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회식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중간중간, 차사 몇 명이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야간 근무를 하러 자리를 뜨면서 인원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추혼부 연봉이 다른 부서보다 높은 이유가 시도 때도 없는 야근 때문인가?”
도화의 혼잣말을 들은 유 차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추혼부는 원래 야근이 없어요.”
“방금 야근하러 나간 거 아닙니까…?”
도화는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20분. 너무나도 명백한 야근이었다.
“저건 야근이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제출한 차사들한테만 정보부가 연락을 하는 거랍니다. 홍 차사도 야근 수당이 필요하면 차사국 홈페이지에서 신청하세요. 야근 수당이 무척 세답니다. 특히 주말이나 연휴가 겹치면 아주 짭짤해요.”
야근 수당 때문이구나. 그제야 도화는 안 해도 되는 야근을 자청해서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채용 계약서에도 저런 내용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추가 근무를 본인이 선택해서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신입 차사는 야근 금지입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묵범이 끼어들었다.
“아, 맞다. 홍 차사 수습 기간이 한 달이었지요? 홍 차사가 워낙 든든하게 느껴져서 수습 기간인 걸 잊고 있었네요.”
“야근 금지는 석 달, 그대로 갑니다.”
“왜?”
도화가 어이없단 표정으로 묵범을 쳐다보며 물었다. 수습 기간을 한 달로 줄였으면 당연히 야근 금지도 한 달로 끝이 나야 하는 거 아닌가?
도화의 이해 못 하겠다는 눈빛에 묵범은 손으로 본인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한 달간은 완전히 금지. 나머지 두 달은 저와 함께 야근하는 조건이라면 가능합니다.”
“내 야근인데 왜 네가 껴?”
“그야 밤이 깊어질수록 악귀의 힘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아까 야근하러 나간 차사들은 야래夜來 악귀 나포에 숙달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차사들이기도 하지요.”
유 차사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설명했다.
“추혼부 야간 수당이 다른 부서보다 훨씬 높은 이유는 생명 수당이 합산되어 있기 때문이랍니다.”
“생명 수당…….”
“추혼부 가이드 책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읽어 보셨지요?”
“당연히 읽고 다 외웠지.”
그럼에도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은 살면서 생명 수당을 받아 볼 일이 생길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깨비한테 살해당하면 당했지, 제 목숨에 값이 매겨지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디서 비명횡사하는 것보다는 목숨값이라도 받고 죽는 게 낫긴 하겠지.’
전처럼 혼자 사는 거라면 모를까. 담마를 책임지게 된 이상, 죽어서도 돈이 나오는 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참에 생명 보험이라도 들어 둘까.
돈과 관련된 이야기에 도화는 두 눈을 반짝이며 본인이 죽어도 최대한 돈을 땡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현천이 봤다면 전보다 더 돈에 미친 또라이가 되었다고 혀를 찼을 것이다.
“슬슬 자정이 되어 가는군요. 내일 출근을 위해서 이만 집에 가는 게 좋겠습니다.”
묵범의 말에 정신을 차린 도화는 어느새 교자상에 둘러앉은 차사가 몇 남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분명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고기와 술, 그리고 다양한 반찬이 끊임없이 나왔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풀떼기만 조금 남고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차사들이란… 원래 이렇게 식성이 좋은 건가?
도화는 본인 그릇에 수북하게 쌓인 고기를 보고 난감해했다. 추혼부 차사들이 신입에게 잘 부탁하고 힘내라며 한 점씩 앞 접시에 올려 준 고기들이었다.
육식보단 채식을 즐기는 도화지만, 그렇다고 고기를 아예 안 먹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사들이 준 고기는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도 저를 신경 써서 준 것이니 열심히 먹긴 했는데…. 결국 포기하고 젓가락을 놓고 말았다.
‘어디 담아 갈 만한 게 없나?’
나무 열매도 없어서 굶고 지냈던 옛날이 떠오르자 남은 고기가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정 안 되면 연잎에 싸 가야지, 하는데 마침 산월이 청운각에 올라왔다.
“어머. 한 분씩 먼저 가시는 건 봤는데 세 분만 남으셨네요?”
그녀는 초토화가 된 교자상을 보고 환히 웃었다. 차린 음식이 거의 바닥을 보인 게 흐뭇한 듯했다. 하지만, 흐뭇한 미소는 도화의 그릇을 보고 스르륵 사라졌다.
“저번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으셨던데……. 홍 차사님은 저희 산월관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나 봅니다. ”
시무룩한 산월을 본 도화는 난감했다. 음식은 모두 맛있었으나 너무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태어나 처음으로 과하게 쏟아지는 관심 때문에 도통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아닙니다. 태어나 맛본 음식 중, 제일 맛있었습니다. 워낙 푸짐히 차려 주시어 다 먹지 못한 것이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도화의 해명에도 산월은 서운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도화는 산월에게 직접 남은 음식을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이리 남기고 가기 너무 아까운 음식이라고 극찬까지 했다.
그제야 산월은 기분이 풀어졌는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보내 드린 음식도 벌써 동이 났습니다.”
아직 조금 남긴 했지만, 산월의 기분을 확실하게 풀어 주기 위해 살짝 거짓을 섞어 말하자 환히 웃는 산월이었다.
“계산은 이 카드로 하곘습니다.”
묵범이 강림 도령의 카드를 산월에게 건넸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국장님 카드네요.”
카드를 받은 그녀는 음식 포장을 준비하겠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청운각을 내려갔다. 도화와 묵범, 그리고 유 차사도 집에 가기 위해 계단을 밟았다.
