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호골로 돌아가.”
“싫어요.”
“…왜?”
벌써 몇 번째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인지 모르겠다. 강림 도령은 자신이 하는 모든 말에 싫다, 아니다로 일관하는 담마에게 점점 부아가 치미는 중이기도 했다.
“네 어미, 다온이 여우 중 몇 안 되는 순혈인 건 알고 있나?”
“압니다.”
“그러면 네 아비가 인간이라 해도 인간 특성은 거의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호골로 가지 않겠다는 거지? 너 정도라면 순혈만큼은 아니어도 꽤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을 텐데?”
“…….”
계속해서 같은 질문이 이어지다 싫다, 아니다로 일관하던 대답마저 끊어졌다. 입술을 꼭 깨문 것이 도화와 비슷해 보였다. 생긴 것은 전혀 다른데 냉랭한 분위기며 하는 행동 때문에 그런 듯했다.
‘부모 때문에 호골로 가지 않으려는 것 같은데…. 하계에 이런 녀석이 돌아다니면 분명 골치 아픈 일이 생길 터. 하나라도 업무를 줄이기 위해선 이 녀석을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야 해.’
안 그래도 전보다 점점 수가 늘어나는 원귀와 악귀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다. 거기다 괜한 업무를 더 늘릴 필요는 없었다. 방지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옳다고 판단한 강림 도령은 인간과 여우의 혼혈이면서 원귀의 흔적을 잔뜩 달고 있는 눈앞의 꼬마를 어서 호골로 보내 버리고 싶었다. 지금 당장 뭔가 일을 터트리진 않더라도 치울 수 있을 때 치우자는 생각이었다.
강림 도령은 담마가 먼저 호골로 가겠다는 대답을 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이쪽에서 고민할 만한 내용을 몇 개 던지고 반응을 보는 쪽으로 대화 스타일을 바꿔 보기로 했다.
“인간이 하는 쓸데없는 짓 중 하나가 뭔지 아나?”
“…뭔데요?”
그는 우선 담마가 흥미를 가질 만한 주제를 슬쩍 던졌다. 물론 완전히 생뚱맞은 주제는 아니다.
사실 강림 도령은 담마가 왜 호골로 돌아가지 않는지에 대에선 얼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담마의 입으로 그 대답을 들으려는 이유는, 홍도화와 관련지어 대화를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태교다.”
“태교?”
담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잘은 몰라도 태교는 인간과 귀물은 물론이고 선계의 선인들도 굉장히 신경 쓰는 부분 아닌가? 담마는 자신의 지식에 문제가 있나 싶어 강림 도령의 설명을 기다렸다.
“너, 네 어미의 배 속에서 모든 걸 다 들었지?”
“그랬죠.”
듣기만 했나? 모체인 다온이 느끼는 감정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싫어도 말이다.
“그게 태교의 이유이다.”
“그게 왜 인간에겐 쓸데없는 짓이라는 거죠?”
“태교도 뱃속의 태아가 듣고 이해해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인간의 태아는 99.9% 그럴 일이 없어.”
“아하.”
다온이 무심하게 맞장구를 쳤다. 뭔가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예상 범위 안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거죠?”
눈치 빠른 담마가 살짝 불편한 눈빛으로 강림 도령을 쳐다봤다.
“그 정도로 귀물과 인간의 차이는 크다는 거다. 태생부터 다른데 제대로 된 교육 없이 인간 틈바구니에서 네가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겠냐?”
“…….”
불편했던 담마의 눈빛이 점점 불쾌함으로 변했다. 담마는 지금, 눈앞의 술주정뱅이가 자신을 차사국으로 불러들인 목적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교육이라더니…. 당신이 교육을 해 준다는 게 아니라, 날 호골로 보낼 생각이었군요.”
“인간은 인간이, 여우는 여우가 교육하는 게 도리 아니겠나?”
