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묵범과 함께 차사국 복도를 걷던 박 차사가 입을 달싹거렸다. 아까부터 묵범이 명치 아래를 손으로 살살 문지르는 게 신경 쓰여서였다.
뭘 잘못 드셨나? 술병이라도 난 건가? 오늘 회식 있는데 설마 참석 못 하시는 건 아니겠지? 수석님이 계셔야 분위기가 사는데.
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던 박 차사가 용기를 내어 묵범에게 물었다.
“저… 수석님. 속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약이라도 사 올까요?”
“아, 이거요?”
묵범은 그제야 자신이 명치 밑을 문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회식 있는데 속이 안 좋으시면…….”
“괜찮습니다. 어디 좀 잘못 부딪혀서 그런 거라, 금방 가라앉을 겁니다.”
부딪혀? 이 남자가?
박 차사는 묵범이 어딘가에 명치를 부딪히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항상 웃는 낯이지만, 저 남자가 얼마나 주도면밀한지 모르는 차사는 없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밤샘 잠복근무를 해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악귀를 때려잡던 모습이 생생한데. 잘못 부딪혔단 말이 묵범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그것도 명치 아래를 말이다.
추혼부에 도착한 묵범은 평소보다 많은 인원이 부서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새삼 국장 카드의 힘을 느꼈다. 외근이 잦은 추혼부의 특성상 출근 카드만 찍고 부서에 들르지 않은 채 바로 외근을 나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출근 체크 횟수에 비해 퇴근 체크 횟수가 현저하게 낮은 부서이기도 했다. 그 말인즉슨 퇴근을 못 하고 밤샘 근무를 했다는 의미였다.
듬성듬성 빈자리는 평소처럼 악귀를 때려잡으러 출근 체크만 하고 나간 차사들이었다.
“오늘 외근인 차사는 4시까지 산월관으로 모이면 됩니다.”
묵범은 명치 밑에서 올라오는 얼얼함을 무시하며 차사들에게 회식 공지를 전달했다. 박 차사 옆자리에 있는 유 차사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부장님은 안 오십니까?”
“부장님은 연락이 닿지 않아 참석 불가입니다.”
“아…. 오늘도 전파가 닿지 않는 곳에 계시나 보군요.”
다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묵범은 텅 빈 부장실을 쳐다봤다. 각 부서에는 최고 책임자인 부장이 존재한다. 추혼부에도 당연히 부장이 있다. 하지만, 추혼부 부장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부장실에 부장이 있는 경우는 1년 중 일주일이 채 안 될 정도다. 다른 부서는 신입이 들어오면 부장이 나서서 챙겨 준다는데. 추혼부는 부장이 아니라 국장이 나서니, 이보다 더 불편할 순 없었다.
“그러면 국장님도 오십니까?”
“안 오십니다.”
“워후~!”
국장도 안 온다는 말에 차사들은 휘파람까지 불며 환호했다. 이보다 더 신날 순 없다. 오늘 국장님 카드, 장사 지내 보자! 카드의 안녕을 고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아주 칼을 갈고 국장의 카드를 거덜 낼 준비를 했다.
국장이 이 광경을 봤다면 당장 카드를 회수했을 테지만, 지금 그는 홍도화와 담마와 면담하느라 바빠 추혼부에 올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 나비는 언제 온답니까?”
“그 유명한 도방 선생에게 물어볼 게 산더미인데.”
잔뜩 흥이 난 차사들의 관심사는 신입 차사 홍도화에게 옮겨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차사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소문이 자자한 ‘그’ 도방이다. 그런 자가 추혼부의 신입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돈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신입이 아예 출근조차 하지 않자 추혼부가 퍼트린 헛소문이라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신입 차사 홍도화의 출근 카드가 체크되었다는 소문이 차사국에 파다하게 퍼졌다. 추혼부 차사들의 어깨가 하늘까지 치솟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오늘 신입이랑 같이 온 꼬마도 있다고 들었는데. 대체 그 꼬마는 누굽니까?”
