디 가서 술 못 사요.”
[흠. 아쉽구먼.]
현천은 병에 든 술을 다 흡수하고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도화와 묵범이 들어간 서재 문에 찰싹 달라붙었다.
“뭐 하세요?”
[무슨 이야기 하나 궁금해서.]
“일 이야기겠죠. 저 게임 하는 거 구경하실래요?”
[오, 게임!]
게임이란 말에 현천이 쪼르르 담마에게 날아갔다. 전에 담마가 게임 하는 것을 몇 번 구경했었는데,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했었다. 키보드와 마우스 따각거리는 게 다인데 그걸로 돈을 벌다니. 현천에겐 신기할 따름이었다.
* * *
“어차피 내일 출근할 때 얼굴 볼 건데 뭐 하러 온 거지?”
도화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안 그래도 산불 걱정 때문에 첫 월차를 제대로 쉬지 못하고 날려 버렸는데 직장 상사가 불청객으로 나타나다니. 최악이다.
“내일은 좀 먼 곳으로 외근을 나가야 할 것 같아서 미리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좀 먼 곳?”
홍천도 멀었는데, 그보다 더 먼 곳인가?
묵범과 차 안에서 긴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욱신거렸다.
“어딘데.”
“음… 멀다기보다는 시간이 걸린다고 해야겠군요. 아, 잠깐 컴퓨터 좀 써도 되겠습니까?”
묵범은 도화에게 허락을 구하는 말을 하며 컴퓨터 앞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허락의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키보드와 마우스를 만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어디 함부로 남의 컴퓨터를 쓰냐고 의자를 빼내려던 도화는 묵범이 검색한 것을 보고 멈칫했다.
‘산?’
모니터에 가득 찬 것은 한국의 산이 자세하게 표시된 지도였다. 펜꽂이에서 빨간색 매직을 꺼내 든 묵범은 거침없이 모니터에 선을 주욱 긋기 시작했다.
“강원도로 가서 설악산, 계방산을 찍고 전북으로 이동해서 덕유산, 지리산. 이렇게 돌 겁니다.”
“……저걸 다 돈다고? 하루 만에?”
“정 안 되면 1박이라도 해야겠지요.”
“그런데 저긴 지금 산불로 난리 난 데 아냐? 가서 불이라도 끄려고?”
“아니오. 추혼부 차사가 무슨 소방관이라도 된답니까? 불 끄러 다니게?”
묵범이 가볍게 웃으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내심 화재 진압에 투입되길 바랐던 도화는 묵범의 웃는 낯짝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그러면 왜?”
“하늘개를 찾으러 갑니다.”
“하늘개를?”
묵범이 책상 한쪽에 놓인 하늘개 동화책을 집어 들더니 손가락으로 표지 속 하늘개를 톡톡 쳤다.
“이 녀석이 방화범이거든요.”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