“태어나기 전부터 알아야 할 것은 다 인지하고 태어났습니다. 여우의 교육 따위 받지 않아도 돼요.”
“여우의 교육 따위라. 호골에 가 보지도 않는 녀석이 어찌 그리 잘 알지? 홍도화가 네게 그리 말하라고 시키더냐?”
“삼촌은 절대 그런 거 안 시켜요.”
강림 도령의 언행에 불쾌함을 드러내도 큰 동요는 보이지 않던 담마가 도화를 안 좋게 말하자 발끈했다. 마치 부모 욕을 들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강림 도령이 담마를 국장실로 데려오라 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알에서 갓 태어난 새라면 모를까. 태내에서 완전한 자아를 갖춘 채 나온 여우가 어찌 반도깨비를 어미처럼 여기는 걸까.’
호골로 보내는 데 실패하더라도 이건 꼭 알고 싶었다. 홍도화, 대체 무슨 수로 이 새끼 여우를 구워삶은 거지?
“홍도화를 아주 잘 아는 것 같네? 함께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는 담마의 심기를 살살 긁기 시작했다. 아무리 침착하다 한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어린아이다. 예민한 부분을 살짝 건들면 알아서 술술 불 터였다. 그리고 강림 도령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당신이야말로 삼촌을 언제부터 봤다고 나쁘게 말하는 거죠?”
“언제부터긴. 네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봤지.”
“…지켜보기만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짧더라도 함께 지낸 자신이 당신보다 더 잘 안다는 의미였다. 강림 도령은 역시 어리다며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냈다간 기껏 제 갈고리에 걸려든 담마가 빠져나갈 것을 알기에 표정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긴. 지켜보기만 해선 알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해.”
“알면 됐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이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해요? 무슨 짓을 해도 난 호골로 가지 않아요.”
담마의 단호한 선언에 강림 도령은 아니라고 술잔을 흔들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잔 속의 뽀얀 액체가 흐를 것처럼 위태롭게 찰랑거렸다. 담마는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강림 도령의 술잔에서 시선을 떼며 속으로 다짐했다. 저 술귀신의 계략에 절대 넘어가지 않겠노라고.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는 넘어갔음을 담마는 모르고 있었다.
“새끼 여우야.”
“담마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 새끼 여우 담마야. 네 삼촌이 차사국 내에서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느냐?”
“알아요.”
“저승차사를 피해도 모자랄 판에 차사가 득시글거리는 곳으로 취직을 해 버렸으니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고난 길이란 것도 알겠구나.”
안 되는데……. 담마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아이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웠다. 내리뜬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네 삼촌이 걱정되지?”
“…….”
대답은 없어도 꽉 깨문 입술이 대답을 대신했다.
“홍도화의 평탄한 차사 생활을 위해서 네 도움이 좀 필요한데.”
강림 도령이 슬쩍 ‘도움’이란 말을 흘리자 담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제가 뭘 해야 삼촌을 도울 수 있는데요?”
“네가 네 어미가 아닌 홍도화 옆에 지내는 이유를 알려 주는 게 돕는 거다.”
“……?”
그런 게 삼촌한테 도움이 된다고? 담마는 강림 도령의 말에 집중하느라 앞으로 기울어졌던 상체를 똑바로 세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촌의 순탄한 직장 생활과 자신이 삼촌 옆에 붙어 있는 이유의 상관관계가 보이지 않았다.
“평판이란 게 있잖냐. 평판.”
“평판?”
“그래. 허구한 날 차사 공무 집행 방해만 하던 네 삼촌이 사실은 오갈 데 없는 널 돌봐 주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나락 간 평판이 조금은 회복될 수 있겠지. 안 그러냐?”
“아…….”
그렇구나. 담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강림 도령의 말에 수긍했다. 자신이 원귀로 변해 생물학적 아비인 이선후에게 달라붙었을 때가 떠올랐다. 저승차사가 자신을 부용삭으로 묶어 잡아가려던 걸 삼촌이 막았었지. 막았다 뿐인가? 복수에 눈이 멀어 혼미해진 정신을 깨워 주기까지 했다.
