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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41화 (42/146)

41화

결국, 도화는 묵범의 품에 안긴 채로 청운각에서 내려왔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이대로 솟을대문까지 갈 기세라 계단이 끝나자마자 묵범의 품에서 벗어났다. 물론 순순히 벗어난 것은 아니고 몸부림을 쳐서 겨우 벗어났다.

‘선인은 원래 저렇게 힘이 센가?’

도화는 저를 놓지 않으려던 묵범의 손 힘에 몸서리를 쳤다. 잡혔던 팔뚝과 허벅지가 얼얼했다.

“왜요. 춥습니까?”

운전을 하던 묵범이 대뜸 도화에게 물었다.

“미쳤어? 이 여름에 춥게?”

반사적으로 묵범의 질문을 받아친 도화는 묵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에어컨 온도를 조절하는 것을 보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뭐지? 분명 앞을 보고 운전하고 있었는데…. 눈이 옆에 달렸나?

몸을 크게 움직인 것이라면 모를까. 아주 살짝 떤 것뿐인데 앞을 보고 운전하면서 그걸 눈치채다니. 눈썰미가 너무 예리했다. 예리한 눈썰미만큼 눈치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집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이나 사 갈까요? 맛없는 술을 마셔서 그런가, 단 게 땡기네요.”

애석하게도 눈치는 오지게도 없었다. 안 그래도 청운각에서의 추태를 유 차사에게 보여서 기분이 별로인 도화였다. 게다가 솟을대문에 도착해서는 산월과의 묘한 기 싸움에 살짝 지치기까지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음식이 도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믿는 듯했다. 아니라고 해도 다음에 오면 더 잘 대접하겠다, 좋아하는 음식을 말해 달라고 하더니 저번처럼 음식을 바리바리 챙겨 줬다.

지금 묵범의 차 뒷좌석과 트렁크에는 산월이 챙겨 준 음식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가서 식혜나 퍼마셔. 산월 씨가 챙겨 줬잖아. 네 괴상한 입맛에 맞게 혀가 꼬일 정도로 단맛이라는데, 아이스크림은 무슨.”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이고, 식혜는 식혜이지요.”

이쯤 되니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일부러 이러는 것 같다. 도화는 더 받아칠 기력이 없어서 말없이 창밖만 쳐다봤다. 아무래도 저 자식은 자신이 발끈하는 것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저 자식이 무슨 말을 해도 발끈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래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정작 묵범과 마주하면 다짐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추운 게 아니라면… 여기가 아픕니까?”

“!!!”

묵범이 손을 뻗어 도화의 허벅지를 꽉 붙잡았다.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어서 안심했는데. 안심이 아니라 방심이었다.

“뭐, 뭐 하는…!!”

“아까 제가 세게 붙잡은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이긴 했습니다만, 몸까지 떠는 것을 보니 많이 아픈가 해서요. 근육이 뭉쳤는지 확인해 보는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당장 손 떼.”

도화가 질색하며 묵범의 손을 떼어 내려고 잡아당겼다. 한차례 버티던 묵범은 도화의 반응을 살피더니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참 예민하군요.”

“예민…? 너야말로 손버릇이 안 좋다는 생각은 안 하냐?”

“저는 당신이 아픈 것 같아서 걱정되어 확인한 것뿐입니다. 세게 잡지도 않았는데… 몸이 많이 민감한 체질인가 봅니다? 일상 생활하는 데 많이 불편하겠어요.”

묵범은 제멋대로 도화의 체질을 판단하고 걱정까지 했다. 도화는 묵범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어찌 대꾸해야 할지 말을 고르지 못했다. 그래서 주먹을 휘둘렀다.

“운전 중에 위험한 행동은 금물입니다.”

“한손으로 운전하면서 옆 사람 희롱하는 것은 괜찮고?”

“희롱이라니요. 누가 들으면 크게 오해하겠습니다. 전 단지, 당신의 건강이 걱정되어 그런 거라니까요?”

