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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39화 (40/146)

39화

항상 조용했던 산월관은 추혼부 차사들의 회식으로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다. 청운각에 모인 차사들은 국장인 강림 도령의 카드를 가진 묵범이 도착하자 열흘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메뉴판을 마구 뒤적거렸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달라는 주문부터 시작해서 가장 비싼 고기와 술을 외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 강림 도령이 있었다면 먹을 만큼만 시키라고 엄포를 놓았을 테지만, 다행히도 이곳엔 강림 도령의 카드만 있기에 가능한 주문이었다.

회식 예약을 해 둔 덕분에 엄청난 주문 양에도 음식은 빠르게 차려졌다. 말이 안 될 정도로 빠른 상차림에 도화는 혀를 내둘렀다. 어쩌면 이런 회식이 자주 있어서 숙달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자, 추혼부 신입의 승승장구를 위하여!”

“위하여!”

사방에서 쨍! 하고 잔 부딪치는 소리가 청운각에 울렸다. 맥주잔이나 소주잔이 부딪치는 소리와는 다른 맑은소리였다. 추혼부 차사들의 손에 들린 술잔은 투명한 유리잔이 아니라 뽀얀 도자기 잔이었다.

얼떨결에 같이 짠을 한 도화는 술잔을 입이 아닌 교자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걸 지켜보고 있던 이 차사가 혀를 쯧 차더니 주먹으로 상을 쿵쿵 치며 외쳤다.

“원샷해! 원샷해!”

“…….”

차사국 시스템이 인간의 회사와 다를 게 없다지만, 이런 회식 문화까지 같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도화는 이 차사의 입을 바늘로 꼬매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하지만, 다른 차사들이 이 차사를 따라서 원샷을 외치자 도화의 얼굴에 점점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묵범이 도화의 술잔을 제 앞으로 끌어 왔다.

“마시기 싫으면 안 마셔도 됩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도화는 자꾸만 튀어나오는 반말을 간신히 존댓말로 바꾸며 물었다. 안 그래도 싫어도 마셔야 하는 분위기가 매우 거북스러웠는데. 묵범의 행동은 가뭄에 단비 같았다.

“우~ 수석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신입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인데 신입한테 준 술을 왜 수석님이 마십니까?”

눈치라고는 개코딱지만큼도 없는 이 차사가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어서 원샷 하라고 도화를 부추겼다. 묵범은 그런 이 차사의 강요를 무시하고 도화의 술을 단번에 마셔 버렸다.

묵범의 미간이 독한 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술에 약한 것은 아니지만, 단것을 환장하게 좋아하는 그에게 이런 독주는 절대 자의로 먹지 않을 술이었다.

탁! 소리 나게 빈 술잔을 상 위에 올린 묵범은 꿀에 절인 알밤 한 접시를 순식간에 비웠다. 쓴맛을 단맛으로 어느 정도 중화한 그는 쉬지 않고 독주를 제조하고 있는 이 차사를 상냥하게 불렀다.

“이 차사님.”

“예…?”

묵범의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지은 죄가 있는 이 차사는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요즘은 인간들도 회식이나 음주를 강요하지 않는 추세라 하더군요.”

“그, 그렇습니까?”

“꼰대들이나 그런 짓을 한다고 하니 잊지 말고 잘 기억해 두시지요.”

“꼬… 꼰대…….”

삽시간에 꼰대가 되어 버린 이 차사는 도화에게 주려던 다른 술잔을 슬며시 옆으로 밀어 놓았다. 첫 잔을 마시지 않은 괘씸죄로 여러 술을 섞어 독하게 만든 술이었다.

“뭐야, 이 차사가 또 폭탄주를 만들었어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유 차사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었다. 일 때문에 통화하고 와 봤더니 제 버릇 개 못 주고 신입한테 꼰대 짓을 하고 있었다.

