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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46화 (47/146)

46화

“배고프지 않습니까?”

묵범이 도화의 입가에 불쑥 샌드위치 하나를 들이밀며 물었다.

“안 고파.”

평상에 앉아 강을 주시하고 있던 도화는 샌드위치 냄새에 인상을 쓰며 손으로 밀어냈다. 샌드위치보다는 쓰린 속을 달랠 따뜻한 음료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묵범이 가져온 아이스박스에 따뜻한 음료는 당연히 없었다.

“물을 많이 마셨으니 배가 고플 린 없겠군요.”

“……죽을래?”

이젠 아주 눈치도 안 보고 비꼰다. 울컥 올라오는 화를 삭이며 도화는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만 육두문자를 중얼거렸다.

“이대로 당신과 계속 파트너를 한다면 좋겠습니다.”

“내가 왜 너랑 계속해야 하는데?”

“그래야 제가 오래 살 거 아닙니까? 이렇게 하루에 수십 번씩 욕을 들으면 오늘내일할 병자도 장수할 겁니다.”

“…….”

도화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언제 갑자기 자신을 움켜쥘지 몰라 눈치를 보고 있던 현천은 도화가 심호흡을 하자 안도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침착하고 냉철하게 행동하던 도화였다. 오죽하면 불래에서 도방 선생이라 하면 돌부처란 말이 나왔겠는가. 그 정도로 도화의 성정은 깊은 물에 가라앉은 바위처럼 무겁고 조용했다.

그런데 그게 묵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물론, 묵범이 도화를 먼저 도발을 해서 그런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평소의 도화라면 무시하고 흘려넘길 만한 사소한 일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생소했다.

‘하긴. 첫 만남이 최악이긴 했어.’

현천은 마음을 다스리면서도 옆에서 알짱대는 묵범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쓴 도화를 빤히 쳐다봤다. 지금 보니 도화의 얼굴이 꽤 앳되어 보인다. 현천은 제 기억 속, 도화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산전수전 다 겪어서 그런가, 얼굴에 표정 하나 잡아낼 수 없었지.’

어찌나 무뚝뚝하고 목소리도 잘 들려주질 않는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사이가 가까워지고 난 다음에, 도화가 매우 어린 반도깨비라는 것을 알고서는 꽤나 놀랐던 기억이 난다.

현재 도화의 나이는 600살. 인간 기준이면 백골이 진토가 되어도 몇 번은 되었을 테지만, 귀물 기준으로는 아직 애송이일 뿐이다. 어린 녀석의 별칭이 석불, 목석, 돌부처… 이따위였으니 도화의 언행과 성정이 어떠한지는 말 안 해도 될 정도다.

그런 녀석이 묵범하고 있으면 제 나이로 보이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현천은 묵범이 그리 싫지 않았다. 묵범의 ㅁ만 나와도 질색팔색하는 도화와 달리 꽤나 호감이었다. 물론, 도화는 모른다. 알았다간 저 새끼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봐 놓고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화를 낼 게 뻔했다.

“수귀는 잡고 갈 거야?”

“그래야겠지요. 감히 차사를 건드린 죄. 가벼이 처리하지 않을 겁니다.”

묵범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도화는 방금까지 싱글거리던 그가 표정을 싹 지우고 낮게 중얼거리는 모습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잡귀가 저승차사를 건드린 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그냥 차사도 아니고 추혼부 차사라면 항상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다고 생각했던 도화는 묵범의 차가운 분노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 수귀 주제에 감히 저승차사를 건드려서 자존심이 상한 건가?’

이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날로 추혼부 수석 자리를 차지한 건 아니구나 싶었다.

“언제 잡을 건데. 현천 때문에 우리가 차사라는 걸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아니요. 모를 겁니다.”

묵범은 확신했다. 탁한 강 속에서 도화를 찾느라 아주 살짝 힘을 쓰긴 했지만, 정말 찰나였고 미미한 힘이었기에 수귀가 이쪽의 정체를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천이 수귀의 머리카락을 끊어 버렸으니 평범한 사람 행세는 글러 먹었다.

