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묵범은 현천을 쥐고 수귀의 손과 머리카락을 잘라 내려는 도화를 저지했다. 그리고 수귀가 듣지 못하도록 도화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손만 잘라 가서 뭐에 씁니까? 뭍으로 완전히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잡으면 됩니다.”
맞는 말이다. 손을 자른다 한들, 사람 몇 잡아먹으면 다시 재생할 테니 완벽하게 해치우는 게 나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렇게 붙잡혀 있을 생각이지? 도화는 수귀에게 잡혔던 다리가 아직도 축축한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워졌다. 풀려나도 이런데 계속 붙잡혀 있는 묵범은 얼마나 더러울지 짐작되었다. 그런데도 싱글싱글 웃으며 여유를 잃지 않는 묵범이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뒤로 물러서요.”
뭔가 계획을 세웠나 보구나, 믿은 도화는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묵범은 그런 도화를 따라가는 것처럼 천천히 강가를 벗어났다. 어느 정도 강에서 멀어지자 물안개가 미세하게 걷히며 묵범의 다리에 매달린 수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것이 달구까지 이용해 먹은 수귀로군.]
현천이 작게 중얼거렸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도화는 현천을 더욱 세게 쥐었다. 뭍으로 나왔지만, 자욱하게 물안개를 깔아 이 일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었으니 수귀의 힘을 얕볼 수 없었다.
[키킥. 멍청한 달구 놈이 마지막에 거하게 한 상 차려 주고 갔구나.]
수귀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 울리는 소리는 듣기 답답했다.
[빌어먹을 저승차사들 때문에 등가죽이 뱃가죽에 붙어 뒤지는 줄 알았는데. 히히! 배가 터지겠어!!]
도화는 간사하게 웃어 대는 수귀의 입을 닥치게 하고 싶었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같은 팀이자 자신의 상사인 묵범이 별다른 반격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묵범의 다리에 매달린 수귀의 몸이 뭍으로 완전히 끌려 나왔다. 하지만, 수귀의 머리카락은 끝도 없이 길어서 여전히 강과 연결된 상태였다.
[대체 머리카락이 얼마나 긴 거지?]
[먹은 게 다 머리카락으로 갔나.]
현천도 저리 긴 머리카락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지금 보니 강물이 온통 새카맣다. 아무래도 수귀의 머리카락이 물속 가득 퍼져 있어서 검게 보이는 듯했다. 강 속에 검은 머리카락이 가득하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날 끌고 뭍으로 나오다니. 힘이 꽤 장사야.]
바닥에 엎드려 있던 수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수귀가 말을 건 사람은 묵범이었다.
[용한 박수무당이 날 성불시키려고 온 것 같은데, 이거 어쩌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일어난 수귀의 얼굴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드러난 얼굴 피부는 물에 퉁퉁 불어 시퍼렇게 변한 손과 같았다. 차라리 머리카락으로 가려져서 다행이었다. 귀신, 그것도 악귀로 변한 것들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을 잊지 못해서 집착한 나머지 실제 시신보다 더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한두 해 한 처먹은 애송이 원귀라면 모를까. 내가 고작 박수 따위한테 잡힐 듯싶더냐?]
묵범과 도화가 가만히 있어서 그런가, 수귀는 저 혼자 신이나 주절댔다. 저승차사들의 감시 때문에 쫄쫄 굶다가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가득한 사람을 둘이나 제 영역에 붙들어 놓았으니 입에 침이 가득 고였을 것이다.
“어떻게 할 거야. 생포해?”
“생포라. 이미 죽은 지 한참 된 악귀한테 생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군요.”
“하긴. 생포는 산 사람한테나 쓰는 말이지. 그러면… 그걸로 포박할까?”
도화가 도포 소맷자락을 흔들며 물었다. 소맷자락 안에는 붉은색의 부용삭이 들어 있었다. 묵범은 묘하게 상기된 도화의 얼굴을 보고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함께 원귀를 잡으러 외근을 나갈 때마다 부용삭으로 원귀를 포박하는 일은 묵범이 도맡아 했다.