앞에는 유 차사가, 뒤에는 묵범이 흔들림 없이 편안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도화는 자꾸만 휘청거렸다. 회식 때 모인 차사 중 가장 적은 양의 술을 마신 도화였다.
‘내가 술이 이렇게 약했던가?’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일어나 움직이니 갑자기 바닥이 꿀렁- 움직이는 느낌에 당황했다. 누각에 있을 땐 몰랐는데 유난히 긴 계단이라서 그런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시야가 춤을 췄다.
처음 청운각을 오를 때는 연꽃 향이 정신을 흐트러트렸는데. 오늘은 얼마 마시지도 않은 술이 흔들어 대니 난감했다.
‘정신 차려. 꼴사납게 굴러떨어지지 않으려면.’
도화는 다리와 발에 힘을 주고 걸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지러운 상태로 계단을 오르는 것도 아니고 내려가는 것은 무척 고된 행동이었다. 계단에 난간이라도 있으면 붙잡고 내려갈 텐데. 청운각은 계단이 가파른데도 난간이 없었다.
‘어…?’
결국, 도화는 얼마 내려가지 못하고, 발목이 푹 꺾였다. 균형을 잃은 몸이 옆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순식간에 연지를 가득 채운 연꽃이 도화에게 달려드는 착각이 들었다.
이대로 물에 빠진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도화의 몸이 뒤로 쑥 끌려갔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무엇이 자신을 끌어당겼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그저 추락한다는 생각에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고막을 쿵쿵 울릴 뿐이었다.
“당신이 술을 싫어한다고 강림 도령이 꽤 낙담한 것 같더니만. 왜 술을 마시지 않는지 알 것 같군요.”
“……?”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 눈을 뜨니 묵범이었다. 그제야 도화는 숨쉬기 답답할 정도로 허리와 배가 꽈악 조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범인은 묵범의 팔이었다.
도화의 체중이 보통 묵직한 게 아닐 텐데. 묵범은 아주 여유롭게, 미소까지 지으며 도화의 체중을 버티고 있었다.
“이거 놔.”
“또 휘청거리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방금은 가까워서 구했지만, 지금 놓으면 멀리 도망갈 거 아닙니까.”
“당연한 거 아냐?”
도화가 눈을 치켜뜨고 대꾸했다. 밑에서 그런 둘을 지켜보고 있던 유 차사가 흠흠, 목청을 가다듬는 소리를 내며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음을 알렸다.
그제야 도화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묵범의 팔을 잡아 뜯었다. 후다닥 그의 품에서 벗어난 도화는 묵범에게서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고 바삐 다리를 움직였다. 도화가 다시 휘청거리며 기우뚱 중심을 잃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젠장…!’
묵범의 예상대로였다. 밑에서 유 차사의 놀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유 차사는 허리춤에 묶어 둔 부용삭을 풀어 계단을 구르기 시작한 도화를 묶으려고 했다. 시전자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부용삭이니 누각 기둥에 묶어 고정하면 더 큰 사고는 막을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묵범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크게 다칠 게 분명했으나 유 차사는 묵범의 명령대로 꺼냈던 부용삭을 거둬들였다.
“윽…!”
도화는 계단에 닿는 면적을 최대한 줄이려고 몸을 움츠렸다. 최소한 계단 모서리에 머리를 박는 일은 없어야 했다. 자연 치유 속도가 인간보다는 훨씬 빠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너 번 굴렀을까. 윽, 윽!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다음 충격을 기다리던 도화의 몸에 단단한 것이 감겼다.
‘?’
계단도 단단했지만, 이건 그런 단단함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단단했다. 잘 단련된 사람의 근육 같은 느낌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씻으며 만지는 도화 본인의 가슴 근육보다 좀 더 단단했다.
‘사람? 설마 또……?’
몸이 허공으로 들리는 느낌에 놀라 눈을 뜨니 설마, 또, 역시나 묵범이었다. 아까는 팔로 허리를 끌어안았다면 이번에는 그보다 더 부끄러운 자세가 되어 버렸다.
“이거 놔.”
“이번에는 안 됩니다.”
“차라리 부축을 해.”
“싫습니다. 부축하고 걷다가 저도 같이 넘어지면 안 되니까요.”
저기 사람이 보잖아……!
도화가 묵범의 귀에 작게 외쳤다. 묵범에게 옆으로 안겨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밑에서 유 차사가 다 보고 있었다.
“아, 그래서 얼굴이 붉어졌군요. 괜찮습니다. 유 차사는 어디 가서 쓸데없는 말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입이 많이 무겁습니다.”
묵범은 일부러 유 차사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유 차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청운각에서 멀어졌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묵범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도화를 안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어찌나 천천히 걷던지 도화가 빨리 좀 걸으라고 짜증을 낼 정도였다.
“계단을 함부로 내려가다간 구를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 줬으면서 제게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하다니. 보기보다 매정한 사람이군요.”
“매정?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언제까지 날 안고 있을 건데?”
“음… 이대로 집까지 갈까요?”
“미쳤어?”
도화가 질색하며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묵범은 도화의 몸부림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계단을 한 칸씩 내려왔다. 딱히 도화의 몸부림을 제지하지도 않았는데 약간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도화가 먼저 지쳐 축 늘어질 정도였다.
‘마냥 말랑한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하고…….’
힘이 쭉 빠진 도화의 몸이 굉장히 무거울 만도 하건만. 묵범은 가볍게 그를 고쳐 안으며 양손에 가득 느껴지는 도화의 근육을 감상했다. 옷 위로 만져지는데도 탄력이 끝내 줬다. 생각 없이 만지작거리기 딱 좋은 촉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