“꼬마? 아들인가? 딸?”
“여자아이라 하더라고. 딸인가 봐.”
“하지만, 도방에게 부인이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어. 여동생 아니야?”
“아서라. 나이 차이 씨게 나 보이던데 여동생은 무슨. 차라리 조카 쪽이 더 신빙성 있지 않겠어?”
“헐… 자네 뭐야. 실제로 본 거야?”
묵범이 가만히 내버려 두니 차사들은 추측성 대화를 끝없이 이어 갔다.
“그럼. 내가 누구야.”
“궁금한 건 못 참는 이 차사지. 국장님 술 창고에 무슨 술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다고 몰래 잠입하다 걸려서 6개월 감봉까지 받은 위인이잖나.”
“…….”
이 차사는 자신의 뼈아픈 과거를 줄줄 읊는 유 차사를 잠시 노려보았다. 하지만, 정말 봤냐고, 어땠냐는 질문이 쏟아지자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뒷모습만 봤는데 한… 8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였어. 요즘 유행이라는 개량 한복을 입었는데, 어찌나 색이 고운지 굉장히 비싸 보이더라고.”
“그 꼬마도 도깨비야?”
“도방도 반은 도깨비니까 꼬마도 도깨비지 않을까?”
“하지만, 꼬마가 도방과 혈연인지는 아직 모르는 거 아니야? 애초에 도방에게 가족이 있긴 해?”
묵범은 팔짱을 끼고 차사들의 수다를 조용히 경청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진진해서 어디까지 가나 궁금했다.
“입양했나?”
“미혼 젊은이가 입양이라…. 애초에 도방이 여자애를 입양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데?”
“흐음. 대체 뭘까. 궁금하네.”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면 되겠군요.”
“…네?”
갑자기 끼어든 묵범의 말에 차사들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한가득 띄우고 그를 쳐다봤다. 직접 물어보라니. 마치 지금 대화 속 주인공이 이 자리에 있다는 듯한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거기다 묵범은 차사들이 아닌 부서 출입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싶은 차사들도 묵범을 따라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도방이다!”
“진짜다!”
그곳에는 방금까지 나눈 이야기의 주인공, 홍도화가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워낙 시끄럽게 대화를 나눴던 탓에 홍도화가 부서 안으로 들어와 문까지 닫는데도 기척 하나 느끼지 못했다.
“홍도화 씨. 선배 차사들이 당신에 대해 궁금한 게 아주 많은가 봅니다.”
“차사 일이 남의 사생활을 캐는 것일 줄은 몰랐는데. 알았다면 계약서에 도장 찍지 않았을 겁니다.”
도화는 기분 나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도화의 말에 추혼 차사들이 뜨끔하여 도화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오해는 나중에 풀도록 하고. 추혼부에 귀한 신입 나비가 왔으니 자기소개 시간을 갖도록 하지요.”
‘나비……. 이 새끼가?’
도화가 묵범을 노려보았다. 빙긋이 눈웃음까지 치며 나비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입 닥치라고 한 소리 날리고 싶었으나 여기선 그럴 수 없었다.
이곳은 오늘부터 몸담을 직장이고, 묵범은 자신의 상사이다. 여기서 언제까지 차사 일을 할진 몰라도 최소한 1년은 버텨야 했다. 그래야 퇴직금을 챙길 수 있으니 말이다.
‘참자. 첫날부터 이미지 개판으로 찍히는 건 좋지 않아.’
저들이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는 아까의 대화를 들은바, 대충 각이 나왔다. 아주 나쁘게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호의적인 것도 아닌. 그저 흥미로운 가십거리 중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저들이 자신을 그리 여긴다 해서 자신도 똑같이 대할 순 없었다. 묵범의 말대로 이쪽은 신입. 위에서 까라면 까는 가장 말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나비로 불리는 것은 정말 싫었다.
“나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이를 악물고 말한 게 티가 난 걸까.