부용삭을 다루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라 초보자인 도화는 열심히 사용법을 익히고 있기만 했지, 아직 실전에서 써 본 적은 없었다.
‘어지간히 써 보고 싶었나 보군.’
묵범은 흔들리는 도화의 소맷자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에서 써 보는 것도 큰 배움이 될 것이다.
묵범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화는 수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아주 미세하게 기운을 움직여 부용삭을 손목에 감았다. 지금, 수귀는 묵범과 도화를 박수무당이라고 여기고 경계를 푼 상태다. 만약 저승차사인 것을 들킨다면 다시 강으로 도망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으니 기습을 하기 전까진 최대한 조심히 움직여야 했다.
다행히 수귀는 묵범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아니, 신경이라기보단 어찌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 수 있을지 궁리를 하며 묵범에게 다가갔다. 수귀의 얼굴에서 끈적거리는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누가 수귀 아니랄까 봐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지만, 도화는 끈적한 액체가 물이 아닌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저건 침이다. 진수성찬을 앞에 둔 삿된 것의 더러운 침.
그는 당장 수귀를 처리하고 홍천을 뜨고 싶어졌다. 수귀가 저 강물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강이 더럽게 느껴졌다.
“박수무당이라. 무당은 악귀를 어찌 퇴치하더라?”
수귀가 다가오는데도 묵범은 엉뚱한 고민을 했다. 수귀의 장단에 맞춰 주려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를 태도였다.
[어디 할 수 있다면 해 보거라.]
킬킬. 수귀가 웃으며 묵범의 등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려 묵범의 어깨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날카롭고 뾰족한 수귀의 이빨은 바위도 잘게 부서트릴 것처럼 강해 보였다.
하지만.
[……어?]
바위는 부숴도 묵범의 도포는 뚫지 못했다. 날카로운 이빨 아래, 도포는 작은 흠도 나지 않았다. 수귀는 믿을 수 없다며 몇 번이고 다시 어깨를 물었으나 결과는 같았다. 오히려 수귀의 이가 흔들거렸다.
얼빠진 수귀가 잠시 멈칫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도화가 나섰다. 소매를 펄럭이며 팔을 휘두르자 손목에 감겨 있던 부용삭이 빠르게 수귀에게 쏘아져 나갔다. 붉은색 끈은 도화의 명령을 받들어 살아 있는 뱀처럼 수귀를 포박했다. 이제 잡은 수귀를 봉인석에 담아 차사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어… 저기, 홍도화 씨. 연습 제대로 한 거 맞습니까……?”
살풋 인상을 쓴 묵범이 도화에게 물었다. 도화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뭐냐, 홍도화. 처음이라 긴장했다 해도 저건 좀 심한 거 아냐?]
현천도 혀를 차며 도화에게 물었다. 안다. 나도 안다고. 도화도 본인에게 묻고 싶었다. 멍청한 홍도화. 그토록 연습했던 실력은 다 어디로 간 거냐.
도화의 부용삭은 도화의 명령대로 수귀를 꽁꽁 묶었다. 거기까진 괜찮다. 문제는 부용삭이 수귀만 묶은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거 좀 풀면 안 되겠습니까? 묶여 보니 많이 답답하군요.”
묵범까지 세트로 묶어 버렸다. 졸지에 묵범은 수귀를 등에 업고 어깨를 깨물리며 부용삭에 묶인 웃지 못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뭐야…. 네놈들. 박수무당이 아니야?]
수귀는 그제야 묵범과 도화가 박수무당이 아님을 눈치챘다. 아까 제 머리카락을 잘라 낸 검도 심상치 않았으나 잘 벼린 날에 잔챙이 신이 붙어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는데. 자신을 포박한 붉은 끈을 보니, 이들은 박수무당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무언가란 것을 수귀도 뒤늦게 깨달았다.