묵범은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도화에게 말했다. 어찌나 진정성 가득한 얼굴이던지. 순간, 도화는 묵범의 말에 넘어갈 뻔했다. 이 자식, 정말 내 몸이 걱정되어서 그런 거였나?

하지만, 도화의 긴가민가한 믿음을 깨 버린 것은 묵범 본인이었다.

“한 번 더 만져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새끼를 믿을 뻔한 내가 등신이지.

도화는 잠시 힘을 풀었던 주먹을 불끈 쥐고 재차 휘둘렀다. 그렇게 집에 도착할 때까지 묵범은 도화의 주먹을 요리조리 피하며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을 했다.

* * *

곧 가을이 온다고 뉴스가 아침저녁으로 떠들어 대고 홈쇼핑 광고는 온통 가을옷 판매가 줄을 이었지만, 정작 현실은 늦은 여름휴가를 가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올해는 늦은 휴가를 떠나는 직장인이 작년보다 30% 많아졌습니다. 인파가 몰리지 않아 여유롭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반면, 늦장마와 맞물려 물놀이 사고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홍천…….

이른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도화는 담마가 틀어 놓은 TV 앞에서 멈칫했다.

‘여름휴가……. 내년부터는 갈 수 있는 건가.’

도화는 지금껏 휴가라는 것을 다녀와 본 적이 없었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휴가를 받아도 다른 아르바이트를 가야 했고, 어쩌다 운 좋게 휴가 기간이 겹쳐도 대타를 뛰거나 도방 선생으로 들어온 의뢰를 했다.

저승차사로 입사하긴 했으나 휴가 기간을 넘겨 들어온지라 여름휴가는 내년에야 받을 수 있을 터. 그래도 주말에 쉴 수 있고 연차도 챙길 수 있어 별 불만은 없었다.

‘관상 의뢰 정도는 다시 받아도 되지 않을까?’

블로그를 잠시 닫은 이유는 저승차사 업무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관상을 보는 건 심력을 꽤나 소모한다. 차사 업무와 병행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단 걱정에 내린 결정이었는데. 주말에 한 건 정도는 괜찮을 듯싶다.

“삼촌. 벌써 7시예요.”

어느새 TV를 끈 담마가 현관에 서 있었다. 도화는 근처에 둥둥 떠 있는 현천을 잡아 주머니에 집어넣고 신발을 신었다. 나갈 준비가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딩동- 묵범이 초인종을 눌렀다. 마주하기 껄끄러운 놈과 출근부터 퇴근까지,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매우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차를 한 대 뽑아야겠어.”

도화의 중얼거림에 운전을 하고 있던 묵범이 눈을 반짝였다.

“차요? 환경을 지극히 생각하는 도화 씨에겐 전기차가 어울리겠군요.”

“아침부터 멕이는 거냐?”

“제가 왜 도화 씨를 멕이겠습니까? 당신의 취향을 고려한 의견 제시였을 뿐입니다.”

도화가 의심 어린 눈빛으로 묵범을 노려보았다. 저번에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낡은 옷을 입은 제게 고도로 발달한 구두쇠는 환경 운동가와 다를 바가 없다고 했던 것을.

“원하는 차가 있으면 다 지급이 될 겁니다. 하지만, 면허는 있습니까?”

“있어.”

“오…….”

뭐야, 저 반응은. 묵범의 의외라는 듯한 반응에 도화는 아침부터 기분이 상했다.

“가장 최근에 한 운전이 언제였습니까?”

이 자식. 정말 아침부터 날 물 먹이려고 이러는 게 분명하다. 도화는 빠득 이를 갈며 대답했다.

“40년 전…….”

“설마, 그때 면허를 딴 건 아니겠지요.”

“…….”

맞다. 약 40년 전, 간신히 모은 돈으로 운전면허를 땄고 그 뒤로 지금껏 차를 사지 못했다. 그러니 도화의 운전 경험은 운전면허를 딸 때 탄 것이 전부였다.

