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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32화 (33/146)

32화

아직 노을도 지지 않은 이른 저녁. 묵범은 홍도화를 핑계로 퇴근했다. 다른 차사들이 비겁한 핑계라고 야유했지만, 묵범의 지갑에 국장의 카드가 들어 있는 것을 떠올리고는 금세 조용해졌다.

[귀령면도 가져오라고 해. 꼭.]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묵범은 국장의 명령을 떠올렸다. 귀령면이란 말에 두 눈이 번뜩이던 국장이었으니 그런 명령이 내려올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

‘현천검에 귀령면까지 가지고 있는 혼혈 도깨비라…. 무구부에서 알면 난리 나겠는데.’

현천검은 워낙 자아가 강한 검이니 괜히 잘못 만졌다가 탈이 날 수도 있다. 아마 무구부는 현천검보다는 직접 만질 수 있는 귀령면을 더 탐낼 것이다. 강림 도령도 그랬다. 현천검보다는 귀령면에 더 관심을 보였다. 홍도화만 허락한다면 귀령면을 연구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전부터 저승차사의 흑립에 새로운 기능을 더 넣고 싶어 하던 국장이었다. 흑립과 비슷한 능력이 있는 귀령면을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홍도화가 순순히 귀령면을 들고 국장을 만날까.’

거기다 담마까지 데리고 말이다. 도화를 차사 계약서에 지장 찍게 만들기까진 했지만, 파트너로서의 관계는 전혀 진전이 없는 상태다. 시시콜콜한 대화라도 나누면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텐데. 한 지붕 아래여도 분리된 집에서 사니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차사국 일 때문이라고 말하며 찾아가면 쫓아내진 않으니 다행이다. 싫은 기색은 역력하지만.

묵범은 오늘도 그 핑계로 도화의 집에 가 보기로 했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묵범은 일부러 벨을 두 번이나 눌렀다. 한 번만 누르면 홍도화가 무시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4번 정도 당한 뒤에 자신의 방문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꼭 두 번씩 눌렀다. 물론, 그래도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두 번을 눌러도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묵범은 홍도화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벨을 눌렀다. 순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국장 핑계를 대면서 이야기 좀 하자고 말하려던 묵범은 문을 연 사람을 확인하고는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홍도화 씨는요?”

“아… 자고 있어요.”

“이 시간에?”

묵범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20분. 저녁 식사 시간으로도 한참 이른 시간이다. 낮잠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은 애매한 시간인데다, 게으름 피우면서 잠을 잘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는데.

“들어가도 되겠니?”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담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묵범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똘똘함을 넘어서 쌀쌀하기까지 한 말투였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자주 보진 않았지만, 도화한테는 이렇게까지 쌀쌀맞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이 녀석의 성격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지.’

묵범은 담마가 자신을 한빙지옥만큼 냉랭하게 대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파트너는 담마가 아닌 홍도화니까.

“강림 도령의 지시 사항도 있고. 출근 준비도 알려 줘야 하고. 너한테 할 말도 있지.”

“…저한테요?”

담마가 살풋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어깨 위로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분명 머리카락이 더 길었던 것 같은데. 요즘 쉴 새 없이 외출하더니 미용실도 데려갔나 보다.

“잔다고 하니 좀 있다가 와야겠군.”

묵범이 나중에 오겠다고 몸을 돌리려는데, 담마의 뒤로 도화가 나타났다.

“뭐야. 이 시간에.”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강림 도령의 전언도 있고요.”

“강림 도령?”

그 인간이 왜? 도화가 세모 눈을 하고 묵범을 쳐다봤다. 묵범은 도화와 담마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인 것을 빼고는 닮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는데도 묘하게 닮은 기분이 들었다.

“허튼소리 하면 당장 쫓아낼 줄 알아.”

도화는 묵범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걸 더는 견디지 못하고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갔다. 그런 도화의 뒤를 담마가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묵범은 그제야 왜 둘이 비슷하단 기분이 들었는지 깨달았다.

‘둘 다 나를 귀찮은 눈으로 보고 있어.’

자신을 보는 눈빛이 똑같았다. 일상을 귀찮게 하는 방해꾼을 보는 눈빛이었다. 다온의 명부를 수정하고 끝내 주는 직장에 꽂아 주기까지 했는데 이런 푸대접을 받다니.

묵범은 심히 억울했으나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다. 자신을 싫어하는 홍도화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다간 계약을 파기하자고 할 것 같았다.

‘대체 왜 저승차사를 싫어하는 거지?’

사실 차사국은 홍도화를 공무 집행 방해를 하는 요주의 방해꾼으로만 여겼지, 차사 증오 범죄자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홍도화가 돕는 탈주 망자나 원귀는 억울하게 죽어서 그렇지, 원래는 평범한 망자보다 깨끗한 영혼들이었다. 망자를 인도하는 차사들도 안타까워하는 유의 망혼인지라 야근 때문에 욕을 할지언정 죽일 놈, 살릴 놈 하진 않았다. 만약 악귀 추혼을 방해했다면 강림 도령이 나서서 당장 잡아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어쨌든. 홍도화는 저승차사를 야근의 늪에 빠트릴지언정 차사를 증오하여 직접적인 공격을 하진 않았다. 물론 홍도화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홍도화 본인뿐이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은 그러했다.