묵범의 눈이 더욱 가늘게 휘어졌다. 잘생긴 놈은 뭘 해도 잘생겼다더니. 도화는 그 말이 딱 묵범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저 휘어진 눈매는 나비라고 불리는 것이 질색인 도화가 재미있어서 웃는 것이지만, 눈웃음이 매력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는군요. 추혼부 여러분.”
묵범이 도화의 요구를 차사들에게 전달했다. 추혼부 차사들은 자신들의 잘못도 있고 하여 그러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묵범도 함께 끄덕이며 말했다.
“추혼부 차사들은 그러하겠다고 합니다. 저도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도록 하지요.”
‘추혼부 차사들은.’이란 조건이 붙었다. 그 말인즉슨, 다른 부서 차사들이 나비라고 부르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도화였지만, 거기까지 해결해 달라고 할 순 없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빠르게 통성명을 하고 일하러 나갑시다. 자세한 소개는 오늘 회식 때 하면 되니까요.”
묵범이 슬쩍 옆으로 자리를 비키며 말했다. 도화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묵범이 서 있던 자리로 갔다. 시선을 피하던 차사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도화를 쳐다봤다.
차사들의 시선이 모두 제게 쏠리자 도화의 굳은 얼굴이 더 딱딱해졌다. 태어난 이래, 여러 명에게서 이런 무해한 시선을 받아 본 적은 처음이다. 도화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안 그랬다가는 우습게 보일 것만 같았다.
“이름은 홍도화. 옆에 있는 수석님…의 추천으로 추혼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도화의 자기소개는 짧아도 너무 짧았다. 하지만, 이름 외에 딱히 더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니, 무얼 말해야 할지 몰랐다고 봐야 했다.
나이를 밝히면 더 어린애 취급하려나? 도깨비 혼혈인 건 다들 알 테고. 담마에 대해 어디까지 밝혀도 되는 걸까. 취미? 좋아하는 음식? 특별히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이런 것까지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묵범은 무얼 더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도화를 지켜보다 그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다들 외근하러 나가야 하니 신입 소개는 여기까지만 하죠. 자, 홍도화 씨. 저쪽부터 빠르게 소개할 테니까 이름 잘 외워요. 성만 외우면 될 테니 어려운 것은 없을 겁니다.”
묵범은 손가락으로 제일 오른쪽에 앉아 있는 차사를 가리켰다. 그러자 묵범에게 지목당한 차사가 얼굴이 잘 보이도록 고개를 들어 도화를 쳐다봤다. 다른 차사들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도화를 응시했다. 어서 자신을 지목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저쪽부터 김 차사, 박 차사, 이 차사, 유 차사, 우 차사, 강 차사입니다.”
“잘 부탁한다. 신입!”
“아까 그 꼬마는 여기 안 오나? 오면 주려고 과자도 사 놨는데 말이야.”
“그새 과자를 샀어? 그럴 정신으로 나가서 악귀나 더 잡아. 이번 달 인센 바닥이라고 징징거리지 말고.”
“허… 벌써 월말이네. 불쌍한 내 통장.”
“나가자. 돈 벌러.”
담마에 대해 묻는 질문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긴장했던 도화는 대화의 흐름이 순식간에 외근으로 이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담마의 정보를 이들에게 어디까지 알려도 될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 다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남읍시다.”
“생존! 생존!”
이건 대체 무슨 분위기지…?
매일 하는 외근 아닌가? 주고받는 인사가 어째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 같다.
생존을 외치던 차사들이 도화 앞으로 지나갔다. 그들은 한 명씩 도화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했다. 그렇게 차사들이 나가고, 마지막으로 유 차사가 도화 앞에 섰다.
“앞으로 잘 지내 봐요.”
사람 좋게 싱긋 웃은 그녀는 도화의 어깨를 치지 않고 악수를 청했다. 도화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빤히 쳐다보다 용기 내어 맞잡았다. 작지만 따뜻한 손의 감촉이 너무 생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