도화가 입을 꾹 닫자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은 묵범은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차를 뽑을 생각도, 남의 차를 운전할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언제까지 네 차를 타고 다닐 순 없잖아.”

“출퇴근이라면 제가 책임지죠.”

“출퇴근 외에는? 나도 차 끌고 갈 데 많거든?”

“제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미쳤냐?”

출근부터 퇴근까지 붙어 지내는 것도 싫은데 이외의 시간까지 함께할 순 없다. 단순히 목적지까지 태워 준다 해도 자신의 동선이 읽히게 되니, 도화의 질색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면 제가 운전 연수를 해 드리죠. 한동안은 따로 운전 학원에 연수 신청을 할 시간은 없을 겁니다.”

“시간이 없다고? 왜?”

도화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 주말 운전 연수를 검색했다. 그러자 검색 페이지 상단에 떡하니 ‘방문운전연수-장롱면허 탈출 보장!’이란 광고가 보였다.

“자, 이거 봐.”

도화는 그 페이지를 눌러 묵범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최고의 강사진,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운전 연수를 해 드립니다! 라고 붉게 강조된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말에 신청하면-.”

“주말 할증 요금이 붙겠지요.”

“할증……?”

할증이란 말에 도화가 인상을 쓰며 휴대폰을 도로 가져갔다.

할증. 도화가 굉장히 싫어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돈을 더 써야 한다는 건 도화에겐 쓸데없이 피를 흘리고 다니는 것과 동급이었다.

“…….”

그렇게 할증이란 단어를 끝으로 대화는 단절되었다. 묵범은 도화의 입에서 한동안은 차를 뽑는다거나 운전 연수를 받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외모만 보면 무심해 보이는데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 생각보다 다혈질이라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묵범은 자신이 참 재미있는 파트너를 잡아챘다고 속으로 즐거워했다. 그는 도화가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는 무심하게 대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찌 보면 도화가 아닌 묵범이 타인에게 무심한 것처럼 보였다.

“운전 연수를 신청할 시간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이야?”

한참을 조용히 있던 도화가 묵범에게 물었다. 아까는 욱해서 운전 연수 학원을 찾느라 지나쳤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시간이 없다는 말이 거슬렸다. 마치 운전 연습할 시간 따윈 없을 정도로 바쁠 것이란 안 좋은 의미로 들렸다.

“요즘 성수기를 피해서 여름휴가를 가는 게 유행이라더군요.”

“?”

묵범은 뜬금없이 여름휴가 이야기를 꺼냈다. 추혼부 차사들의 여름휴가는 이미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름휴가라니. 설마, 신입인 나도 늦게나마 휴가를 주려고 하나? 도화는 미약하게나마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이어진 묵범의 설명에 미약한 기대는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름휴가 성수기 때는 차사들이 당번을 정해서 수귀水鬼가 자주 출몰하는 곳을 감시합니다.”

“그런데?”

“성수기가 끝나서 수귀 당번도 이주 전에 끝이 났는데, 이상하게 저번 주부터 특정 위치에서 익사 사고가 줄줄이 터지는 바람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거기가 어딘데.”

“강원도 홍천입니다.”

순간, 도화는 출근 전. TV에서 보았던 뉴스가 떠올랐다. 늦은 휴가, 물놀이 사고. 그리고 홍천까지. 지금 묵범이 하는 이야기와 맞아떨어졌다.

“늦장마인데 강가에 놀러 가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물이 불어났다고 사람들이 더 몰리나 봅니다.”

늦장마까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다시 당번을 서면 되잖아.”

“당번을 설 차사를 차출할 부서가 없습니다. 다들 자기 일을 미루고 당번을 서는지라 두 번 했다간 차사국 업무가 마비되거든요.”

“그러면 그 당번이란 일을 내가 해야 해서 운전 연수를 받을 시간도 없다고 한 건가?”

“우리 둘이 가는 거죠.”

“으…….”

‘우리’라는 말에 도화가 질색했다. 하지만, 저승차사로서 첫 임무를 맡는다는 생각에 살짝 설레기도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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