“네가 홍도화에 대해 조금만 이야기를 해 준다면 호골에 연락하는 건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마.”
“…다시 생각해 본다는 건 할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보호자 없이 하계에 돌아다니는 어린 귀물은 신고해야 하는 게 어른으로서 할 일이지.”
“딱히 어른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그냥 무시하시죠.”
“어허. 내가 생긴 건 이래도 너보다 밥을 몇 끼나 더 먹었는데? 세지도 못할 만큼 까마득하다고.”
담마의 비아냥에 속에서 열이 오른 강림 도령이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아예 술을 병째 들고 마셔 대는 모습을 보니 외모에 큰 열등감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쪽 사정도 좀 이해해 줘야 해. 너를 호골로 인도하지 않으면 당장 민원이 들어올 거다.”
“괜찮아요. 엄마는 제가 죽었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 정도는 알고 있지. 하지만, 나중에라도 사실이 밝혀지면 곤란해.”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절 호골로 보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허어. 이거 누굴 닮아서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을까.
다온과 이선후. 둘 다 이름만 알 뿐, 제대로 말을 나누어 본 적은 없으나 다온이 몸도 마음도 망가진 최악의 상황에서 제대로 된 태교를 했을 리 만무하니 어쩌면 다온의 영향일 수도 있다. 아니, 다온을 그리 만든 이선후가 더 큰 원인일지도.
“꿈도 꾸지 말라니. 이쪽은 자라나는 새싹을 좋은 환경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신경 써 주는 건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
“신경 끄신다면 제가 왜 호골이 아닌 삼촌한테 갔는지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흠…….”
고작 그거 듣자고 미래의 후환을 내버려 둘 순 없는데. 고민하는 강림 도령이었지만, 궁금한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 묵범에게 홍도화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여러 번 물어봤으나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던 그로서는 담마의 제안이 솔깃했다.
그래도 이성이 정상 작동을 하려고 했으나, 이어진 담마의 말에 강림은 결국 홀랑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교육이라는 거 꼭 호골에서 받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국장님이 절 교육해 준다고 부른 거 아닌가요? 어른이 애들 속이고 거짓말해도 돼요?”
“좋아. 내가 널 직접 교육하면 거짓말이 아닌 게 되니까 상관없지?”
“네.”
“좋아. 대신 네 삼촌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네가 아는 걸 다 말해야 할 거다.”
강림 도령의 말에 담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홍도화와 그리 오랜 시간 지낸 것은 아니지만, 묵범보다, 앞의 주정뱅이 국장보다 훨씬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개인 정보나 약점 같은 건 알지도 못하지만, 알더라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함께 지내며 느낀 점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였어요.”
담마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부터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를 꾀어내 도박할 돈을 뜯을 생각으로 접근한 이선후였다. 하지만, 다온의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움에 사기꾼의 마음이 진심이 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온 역시 난생처음 만난 인간 남자가 얼굴도 꽤 준수한 데다 성격도 좋고 제게 잘해 주기만 하니 몸도 마음도 홀랑 넘어가 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선후는 자신이 도박 중독자에 사기꾼인 것을 숨겼고, 다온은 인간이 아닌 여우족임을 숨겼다. 사랑은 했으나 상대를 속이고 있음을 인지한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다온의 정체가 드러나고 이선후의 도박으로 인해 생활이 엉망이 되고 나서야 둘의 사이는 완전히 파탄 났다. 태어나 처음으로 불행을 경험한 다온의 원망이 뱃속의 담마에게 향한 것은 누구든 예상할 수 있는 범위였다.
너만 없었으면 다시 호골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여우에게 홀렸다고 난리를 치는 이선후에게 시달리는 다온도 불쌍했지만,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미의 원망을 듣고 자라난 담마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