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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31화 (32/146)

31화

추혼부에 신규 수습 차사가 들어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추혼부뿐 아니라 차사국 전체에 퍼졌다고 해야 옳았다. 소문의 근원지는 수습 차사를 직접 스카웃 한 묵범이 아닌 국장인 강림 도령이었다.

“국장님. 그 수습 차사는 언제 볼 수 있답니까?”

“그걸 알면 내가 지금 추혼부로 가고 있겠냐?”

“아니, 국장님이 모르면 누가 안다고… 아, 범 수석님은 알겠네요? 파트너니까?”

“퍽이나. 오늘도 혼자 출근하던데?”

안 그래도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 기록을 살피고 있는 강림 도령이었다. 홍도화가 워낙 부끄러움이 많아서 3개월이나 나비로 불렸다간 차사직을 때려치울지도 모른다는 말에 한 달로 줄여 줬건만. 정작 홍도화는 차사국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산월관에서 만난 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범 수석!”

추혼부에 들어서자마자 강림 도령은 묵범을 크게 불렀다. 파트너도 없는 놈이 외근을 나갔을 린 없으니 사무실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추혼부 사무실에는 단 한 명의 차사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아침에 출근 카드를 찍은 기록이 있는데, 이 자식. 어딜 간 거지? 강림 도령은 묵범의 자리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외근은 안 나갔으니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잠시 후. 강림 도령의 예상대로 묵범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어라? 무슨 일로 추혼부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묵범은 손에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컵을 강림에게 내밀며 말했다.

“드시겠습니까? 입은 안 댔습니다.”

“됐어. 내가 애냐? 그딴 걸 마시게?”

“그럼 그냥 제가 마시겠습니다.”

묵범이 가져온 음료는 커피가 아닌 진한 아이스 초코였다. 그는 빨대로 얼음을 휘휘 젓다가 한 모금 쭈욱 빨았다. 진한 코코아색 액체가 거침없이 묵범의 입안으로 쭉쭉 빨려 들어갔다. 숨도 안 쉬고 절반을 마신 묵범은 옆 책상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묵범이 재차 묻자 강림 도령은 인상을 쓰며 몸을 뒤로 물렸다. 묵범에게서 단내가 풀풀 풍겼기 때문이었다.

“으, 너 그러다 당뇨 걸린다.”

“그건 인간이나 걸리는 병이고요. 전 해당 사항 없습니다.”

묵범은 나머지 아이스 초코도 한 번에 해치웠다. 그리고 아이스는 얼음이 절반이라며 투덜댔다. 강림 도령은 한껏 인상을 쓰고 의자를 뒤로 밀어 묵범에게서 좀 더 떨어졌다.

“네놈은 혈관 속에 설탕이 둥둥 떠다닐 거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질린 표정을 한 강림 도령은 묵범의 손에서 얼음만 남은 컵을 빼앗아 냅다 집어 던졌다.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얼음 컵은 분리수거 함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안에 들어 있는 얼음 때문에 다시 꺼내야 했지만, 그나마 바닥에 패대기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극단적으로 단것과 고기를 좋아하는 묵범과 달리 강림 도령의 입맛은 고릿적 어르신 입맛이었다. 그리고 마실 것은 무조건 물 아니면 술. 그리고 물보다는 술을 선호했다. 그런 그에게 묵범의 식성은 옆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곤욕이었다.

강림 도령은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이번에는 그걸 본 묵범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거… 아직도 드십니까?”

“네놈이 설탕 덩어리를 먹어 대니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은단이나 먹어야겠다.”

병 속에 든 것은 은색 알약. 은단이었다. 뚜껑을 열자 알싸한 냄새가 풍겼다. 묵범은 보이지도 않는 냄새를 피하려고 의자를 뒤로 물렸다.

“하나 주랴?”

“됐습니다. 연초도 안 태우면서 대체 은단은 왜 먹는 겁니까?”

“이런저런 효과가 많지만, 정신이 맑아져서 먹는다.”

“…차라리 치약을 먹겠습니다.”

“어우. 미친놈.”