도화가 대놓고 질색팔색하는 저승차사는 묵범이 유일했다. 초면에 몰래 다가가서 엉덩이와 허리를 만져 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묵범은 자신이 도화에게 저지른 만행은 생각도 못 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관 복도를 걸으며 묵범은 도화의 뒤통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고 있다는 담마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도화의 뒷머리가 눌려 머리카락이 삐죽하게 위로 솟구쳐 있었다. 소가 혓바닥으로 뒤통수를 스윽 핥으면 저렇게 될 것 같았다. 그는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거실에 도착했다.

“……?”

저녁 식사 시간은 아직 멀었으니 거실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려던 묵범은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멈춰 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좀… 믿기 어려워서였다.

“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텐트잖아.”

“아니, 그러니까 텐트가 왜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겁니까?”

짙은 회색의 텐트는 성인 두 명 정도가 들어가면 딱 맞을 사이즈였다. 캠핑은 귀찮고 분위기만 내고 싶어서 펼쳤다기엔 텐트 안에서 잠을 잔 흔적이 역력했다. 묵범은 다시 홍도화의 눌린 뒤통수를 쳐다봤다.

‘저 텐트에서 자고 일어난 건가?’

분명 필요 물품 목록에 침대도 있었다. 담마의 침대는 더블, 홍도화 본인의 침대는 가장 큰 사이즈로 적혀 있어서 캘리포니아 킹 사이즈로 주문했다. 그리고 모든 물품은 다 배송되어 설치까지 완벽하게 끝난 지 며칠 지난 상태.

묵범은 멀쩡히 크고 좋은 침대를 놔두고 저 좁은 텐트에서 잔 홍도화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집이 갑자기 넓어지니까 잠이 안 와서 그런 것뿐이야.”

도화는 텐트를 접어 치우며 변명하듯 말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넓고 커졌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가구 설치 기사가 침대 조립하는 모습을 옆에서 꼼꼼하게 확인했고, 매트리스도 신중하게 눌러 보았으며, 전에 쓰던 것보다 열 배는 빨라진 컴퓨터 속도에 감탄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거실의 통유리 창에 서서 파노라마 한강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이 맛에 한강뷰, 한강뷰 하는구나. TV에서 간접적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치를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야경에 푹 빠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담마와 현천은 달이 뜨자 자러 갔다. 특히 현천은 푹신한 방석이면 된다고 할 땐 언제고 자기도 담마의 것과 똑같은 침대를 내놓으라고 난리 쳐서 결국 방 하나를 차지하고 말았다. 방이야 여러 개이니 상관없지만, 쇠붙이 주제에 사람처럼 침대에서 이불 덮고 자는 꼴이 우스웠다.

도화는 새벽 별이 반짝이는 시간이 되어서야 자신의 침대로 갔다. 무척 큰 침대를 들였음에도 방은 널찍했다. 무드등을 켜고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도화는 제가 꿀잠을 잘 줄 알았다. 상상도 못 할 고가의 매트리스는 구름 위에 누운 것처럼 전신을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게 받쳐 주는 느낌이 끝내 줬는데.

‘온몸이 간질거려서 못 자겠어…!’

끝내 주다 못해서 온몸이 간질거렸다. 보드라운 깃털이 살살 스치는 느낌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선 도화는 이불과 베개만 들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딱딱한 바닥은 에어컨 바람에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누웠다. 그러자 간지럽던 느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쿠션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딱딱한 바닥 때문에 등과 어깨가 불편한데도 편했다. 이상한 설명이지만 불편한데 편했다. 아니, 익숙했다고 해야 하나.

흙바닥, 바위 위, 마구간 구석. 누렇게 뜬 장판, 싸구려 매트리스. 평생을 그런 곳에서 잠을 청했으니 저런 구름 같은 매트리스에 적응하지 못하는 걸 가지고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매트리스만이 아니었다.

‘너무 조용해서 적응이 안 돼.’

풀벌레와 산짐승 소리, 주정뱅이의 혀 꼬인 주정과 시비, 반지하 창문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 새벽이 되어도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소리까지.

모두 도화의 잠을 부르는 자장가였다. 하지만, 이 방은 방음이 너무 잘되어서 적막했다. 휴대폰으로 백색 소음을 틀어 보았지만, 인위적인 소리는 귀에 거슬리기만 했다.

그래서 거실로 나왔다. 최대한 낮춘 볼륨으로 TV를 틀고 창문 근처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새벽인데도 도로는 차가 활발하게 지나다녔다. 그렇게 도화는 값비싼 매트리스를 뒤로하고 딱딱한 거실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밖에 나간 도화가 사 들고 온 것은 원터치 2인용 텐트였다.

“이 집에 적응하는 중이니까 쓸데없는 참견 하러 온 거면 돌아가.”

집이 넓어서 잠이 안 온다면서 본인 방보다 훨씬 큰 거실에 나와 자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지적하려던 묵범은 도화의 경고에 입을 다물었다.

그냥 하려던 이야기만 하고 가야겠다. 마음먹은 그는 이어진 도화의 행동에 참지 못하고 물었다.

“멀쩡한 소파를 두고 왜 바닥에 앉는 겁니까?”

도화는 소파 밑부분을 등받이처럼 기대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담마도 자연스럽게 도화 옆에 앉아 묵범을 쳐다봤다. 쳐다보는 데 목 아프니까 어서 앉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결국, 묵범도 바닥에 앉았다. 집주인이 바닥에 앉아 있는데 손님만 소파에 앉는 것도 찝찝했다.

“그래서 국장의 전언이란 게 뭔데?”

대화는 도화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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