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도깨비불.’
저건 분명 도깨비불이다. 하지만, 도깨비불을 쓸 수 있는 도깨비는 이제 없다고 들었다. 묵범이 본 도깨비불도 아주 오래전에 본 것이었다. 인간들 말로 치면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인간과 귀물이 지금보다 더 한데 섞여 지내던 먼 과거였다.
그때의 도깨비들은 태어날 때부터 도깨비불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도깨비와 도깨비불은 항상 붙어 다니는, 한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도깨비의 무기이다.
그런 도깨비불이 약 500년 전, 모종의 사건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 뒤로 도깨비의 나라 교맥국에선 도깨비불이란 말은 금기어가 되었다고 들었다.
어쨌든, 도깨비에게서 사라진 도깨비불을 도깨비 혼혈인 홍도화가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불꽃을 피웠다는 것은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정작 홍도화 본인은.
“뭐,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또 허튼짓하려고?”
자신이 도깨비불을 피웠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혹시 현천은 보지 않았을까?
[네가 참아. 이런 반응이 재미있어서 더 그러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현천은 도화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재차 주먹을 휘두르지 않도록 말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깨비불을 못 본 것 같다.
‘홍도화. 대체 정체가 뭐지?’
묵범은 쓰라린 명치를 손으로 슥슥 문지르며 도화에게서 살짝 떨어져 앉았다. 묵범이 갑자기 얌전해지자, 도화는 불어 터진 컵라면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물론 묵범을 경계하는 것은 늦추지 않았다.
‘부모 중 어느 쪽이 도깨비인진 모르나… 평범한 도깨비는 아닐 것 같군.’
도깨비불도 도깨비에 따라 색이며 운용하는 방법이 제각각이라던데. 홍도화의 도깨비불은 어떤 색이고 어떻게 사용할지 궁금해졌다. 당장 붙잡고 다시 아까처럼 도깨비불을 피워 보라고 하고 싶지만, 묵범은 호기심을 꾹 참았다. 도화가 질색하는 일은 잘만 저지르는 묵범이지만, 홍도화가 도깨비에게 항상 목숨을 위협받으며 살았다는 것은 잊지 않고 있다.
도깨비불에 대해 물었다가 되려 자신이 물려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묵범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보자고 다짐했다. 도화에게 물리는 게 무섭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려 보고 싶었다. 주먹질도 굉장히 매서운데 이빨은 얼마나 튼튼할까. 잇자국이 난다면 그거 가지고 한참을 놀려 먹을 수 있겠지.
‘기분 나쁘게 왜 처웃고 난리야.’
다 식은 라면 국물을 마시던 도화는 묵범이 저를 쳐다보며 소리 없이 씨익 웃는 것을 보고 마시던 국물을 도로 뱉어 냈다. 방금까진 세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에 꿀맛이었던 컵라면이 갑자기 맛이 없어졌다. 저 자식이 왜 자길 보고 저렇게 기분 나쁘게 웃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체할 것 같다.
“슬슬 해가 질 것 같은데. 움직여 볼까요?”
묵범은 도화가 컵라면 용기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말대로 어느새 내리쬐던 햇빛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습도가 어마어마하군. 몸에 녹이 슬 것 같아.]
현천이 기분 나쁘다며 검신을 부르르 떨었다. 도화도 아까부터 피부가 끈적거릴 정도로 높아진 습도가 거슬리던 중이었다. 해가 쨍쨍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리 강가라고 하지만, 습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한창 장마일 때보다 더 심한 것 같군.”
이마에 맺힌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 낸 도화는 어느새 피서객들이 사라진 강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장 늦게 자리를 정리한 피서객 한 무리가 투덜투덜 짜증을 내며 도화와 묵범의 평상 근처를 지나갔다.
“오늘 비 안 온다고 했는데 날씨가 왜 이래?”
“장마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일부러 장마 기간 지나서 휴가 늦게 잡은 건데. 이번 피서는 완전 망했네.”
“내일은 괜찮아지겠지. 오늘은 쉬고 내일 제대로 놀자.”
숙소로 들어가는 그들은 지나친 습기에 지친 표정이었다. 그렇게 강가에는 도화와 묵범, 그리고 현천밖에 남지 않았다. 방금까지 시끌벅적했던 주위가 적막해졌다. 바로 앞에 흐르는 강물을 보지 않았다면 밀폐된 방에 홀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그나마 멀리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이곳이 야외임을 알렸다.
“수귀가 몸이 단단히 달았나 보군요.”
묵범과 도화는 각자 도포를 걸쳤다. 수영복 바지 차림에 도포, 게다가 맨발이다. 담마가 봤다면 인상을 썼을 것 같다.
“우리가 저승차사라는 걸 알아보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흑립은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수귀는 뭍에서는 시력이 현저하게 낮아지거든요.”
“그러면 다행이고.”
“강가에서 기다립시다.”
묵범이 먼저 앞장섰다. 그의 뒤를 따르는 도화는 물가에 다가갈수록 더욱 짙어지는 습도에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물을 머금은 공기는 무겁다 못해 물속에 잠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물속이랑 밖이랑 별 차이 없는 거 아닌가?’
그러면 곤란한데. 도화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범은 거침없이 강으로 향했다. 그리고 산책하듯이 느긋하게 강가를 거닐었다.
물속은 수귀의 영역이라고 본인이 말해 놓고 묵범은 발목까지 물속에 담그고 돌아다녔다. 아마 수귀의 눈에는 진수성찬이 ‘나 잡아 드쇼.’라고 입가에서 알짱거리는 것처럼 보일 게 뻔했다.
“위험한 거 아냐? 아까 나처럼 끌려 들어가면…….”
“이번에는 당신이 절 구해 주면 되겠네요.”