“아니, 유 차사까지 꼰대라고 그러기야? 내가 어딜 봐서? 여기서 나보다 더 신입 챙겨 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 차사는 억울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치며 말했다. 도화는 저 주먹이 방금까지 원샷을 외치며 상을 쳤던 주먹임을 잊지 않았다. 저 사람은 되도록 가까이하지 말자. 담마에게도 주의를 줘야 할 것 같다.

“이 차사님. 꼰대 보존법칙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꿀에 절인 알밤을 두 접시나 더 비운 묵범이 이 차사에게 물었다. 이 차사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꼰대… 보존법칙이요?”

“어떤 집단이든 반드시 꼰대 하나는 있다는 법칙입니다. 만약, 본인 집단에는 꼰대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설마.”

이 차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주위에 앉아 있는 다른 차사들의 반응을 살폈다.

“설마…?”

설마, 아니지? 하는 눈빛에 유 차사가 한숨을 푹 쉬며 이 차사의 등을 퍽 쳤다.

“스스로 꼰대 같단 생각 해 본 적 없어?”

“나라고?”

“그럼 너밖에 더 있냐? 억지로 신입한테 술 먹이고 있잖아.”

유 차사의 말에 이 차사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도화를 쳐다봤다. 말은 없었지만, 정말로 싫었냐고 묻는 듯했다. 괜찮았다고 좋게 말할 순 있었지만, 그랬다간 잠시 하락한 꼰대력이 상승해서 ‘거봐. 신입도 좋았다잖아!’라고 외치며 다시 폭탄주를 권할 것 같기에 매정하게 대답했다.

“술 강요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랬구나…….”

풀이 죽어 축 늘어진 어깨를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앞으로 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요할 일은 없어 보였다.

이 차사 때문에 살짝 굳어진 분위기는 새로운 소고기가 공급되면서 다시 화기애애하게 풀어졌다.

“담마는 집에 갔습니까?”

묵범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한 차례 담마에 대해 설명한 덕분에 추혼부 차사들의 호기심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지만, 그래도 담마 이야기가 나오면 무슨 이야기냐고 끼어들 게 뻔해서 작게 속삭인 것이다.

“현천과 함께 보냈어.”

“현천? 아… 그 검 말입니까?”

묵범은 자유자재로 길이를 바꾸는 도화의 검을 떠올렸다.

“현천이 다른 사람과도 대화가 가능했던 겁니까?”

“못 할 건 없지.”

“언제 한번 제게도 소개해 주시죠.”

“내가 왜?”

“왜긴요. 한 지붕 아래에 함께 사는 가족 아닙니까?”

“가조옥?”

미묘하게 욕처럼 들려서 묵범의 한쪽 눈썹이 휙 올라갔다. 사실 대놓고 욕을 할 순 없어서 조옥에 힘을 준 것이었다.

“한 번만 더 가족 타령하면 당장 그 집에서 나갈 줄 알아.”

강림 도령이 연봉을 통 크게 올려 줬으니 못 할 것도 없다. 도화가 강하게 나가자 묵범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물렀다. 살짝 흥분해서 목소리가 좀 세게 나왔지만, 다행히도 다들 먹고 마시는 데에 집중하느라 도화의 반말을 들은 이는 없었다.

묵범이 조용해지자 도화는 술 대신 물을, 고기 대신 나물 반찬을 먹으며 왁자지껄한 차사들을 구경했다.

저승차사들의 회식이라기에 좀 특별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특별은커녕 인간들의 회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료한 시선으로 누각 아래 일렁이는 연지를 구경하던 도화는 문득 이 자리에 없는 ‘부장’이 떠올랐다.

추혼부 차사들과 수석인 묵범, 그리고 신입인 본인까지 다 모였는데 정작 추혼부 책임자인 부장이란 사람은 없으니 궁금했다.

“그런데 진짜 부장이란 사람은 안 오는 거냐…요?”

이번에도 어색한 존댓말에 묵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되지도 않는 존대는 그만해도 됩니다.”