“무력 높은 박수무당이라 여길 겁니다.”

“흠. 그러면 현천은 무당의 무구라 여기겠군.”

가만히 있던 현천은 무당의 무구라는 말에 기분이 나쁜지 검 끝으로 평상 바닥을 푹푹 찔렀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결국, 버럭 소리쳤다.

[감히 현천상제의 무구인 나를 어디 무당에게 갖다 붙이는 것이냐!]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머리가 울린다. 묵범도 도화와 같은지 미간이 살짝 패였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저 수귀가 현천상제를 알 리가 있겠습니까? 잡귀의 좁은 식견으로는 제게 해를 입힐 자가 저승차사가 아니면 영검한 무당밖에 떠올리지 못했겠지요.”

[그, 그런가? 하긴. 저딴 잡귀가 현천상제를 어찌 알까.]

묵범이 달래듯 말하자, 현천은 금세 화를 녹이고 말랑해졌다. 도화는 묵범과 현천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걸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방금 현천의 반응처럼, 현천은 자신이 현천상제의 무구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도화를 제외한 다른 이와는 아예 대화도 나누지 않을 정도로 콧대 높은 검이었다.

그런데 묵범과는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다. 어쩌면 묵범의 언사가 존댓말을 기본으로 깔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묵범은 현천을 어르신 대하듯 하고 있었다.

‘오늘 내로 집에 갈 수 있으려나.’

한바탕 곤욕을 치른 도화는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차사국에 있을 담마도 챙겨야 했다. 그러려면 어서 수귀를 죽이든 잡든, 해결을 봐야 했다.

“숨 좀 돌렸으니 잡으러 가자.”

현천을 챙겨 든 도화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가시죠.”

“왜?”

“해가 지면 수귀가 알아서 나올 겁니다. 지금 녀석은 며칠째 굶고 있거든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저기 가게 주인한테 익사 사고가 마지막으로 일어난 게 언제인지 물어봤습니다.”

며칠째 굶고 있다, 라. 그렇다면 지금 수귀는 진수성찬을 코앞에 두고 먹질 못하는 상황일 것이다. 최근까지 차사들이 홍천강을 감시했으니 그동안 인간을 잡아먹지 못하고 죽은 듯 숨죽였을 터.

“우리가 차사복을 입지 않아서 수귀와 달구가 안심하고 활동했던 것 같군요.”

“다 잡은 물고기를 코앞에서 놓쳤으니 지금쯤, 눈에 보이는 게 없겠군.”

인간 남자와 여자, 그리고 도화까지 셋을 놓쳤다. 인내심은 바닥을 보이고 텅 빈 뱃속은 어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요동치고 있을 터. 아까 잠깐 맛을 보긴 했으니 반나절도 못 참고 튀어나올 게 뻔했다.

“차사의 힘을 쓴다면 물속에서 싸울 순 있지만, 아무래도 물은 수귀의 본진이니 뭍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아, 차사복.”

“여기 꺼내 놨습니다.”

언제 차에 다녀왔는지 차사복이 든 가방이 평상 구석에 놓여 있었다.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굴면서 묵범은 일과 관련된 것은 준비성이 철저했다.

“컵라면 드시겠습니까?”

“……뭐?”

커다란 보온병에서 김이 펄펄 날 정도로 뜨거운 물이 컵라면 용기로 쪼르륵 소리를 내며 부어졌다. 이 자식. 이거 수귀 잡으러 온 게 아니라 먹으러 온 게 아닐까? 방금까지만 해도 일은 철저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묵범은 일보다 먹는 것에 더 철저한 것 같다.

[먹지그래. 도화, 너. 입술이 파래.]

현천이 도화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나무젓가락 자르기에 집중하고 있는 묵범을 보니 현천은 아까와 달리 도화에게만 들리게 말을 건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입술이 파랗다고? 왜?