강림 도령은 머리를 흔들었다. 선계에서 이런 놈을 내려보낼 줄 알았으면 파견 요청을 하지 말 것을.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래도 묵범이 데려온 홍도화는 자신과 얼추 성향이 맞을 듯하여 내심 기대하는 중이다. 하지만, 출근을 안 하니 만나 볼 수가 있나. 그렇다고 다짜고짜 부하 직원, 그것도 수습의 집에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 홍도화는 언제 출근하나?”

“다음 주부터 할 겁니다.”

“다음 주우? 계약서에 지장 찍은 지가 언젠데 다음 주?”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빠졌어. 강림 도령이 혀를 차며 심기 불편함을 내비쳤다.

“문제가 좀 생겨서요.”

“문제? 집도 해 줘, 가구도 채워 줘,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는데 뭐가 또 문제라는 거야?”

“산월관에서 본 혼혈 여우. 담마를 기억하시는지요.”

“아, 그 반쪽? 기억하지. 그런데 왜?”

“저와 도화가 출근하면 집에 담마 혼자 남게 되는 게 문제입니다.”

“혼자 집 지키게 하는 게 걱정이다? 그러면 호골로 보내 버려. 여우 어미 쪽 피는 꽤나 순혈인 것 같던데. 그 정도면 혼혈이라 해도 받아 주겠지.”

“호골로는 절대 안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인간 아이처럼 학교와 학원을 보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럼 보내면 되지. 뭐가 문제라는 거야?”

강림 도령이 답답하단 듯이 따져 물었다. 호골로 못 가는 건 사정이 있다 치고. 학교에 보내기로 했으면 보내면 될 거 아닌가.

“신분증이 없습니다.”

“신분증….”

신분증이란 말에 강림 도령의 답답함이 조금은 풀렸다. 하계의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고유 번호를 받는다. 그게 있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에 저승차사들도 가지고 있다.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하계에서 보내니 당연한 일이었다. 차사의 신분증은 무구부에서 만든다. 신분증이 무기는 아니지만, 인간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주술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홍도화도 차사국에서 발급되는 신분증을 새로 받을 것이다.

“담마 것도 만들어 두라고 하지. 그러니 어서 빨리 출근하라고 해.”

“감사합니다.”

묵범이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강림 도령에게 무슨 말을 해야 부탁을 들어줄지 고민했던 것이 허무할 정도로 담마의 신분증 문제는 빠르게 해결되었다.

그는 도화에게 이번 주까지 담마에 대한 문제를 모두 해결하라고 한 뒤 다음 주부터 그를 추혼부로 끌고 나오기로 다짐했다.

“국장님 오셨습니까?”

추혼부 차사 하나가 외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도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강림 도령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인사를 받으려는 게 아니라 도망가기 위함이었다.

“어? 벌써 가시게요?”

강림 도령은 손에 들린 컵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추혼부 이 새끼들은 죄다 미각이 파괴된 거냐? 어째 하나같이 혈당 폭발할 음식물 쓰레기만 처먹고 다녀?”

뒤이어 들어온 차사가 강림 도령의 말을 듣고 들고 있던 것을 등 뒤로 슬쩍 숨겼다. 두 차사가 사 온 음료는 바닐라 시럽을 잔뜩 넣은 바닐라 라떼였다. 시럽을 얼마나 많이 추가했는지 바닥에 가라앉은 시럽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국장님. 추혼부 회식 안 합니까? 진짜 오래간만에 들어온 신입 나비인데. 쓰리플 한우 어떠십니까?”

“쓰리플은 또 뭐야?”

처음 들어 보는 한우 등급에 강림 도령의 한쪽 눈썹이 휙 올라갔다. 말만 들어도 비쌀 것 같았다.

“투플보다 더 좋은 거랍니다. 그냥 나비도 아니고 그 ‘도방’이 신입으로 들어왔는데 이 정도는 먹어 줘야죠.”

“맞습니다! 저흰 도방을 언젠가 잡아들일 생각만 했지, 후배로 맞이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역시 우리 수석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축하와 포상으로 쓰리플 한우!”