[붉은 끈…. 붉은 끈…….]
붉은 끈뿐이랴? 지금 보니 둘 다 요즘 인간은 잘 입지 않는 도포를 걸치고 있다. 왜 저걸 이제 눈치챈 거지? 수귀는 자신이 극심한 허기에 판단력이 흐렸음을 인정했다.
[네놈들…. 빌어먹을 차사 놈들이구나!!]
노한 수귀가 부용삭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도화의 명령을 아주 착실하게 이행한 부용삭은 수귀가 몸부림을 칠수록 더욱 강하게 조여들었다.
“아, 귀청 떨어지겠네.”
나 죽는다고 악을 쓰는 수귀와 달리 묵범은 한데 묶여 있는데도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수귀가 그의 귀에 대고 비명을 지르는 통에 미간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홍도화 씨. 이거 못 풉니까?”
“어, 그게, 그러니까…….”
사실 도화는 아까부터 부용삭을 풀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부용삭은 더욱 강하게 조이기만 했다. 온오프 기능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물론, 부용삭에 그런 기능이 있을 린 없었다.
‘젠장. 풀리라고…!’
도화의 속 타는 외침을 듣기라도 한 것인지 부용삭이 꼬리를 흔들며 더욱 수귀와 묵범을 옥죄었다. 순간, 도화는 자신의 부용삭이 말 더럽게 안 듣는 뱀처럼 보였다.
“홍도화 씨.”
“아, 알았어!!”
결국, 도화는 현천을 들고 묵범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부용삭이라 해도 현천상제의 검 앞에선 무용지물이겠지. 완전히 끊진 않더라도 위협 좀 하면 말을 듣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그거로 부용삭을 끊게요? 차라리 수귀를 찔러 없애 버리시죠. 그게 나을 것 같은데.”
묵범의 제안을 들은 수귀가 허연 눈으로 도화를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도화의 손에 들린 현천을.
[저것은…….]
아까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 볼품없는 은장도다. 하도 볼품없이 생겨서 시답잖은 장군 신이 깃든 무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뒤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자신은 저승차사에게 묶여 버렸다. 그러나 한 놈이 어리바리한 탓에 같이 온 저승차사도 묶여 버렸다.
수귀의 뱃속에서 요 근래 차사들 때문에 배를 곯은 원한이 치솟기 시작했다. 진수성찬을 맛볼 거란 기쁨에 잠시 잊었던 원한이었다.
[내가 혼자 죽을 것 같더냐? 죽더라도 어디 끝까지 갈 테다!!!]
수귀의 머리카락이 갑자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강 속까지 이어졌던 머리카락이 폭발하듯 하늘로 붕 떠올라 다가오던 도화를 공격했다. 그리고 같이 묶여 있던 묵범을 작은 틈도 남기지 않고 칭칭 감아 버렸다. 수귀의 머리카락에 갇힌 묵범은 검은 미라처럼 보였다.
“윽…! 현천!!!”
[알았다.]
은장도 크기였던 현천이 도화의 부름에 바로 길이를 늘였다. 장검이 된 현천은 도화에게 달려드는 수귀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베어 냈다. 수귀 따위가 현천상제의 신기를 당해 낼 순 없다. 하지만, 그건 현천상제가 휘두를 때의 일. 도화의 손에서는 현천이 제힘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수귀의 머리카락이 끝도 없이 쌓였다. 그러나 달려드는 머리카락도 끝이 없었다. 조금씩 강으로 끌려 들어가는 묵범의 모습을 보니 숨은 쉴 수 있는 건가 걱정이 될 정도로 꽁꽁 싸여 있었다.
‘계속 방어만 할 순 없어.’
도화는 현천을 잡은 손에서 자신의 기운이 쑥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대로 가다간 수귀에게 저까지 잡힐지도 모른다.
‘젠장.’
도화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현천의 검날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날을 따라 손가락을 내리그었다.
도화의 피가 현천의 검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자 현천이 기쁘게 외쳤다.
[피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