“내가 왜?”
“왜긴요.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단 말도 있잖습니까?”
아까 자기가 목숨을 구해 줬으니 이번에는 자길 구해 달라는 뜻인가 보다 했는데.
“제가 당신에게 인공호흡을 해 줬으니 이번에는 당신이 제게 인공호흡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딴 게 인공호흡이었냐?”
“아, 인공호흡이 아니라 키스라고 할까요?”
키스란 말에 도화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물론, 기가 막혀서였다.
“그딴 게 키스면 세상의 모든 멜로는 다 얼어 뒤졌겠다.”
“멜로라. 뭐, 설왕설래는 안 했지만… 이번에 홍도화 씨가 하면 되겠네요.”
설왕설래……? 여기서 갑자기 그 사자성어가 왜 나와?
도화의 이해 못 했다는 눈빛에 앞서 걷던 묵범이 몸을 돌려 도화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가를 톡톡 치더니 혀를 쑥 내밀었다.
“?”
이 새끼가 미쳤나. 갑자기 메롱을 해?
설왕설래에 이어 갑작스러운 조롱에 도화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묵범은 그런 도화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혀를 톡톡 쳤다.
“왜 자꾸 혀를 날름거려? 확 뽑아 버릴…….”
진짜 묵범의 혀를 뽑을 기세로 손을 뻗으려던 도화는 순간,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멈칫했다.
설마. 설마…?
[설이 너와 내가 아는 그 ‘설’이 아닌가 보다.]
현천이 탄식하듯 도화에게 말했다. 현천의 탄식에 도화는 자신이 설마 하던 것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설마의 ‘설’도 괜히 짜증이 났다.
[저런 놈이 저승차사라니…….]
현천에게 눈이 달렸다면 도화와 같은 눈빛으로 묵범을 쳐다봤을 것이다. 지금 도화의 눈빛은 분리수거도 못 하고 재활용도 못 하는 산업폐기물을 보는 눈빛이었다.
묵범 덕분에 도화는 잠시간 수귀에 대해 잊고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수귀의 존재감을 일깨웠다.
* * *
“나오려나 봅니다.”
묵범이 도화의 등을 밀며 말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는데 물안개가 핀다는 것은 수귀가 작정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럴 때는 수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금물이다. 지금 도화는 묵범을 따라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던 중이었다. 묵범은 버티려는 도화의 등을 힘주어 밀었다.
“왜 자꾸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만지지 말라고 짜증을 내려던 도화는 어느새 발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깔린 물안개에 인상을 썼다. 주위도 갑자기 어둑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방금까지 짙은 노을을 뿌리고 있던 해가 운무에 잠겨 그 빛을 잃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 운무가 생길 리가 없잖아.’
아무래도 수귀가 제 영역을 만들어 밖과 단절시킨 것 같다. 도화가 손을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니 희고 뿌연 것이 힘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태양빛을 가린 것은 운무가 아니라 수귀의 영역에 가득 찬 물안개였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그냥 수귀가 아닌 것 같다.]
현천의 말에 도화는 아직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묵범에게 물었다.
“야, 너. 괜찮냐?”
“뭐가 말입니까?”
“물속에 있잖아. 너도 어서 나와.”
“아, 수귀 때문에 그런 거라면… 안 괜찮습니다.”
“안 괜찮…?”
싱글싱글 웃고 있는 얼굴로 상이한 대답을 하니, 도화는 그가 괜찮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분간을 하지 못했다. 하도 질 낮은 장난을 쳐 대서 괜찮은데 일부러 엄살을 피우는 것인지 아닌지도 헷갈렸다.
“이거 당해 보니 생각보다 기분이 무척 나쁘군요.”
“?”
무슨 소린가 했더니 묵범이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켰다. 묵범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린 도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안개가 시야를 방해했지만, 묵범의 발목을 움켜쥔 시퍼런 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검은 머리카락이 묵범의 반대쪽 다리를 스륵 감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묵범의 눈썹이 슬쩍 위로 솟구쳤다. 머리카락이 다리를 감고 오르는 감각이 기분 나빠서였다.
축축한 것은 둘째치고 감히 수귀 주제에 자신의 몸을 함부로 만진다는 게 짜증이 났다.
“야, 괜찮냐? 떼어 줘?”
도화가 은장도 크기의 현천을 들고 묵범에게 물었다. 묵범은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픈 것은 아니니 참을 순 있다.
“우선 물에서 나와. 그러다 아까 나처럼 끌려 들어갈지도 몰라.”
“쉿.”
묵범이 손을 들어 도화의 입술을 꾹 눌렀다. 도화는 제 입술을 꾹 누르는 따뜻한 손가락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도화의 발목도 감으려던 수귀의 머리카락이 허탕을 치고 다시 물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거 저거. 너까지 한입에 홀랑 먹어 버리려고 하는 거 같은데?]
[입이 큰가 보네.]
도화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하며 묵범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아무리 묵범이 싫다 한들, 수귀에게 끌려가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아니,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뒷수습을 어찌할지 감당이 안 되어서가 더 정확했다.
‘나 때문에 사고당했다고 하면 짤릴지도 모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아예 저승차사가 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엄청난 지원과 혜택을 맛본 도화는, 다시 쥐꼬리만 한 알바 월급으로 원룸에서 생활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다. 혼자라면 모를까. 담마까지 함께인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묵범은 도화의 억센 손 힘을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갔다. 물론, 끌려가면서도 헛소리는 빠지지 않았다.
“거친 걸 좋아하나 보군요.”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도화는 그런 묵범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려 버리고 묵범의 다리를 확인했다. 강물에서 빠져나온 묵범의 다리에는 여전히 수귀의 손과 머리카락이 감겨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