“산월관! 산월관!”

어느새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다른 차사들도 가세해서 쓰리플 한우와 산월관을 외쳤다. 추혼부 사무실 근처를 지나가던 타 부서 차사들이 무슨 일인가 확인하러 왔다가 소란의 근원지가 추혼부인 것을 확인하고 그냥 돌아갔다. 차사국에서 추혼부의 이런 소란은 일상이었다.

“너흰 성인병으로 다 뒈질 거다.”

강림 도령이 빠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척 봐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게 보이는데도 추혼부 차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어깨동무까지 하며 산월관과 한우를 외쳤다.

결국, 패배한 쪽은 강림 도령이었다. 그는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와아아아!! 국장님의 절대 카드다!!”

차사들의 함성이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강림 도령은 한쪽 손으로 귀를 막으며 묵범에게 말했다.

“이걸로 산월관에서 회식해.”

“오. 웬일이십니까?”

“대신 이번 토요일에 홍도화와 반쪽 여우를 국장실로 데려와.”

“홍도화는 그렇다 치는데. 담마는 무슨 일로 부르시는 겁니까?”

“아무리 인간 아이와 섞여 지내게 한다 해도 귀물은 귀물. 언젠가는 반드시 사고를 치기 마련이지. 그 전에 교육 좀 하려고 한다.”

교육? 국장님이?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혹시 수석님이 국장님 커피에 설탕이라도 탄 거 아냐?

회식 허락의 기쁨에 젖어 있던 차사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군거렸다.

“치매만 아니면 돼. 국장님 카드로 긁었는데 허락한 기억 없다고 그러면 큰일이잖아.”

강림 도령의 건강 걱정이 아닌 회식 걱정이었다. 결국, 강림 도령의 화가 터졌다. 추혼부 차사들은 장장 3시간 동안 바닥에 무릎 꿇고 강림 도령의 분노 어린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 * *

3시간이나 강림 도령의 잔소리를 빙자한 거친 욕설을 견디는 것은 곤욕스러운 일이다. 오죽하면 강림 도령의 숨겨진 능력은 욕설로 정신 공격하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강림 도령의 정신 공격을 두려워하는 부서는 추혼부가 유일했다. 다른 부서는 강림 도령의 욕설 폭탄을 들을 일이 아예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예 국장실까지 올라갈 일도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국장실까지 경위서가 올라갈 정도로 사고를 치는 부서는 추혼부가 유일하다는 의미였다.

강림 도령은 예상했다. 앞으로 추혼부에서 벌어질 사고 빈도는 더욱 잦아질 것이라고. 이번에 수석으로 진급한 묵범이 그 이유였다. 괜한 짓을 했나? 강림 도령은 자신이 묵범을 수석 자리에 앉혀 놓고도 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했다. 영수 태생으로 진인까지 달성한 만큼 능력은 당연히 특출나고, 타인을 이끄는 통솔력도 발군이다. 하지만, 추혼(追魂)하는 데 너무 거침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진인씩이나 된 재인이니 지켜야 할 선은 지키겠지, 싶은 마음에 수석으로 올린 거지만.

‘도방…. 그자를 끌어들일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추혼부 차사들의 말처럼 공무집행을 방해하는 도방을 잡아들일 생각만 했지, 차사국으로 끌어들일 생각은 못 했었다. 산월관에서 잠깐 본 게 전부였지만, 꽤 진중해 보이긴 했지. 그래서 강림 도령은 내심 도방-홍도화에게 기대를 거는 중이었다. 묵범이 깍두기 차사 시절엔 차사국에 큰 권한을 갖지 못했으니 단순히 하계에서 기물을 파손하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수석이 된 직후 그 권한이 갑자기 넓어졌다. 그러니 부디 홍도화가 묵범의 브레이크가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

‘아, 여우의 명부를 멋대로 수정한 게 홍도화 때문이었지.’

어쩐지 추혼부… 아니, 차사국에 먹구름이 드리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강림 도령의 가슴에 서늘하게 스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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