도화는 손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색이 파랗게 변할 만한 이유를 찾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물에 빠져 본 적이 없던 도화는 입술이 파래진 이유가 수귀 때문에 물속에서 한참을 숨도 못 쉬고 물을 마셨기 때문이란 걸 떠올리지 못했다.

“떨지 말고 이거 받아요.”

“내가 왜 떨어. 여름이라 춥지도 않은데.”

묵범이 예쁘게 잘 쪼갠 나무젓가락과 함께 컵라면을 내밀었다. 도화는 컵라면을 받으려고 내민 제 손을 보고 그가 왜 떨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내 손… 왜 이래?’

묵범의 말대로 자신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도화는 받아 든 컵라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춥지도 않은데 왜 이러지? 입술이 새파랗다고 하질 않나. 어디 크게 병이라도 난 걸까.

젓가락을 들 생각은 하지 않고 또 무의식중에 입술을 매만졌다. 살짝 차가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도화의 모습을 보던 묵범이 커다란 타월을 도화의 어깨에 걸쳐 주며 말했다.

“한 번 더 하고 싶으면 말해요. 언제든 대기 중이니까.”

“……?”

입술을 매만지던 도화가 인상을 쓰고 제 뒤에 있는 묵범을 돌아보았다. 뭘 한 번 더 하고 싶고 뭘 대기 중이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묵범은 그런 도화에게 제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제 입술은 항상 열린 문이니 언제든 오케이란 뜻입니다. 하하. 이렇게 확답을 꼭 받아야 하는 타입인 줄은 몰랐군요. 홍도화 씨.”

“…뭐가 어쩌고저째?”

생명의 은인-반도깨비니 고작 물에 좀 오래 잠겨 있다 한들 정말 죽진 않을 테지만-이다, 그러니 참아야 한다. 마음을 다스린 보람도 없이 묵범은 단번에 도화의 속을 뒤집었다.

도화의 분노가 담긴 주먹이 묵범의 명치를 향해 쐐기처럼 박혔다. 주먹이 깊게 파고들며 묵범의 상체가 앞으로 살짝 숙여졌지만, 고통 어린 신음은 들리지 않았다. 도화는 자신의 주먹이 묵범의 명치에 꽂히기 전에 그의 손에 막힌 것을 깨닫자마자 손을 거두었다.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손속이 상당히 거칠군요.”

“그걸 알면 주둥이 간수 좀 잘하든가.”

공격은 실패했지만, 도화는 침착하게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어느새 도화의 얼굴은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이글이글 분노가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푸른 불꽃?’

묵범은 제게 매섭게 달려드는 도화의 주먹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찰나였지만, 도화의 주먹 주변에 푸른 불꽃이 일렁거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불꽃에 정신이 팔려 도화의 주먹을 막아내지 못했다.

“윽…….”

퍼억!

듣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묵범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명치에 꽂혔단 느낌이 주먹을 통해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작 한 대에 매우 짧은 신음이 다였지만, 도화는 십 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갔다.

“일부러 맞아 줘서 여기까지만 하는 거야. 다음은 한 대로 끝나지 않을 테니 각오해.”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린 도화는 식어 버린 컵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불어 터진 면은 젓가락질을 이겨 내지 못하고 툭툭 끊어졌다. 딱 봐도 참 맛없어 보였지만, 도화는 묵범에게 세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에 불어 터지고 식은 컵라면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분명 푸른 불꽃이었어.’

묵범은 쓰린 명치를 손으로 문지르며 스치듯 보았던 푸른 불꽃을 떠올렸다. 도화의 주먹을 감싸듯 일렁이던 불꽃은 푸른색이라고 콕 짚어 설명하기 애매한 색이었다. 비색과 옥색의 중간 같기도 했고 청천색 같기도 했다.

그리고 묵범은 오래전에 저 불꽃을 본 적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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