“보는 눈이 많은데…….”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당신은 제가 데려온걸요.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묵범이 차사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추혼부 차사들은 상관없다며 손을 흔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화는 이런 분위기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른 부서는 위계질서가 철저하다고 들었는데, 추혼부는 위계질서의 ㅇ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화는 추혼부에서도 묵범에게 반말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차사들이 묵범과 도화가 무척 친하게 지낸다는 오해를 했다는 점이었다. 말을 놓는다고 반드시 친한 건 아닐 텐데. 차사들은 제멋대로 편한 대로 생각했다.

‘친하지 않다고 해명하는 것도 너무 우습잖아.’

묵범이 일방적으로 도화에게 치대는 상황이었지만, 그걸 해명하자니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어찌해야 저 자식과 사이가 별로라는 것을 티 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이, 도화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 차사가 묵범에게 물었다.

“수석님. 우리 추혼부에 신입이 들어왔다는 거, 부장님은 모르시죠?”

“그럴 겁니다.”

“이번엔 북쪽으로 가셨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정확하게 어디로 가신 거랍니까? 설마 비무장지대라도 가신 건가?”

묵범과 도화를 중심으로 근처에 있던 차사들의 화젯거리는 부장과 비무장지대로 이어졌다.

“비무장지대도 전파가 터지긴 할걸요?”

“터지긴 해도 잘은 안 터진다고 들었는데.”

“부장님이니까 아주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나 보죠. 아니면 북으로 넘어갔던가.”

북쪽? 비무장지대?

도화는 차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부장이나 되는 사람이니 평차사들이 잡지 못하는 엄청난 악귀를 잡으러 비무장지대까지 간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번에는 뭘 잡으러 가신 거랍니까?”

박 차사가 묵범에게 질문했다. 역시. 굉장한 놈을 잡으러 간 게 맞구나. 도화는 점점 부장 차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스승의 죽음에 정체 모를 저승차사가 깊게 관련되었기에 차사를 원수 보듯 하는 도화였지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대화에 도화는 자신이 굉장히 큰 오해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고라니.”

“고라니요?!”

순간, 도화는 자신이 소리 내어 말한 줄 알고 흠칫했다. 다행히 방금 나온 반문은 고라니라는 말에 도화처럼 어이없어하는 차사들의 목소리였다.

“뜬금없이 고라니를 왜…….”

“고작 고라니를 잡으러 비무장지대까지 가셨단 말입니까?”

“그러게. 고라니는 우리 집 뒷산에도 있는데. 밤마다 어찌나 비명을 질러 대던지. 그래서 내가 밤 근무만 하고 있잖아.”

“거참. 죽이지도 못하고 난감하겠네.”

차사들은 모두 이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하는 걸까.

도화는 부장이란 사람이 왜 비무장지대까지 가서 고라니를 잡는 건지가 궁금했는데, 대화는 순식간에 옆길로 빠져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묵범이 도화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그냥 고라니가 아닙니다.”

“그러면?”

“영물 고라니입니다.”

“영물?”

유해조수와 영물 고라니.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렇게 느낀 게 도화만은 아니었는지 다들 머리 위로 물음표가 한가득한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한반도에 고라니가 비정상적으로 많긴 하지만… 영물이 될 정도로 뛰어난 동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든 오래 살면 영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저기 날아다니는 각다귀도 한 오백 년 죽지 않고 산다면 지능이 아주 조금은 생기겠지요.”

묵범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정말로 각다귀 한 마리가 흐느적거리며 날고 있었다.

청운각 아래, 연지 속에 있는 잉어라면 모를까. 하필 각다귀를 예로 드는 묵범 때문에 술을 마시다 사레 걸리는 차사가 여럿 생겼다.

그때였다. 묵범이 가리킨 곳에서 짝! 하고 매섭게 마찰하는 손뼉 소리가 났다.

“산월관도 구충 방제 업체 좀 불러야겠어요. 각다귀라니. 이러다 모기도 나오고 파리도 나오겠네.”

“그러게 말이야. 아무리 자연경관이 아름다워도 음식 장사를 하는 곳에서 벌레라니.”

어쩌면 묵범의 예시대로 영물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각다귀는 그렇게 차사의 손에 죽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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